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나한텐 퇴직금이 없을까?
부산에 사는 정아무개씨는 2014년 2월까지 12년 동안 이른바 ‘야쿠르트 아줌마’로 일했습니다. 매일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한국야쿠르트의 근무복을 입고 한국야쿠르트라고 적힌 배달 차를 끌고 다니며 한국야쿠르트 영업소에서 받아 온 한국야쿠르트 유제품을 손님들한테 배달했습니다. 그렇게 판매한 금액의 24%가량이 정씨의 수입이었습니다. 정씨는 12년 동안 야쿠르트 배달 말고 다른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일을 그만둘 즈음 정씨는 자신이 한국야쿠르트의 노동자처럼 일했는데도 퇴직금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습니다. 그는 일을 쉰 적도 별로 없는데 다른 노동자처럼 연차휴가를 쓰지 않은데 따른 수당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정씨는 한국야쿠르트를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주지 않은 퇴직금과 연차휴가수당 등 3000여만원을 내놓으라는 게 요구의 핵심입니다. 전국의 1만3000명 ‘야쿠르트 아줌마’ 가운데 한국야쿠르트를 상대로 이런 소송을 낸 것은 정씨가 처음입니다. 노동계의 눈 귀가 쏠렸습니다.
2. 전국에 특수고용 노동자 230만명
정씨처럼 노동자인 듯 노동자 아닌 듯한 노동자들을 일컬어 특수고용노동자(줄여서 특고)라고 부릅니다. 대부분 용역·도급·개인하청 등의 이름으로 된 계약을 사용자 쪽과 맺고 일하는 노동자들입니다. 사용자 쪽은 이들한테 세무서에 개인사업자 등록을 내도록 유도합니다. 회사는 이들한테 퇴직금을 비롯해 4대 사회보험 등을 챙겨주지 않아도 됩니다. 노동조건에 불만을 느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이라도 결성해 교섭을 요구할라치면 “당신들은 내 노동자가 아니니 내가 당신들의 교섭요구에 응할 필요 없다”고 하면 됩니다. 그러니 이들은 노동자로 직접 고용하기보다는 특수고용 노동의 형태를 좋아합니다.
특고는 1998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 급속도로 늘어났습니다.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가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 의뢰를 받아 조사한 결과를 보면, 특고 노동자의 수가 23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류·화물·레미콘·덤프트럭 운전자와 대리운전 기사 등이 51만여명에 달하고 자동차·신문광고·보험모집 등의 업무영역에 48만여명, 야쿠르트 아줌마와 같은 방문·통신 판매 업무에도 13만여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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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고용 노동자 현황. 그래픽 강민진 기자 rkdalswls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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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법원은 무엇으로 노동자 여부를 판단하나
한 노동자가 어느 회사에 속한 노동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법원의 기준이 몇 가지 있습니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판례 중 하나는 퇴직한 학원 강사가 원장을 상대로 퇴직금을 달라고 요구한 소송에서 대법원이 2006년 “학원 강사도 노동자”라며 제시한 논리입니다. 어느 일꾼이 한 회사의 노동자로 인정받으려면 이런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① 일꾼이 회사한테 노동을 제공하는 목적이 취미생활이나 이런 게 아니라 임금이어야 합니다.
② 일꾼은 회사에 종속적인 관계에서 노동을 제공해야 합니다. 여기서 ‘종속적인 관계’의 뜻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부분이 핵심입니다. 우선 일꾼이 하는 업무 내용을 회사가 정해야 합니다. 일꾼 마음대로 업무 내용을 정하면 안 됩니다. 일꾼은 회사가 정한 취업규칙이나 복무규정의 적용을 받아야 하고 회사가 일꾼의 일을 직접 지휘하고 감독해야 합니다. 또 일꾼의 근무시간과 장소는 회사가 지정할 뿐 일꾼 마음대로 하면 안 됩니다. 일꾼이 일할 때 쓰는 도구나 원자재 등은 회사 소유여야 하고 일꾼이 자신의 자리에 제3자를 데려다 대신 일을 시키면 안 됩니다. 사용자한테 노동을 제공한 결과로 이윤이 창출되거나 손실을 보는 것은 회사의 책임이어야 합니다.
