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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9.11 11:36 수정 : 2015.09.11 11:46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9일 오후 국회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대표직에 대한 재신임을 묻겠다”고 밝힌 뒤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김의겸의 우충좌돌 (25)

‘당 대표 사퇴 뒤 전당대회 개최’ 요구 대신
직접 임시전대 소집해서 대결하면 될 일

“재신임 묻겠다”는 게 ‘친노세력 동원령’?
‘친노패권’ 청산하라는 ‘국민 뜻’으로 깨면 될 일

새정치 지지자들, 절망 넘어 환멸한 지 오래
치열하게 맞붙고 결과에 승복하는 모습 보여야

고등학교 때다. 우리 반에 주먹 쓰는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거다. 순간적으로 열이 뻗쳐서 한마디 쏘아붙이고 말았다. ‘주먹’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옥상으로 올라와!” 라고 명령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도대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녀석은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달렸으니 난 한주먹감도 안 됐다. 짝꿍이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겸아, 도망쳐!” 그러나 나는 옥상으로 난 계단을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비겁해지기 싫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 학교 옥상에 올랐던 기억…비겁하기 싫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재인 대표가 “재신임을 묻겠다”고 한 건 당 안의 비주류에게 “옥상으로 올라가자”고 한 거나 진배없다. 물론 문재인은 ‘주먹’이 아니다. 오히려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무기력한 모습만 보여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통을 벗어젖히고는 ‘한판 붙어보자’고 비주류에게 도전장을 내민 거다. 한데 이번엔 비주류의 태도가 석연찮다. 당당하지 못하다.

비주류는 문재인의 제안을 보고는 ‘당 대표 사퇴 뒤 전당대회 개최’를 주장한다. 새로 열리는 전당대회에 문재인이 다시 나와 재신임을 받으면 되는 거 아니냐는 얘기다. 그리 될 일이라면 진즉에 그리 됐을 게다. 명색이 수십만 국민과 당원의 지지를 받아 뽑힌 대표인데 몇몇 의원들이 요구한다고 냅다 사표를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 될 일이라면 비주류는 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는 요구하지 않는가. “이 꼴로는 나라의 장래가 암담하니 대통령직을 내놓고 다시 대선을 치르자. 박근혜 대통령도 다시 후보로 나와 당선되면 된다”고 말할 일이다. 

대통령을 강제로 물러나게 한 뒤 다시 뽑는 방법은 헌법에 없으니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는 얼마든지 다시 선출할 수 있다. 당헌을 찾아보니 16조에 이런 항목이 있다. “임시전국대의원대회는 당무위원회의 의결이 있거나 전국대의원대회 재적대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는 때 의장이 2개월 이내에 소집한다.” 비주류 의원들이 그동안 내보인 확신과 자신감에 비춰보면 각자 전국에 흩어져 대의원 3분의 1 서명을 받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문재인 물러가라’고 몇 달 동안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할 게 아니라, 당헌에 따라 적법한 절차를 밟으면 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놔두고 왜 문재인에게만 자발적인 사퇴를 요구하는지 알 길이 없다.

대통령 하야 요구와 같은 점과 다른 점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가 마련한 마지막 혁신안을 논의하려고 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무위원회에서 문재인 대표가 혁신안을 의결하기에 앞서 두 손을 모은 채 생각에 잠겨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비주류의 ‘당 대표 사퇴 뒤 전당대회 개최’는 “옥상에 올라가자”는 말에 “전교생 다 모아놓고 누가 옳은지 물어보자”는 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문제는 누가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으느냐다. 당연히 그렇게 하자는 쪽(비주류)이 해야 할 몫이다. 옥상에서 결판을 내자는 쪽(문재인)에 떠넘기는 건 대결이 두려워 도망가려는 속셈에 불과할 뿐이다. 

어느 비주류 의원은 문재인의 재신임에 대해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 당원을 합해서 재신임 묻겠다고 하는데 대부분 친노 세력으로 뭉쳐져 있는 상황 속에서는 어차피 재신임 물어도 결과는 뻔합니다.”(▶ 관련 기사: 박주선, ‘문재인 재신임 발언’은 “친노세력 동원령”) 이 의원이 그동안 줄기차게 주장해 온 게 무엇이던가. 문재인 대표가 사퇴하고 친노 패권주의를 청산하라는 게 ‘국민의 뜻’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문재인이 막상 국민의 뜻을 묻겠다고 하니 ‘친노세력 동원령’이란다. 친노가 움직이면 5천만 국민과 100만 당원이 모두 친노를 따른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친노가 국민과 당원의 지지를 많이 받는다는 얘기가 되지 않는가. 제 발등을 찍는 논리다. 여태 모욕을 주고 툭툭 치더니, 당하던 아이가 막상 한판 붙어보자고 나서자 “넌 근육(국민의 지지)도 많고 주먹(당원의 지지)도 커서 안 돼”라고 하는 격이나 마찬가지다. 막상 옥상에 올라가려니 겁먹은 거다. 옥상에 올라가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둘러대는 거다.

비주류는 문재인의 도전에 당당하게 응해야 한다. 재신임을 ‘꼼수’라면서 회피하는 건 책임있는 정치인의 자세가 아니다. 정면 승부를 피하는 건 문재인이 재신임에 성공해도 계속 흔들어대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문재인이 재신임을 받는 데 실패하면 그 결과는 냉큼 받아들일 것 아닌가. 국민의 눈에 기회주의로 비칠 뿐이다.

‘꼼수’가 아니라면…비주류에겐 두번의 승부 기회

펜싱 경기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비주류에게는 두 번의 기회가 있다. 16일 중앙위원회와 추석 전후의 여론조사다. 둘 중 한 번만 이겨도 그토록 비판하던 친노 패권주의는 소멸한다. 한명숙은 이미 교도소로 갔고, 이해찬도 새까만 후배로부터 ‘백의종군’ 요구를 받아 사실상 고립돼 있다. 문재인이 재신임에 실패하면 대표직을 던질 뿐만 아니라 정계를 은퇴할 게 분명하다. 친노의 지도부가 완전 소멸하는 거다. 리더가 없으니 친노 세력도 사라지는 거다.

그러니 ‘옥상으로 올라가’ 문재인과 맞장을 뜨라. 중앙위원들은 500명밖에 안 되니 미리 일대일로 만나 설득할 수 있다. 16일 당일 현장에서 치열하게 논쟁해 문재인을 꺾어라. 그게 안 되면 ‘국민 50%+당원 50%’ 여론조사를 앞두고 국민과 당원들에게 ‘문재인을 불신임해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하라. 불구경과 싸움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법이니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신문 방송이 비주류의 목소리를 충분히 전달해줄 것이다. 

그럴려면 시간이 더 필요지도 모른다. 그러니 문재인도 일정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 중앙위원회야 이미 소집돼 있다 할지라도 ‘50+50’ 여론조사는 추석 뒤로 늦출 필요가 있다. 비주류 의원들이 추석 때 자신의 지역구로 내려가 국민과 당원들에게 선전전을 할 시간을 충분히 주는 거다.

미국의 어느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 “최선은 좋은 결정을 내리는 것이고, 차선은 나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가장 나쁜 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이 최악의 상태다. 좋은 지도부인지 나쁜 지도부인지 따지는 건 사치다. 끝없이 이어지는 분란 속에 리더십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 뭐 하나 되는 꼴을 보지 못했다. 지지자들은 절망을 넘어 환멸의 단계로 넘어간 지 오래다.

“이의가 있으면 지금 말하라. 아니면 영원히 침묵하라”

치열하게 붙어 싸운 뒤 결판이 나면 더 이상 군말을 말자. 어느 쪽이 코피가 터지든 코피 터지는 쪽은 무릎을 꿇어라.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결혼식에서 주례가 꼭 이런 말을 한다. “이 결혼에 이의가 있는 사람은 지금 말하십시오. 아니면 영원히 침묵하십시오.” 불만이 있으면 지금 말하고 옥상에 올라가라. 영원한 침묵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그저 총선 때까지만이라도 침묵해달라는 게 당 지지자들의 소원이다. 

아 참! 그래서 옥상에 올라가 어떻게 됐냐고? 한 대도 안 맞았다. 그 녀석도 제 잘못이 있으니 차마 주먹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어이구! 이걸! 그냥! 팍!” 하면서 허공에 종주먹질만 몇 번 해대더니 그냥 내려가 버렸다. 그러니 옥상에 올라가라. 당당하면 이긴다.

김의겸 선임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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