③ 일꾼의 기본급이나 고정급이 정해져 있고 회사가 일꾼의 근로소득세를 임금에서 원천징수해야 하고 4대 사회보험 등을 납부했으면 노동자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대목은 일꾼을 자신의 노동자로 인정하기 싫은 회사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피해갈 소지가 크기 때문에 이 ③번 항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노동자임을 부정해선 안 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입니다.
4. 야쿠르트 아줌마의 눈물
그런데
법원이 내린 결론은 정씨의 패배입니다. 1·2심에 이어 대법원마저 지난 24일 한국야쿠르트는 정씨한테 그 돈을 줄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정씨를 한국야쿠르트가 고용한 노동자로 볼 수 있느냐’였습니다. 퇴직금이나 연차휴가수당 모두 근로기준법에 그 근거가 있는데, 그 법상 노동자가 아니면 챙길 수 없는 권리입니다.
법원은 정씨와 한국야쿠르트 사이에 ‘종속적인 관계’가 없다고 봤습니다. 정씨가 언제 어디에서 야쿠르트를 팔지 여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고 한국야쿠르트가 이 대목에서 감 놔라 대추 놔라 지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또 정씨의 판매 실적이 나쁘거나 한국야쿠르트가 실시한 교육에 불참했다고 해서 징계를 하거나 불이익을 주지도 않았다고 봤습니다. 매일 몇 개의 한국야쿠르트 제품을 팔지도 정씨가 결정할 수 있었고, 한국 야쿠르트가 정씨한테 ‘야쿠르트 아줌마’ 옷을 지급한 것도 “배려 차원”이란 게 대법원의 시각입니다.
5. 비슷한 조건의 채권추심원은 노동자 인정
대법원은 정씨 판결을 설명하면서 “이 판결이 모든 유제품 위탁 판매원이나 유사직역 종사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개별 사건마다 사실관계를 놓고 따로 판단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대법원은 지난 4월 신용정보 회사에서 특고로 일한 채권추심원은 노동자로 봐야 한다는 판결을 내놓았습니다. ㅈ신용정보회사에서 6달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며 3∼6년 동안 일하다 그만둔 노동자 3명이 정씨처럼 회사한테 퇴직금을 내놓으라고 제기한 소송이었습니다. 이 재판은 1·2심이 모두 회사 쪽 손을 들어줬는데 대법원은 그 판단이 틀렸다며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채권추심원들이 노동자로 인정받은 근거는 회사 쪽과의 ‘종속적인 관계’를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채권추심원들이) 업무수행 과정에서 피고(회사)로부터 수수료 차감, 다른 팀으로의 이동, 이미 배정된 채권의 환수, 새로 배정될 채권의 감소 등과 같은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캠페인, 조기출근, 야근, 토요일 근무 등 피고가 업무실적 향상을 위해 동참을 요구하는 각종 조치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또 “채권추심업무 과정에서 목표설정에서부터 채권추심업무의 처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업무의 과정을 (회사의) 채권관리시스템에 입력하게 함으로써 원고들의 업무를 구체적으로 지휘하고 관리·감독한 것으로 보기에 충분하다”며 노동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6. 대법원 판결의 문제점
‘야쿠르트 아줌마’에 대한 이번 대법원 판결이 가장 크게 비판받는 지점은 ‘구닥다리 관점’입니다. 오래전 노동자들이 공장에 출퇴근하며 일하던 산업화 시대의 판단 기준에서 나아가지 못 했다는 지적입니다. 정보화 시대, 서비스 직종의 급속한 증가 등과 같은 한국사회 노동 형태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갈라파고스 기준’ 아니냐는 것이죠. 민주노총 법률원의 권두섭 변호사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19세기적 사고에서 나온 판결”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대법원은 정씨를 노동자로 볼 수 없는 근거 가운데 하나로 노동자라면 내지 않았을 야쿠르트 아줌마 전동카트 사용료를 매달 1만원씩 회사에 낸 대목을 들었는데, 이는 “사용자가 자기 사업하는 데 필요한 비용까지도 노동자에게 떠넘긴 것으로, 이를 노동자 아님의 근거로 삼는 건 황당하다”는 게 권 변호사의 설명입니다. 또 출퇴근 시간에 제약이 없다는 부분도 대법원은 노동자 아님의 근거라고 했으나 이는 정씨의 판매량에 따라 소득이 결정되는 구조상 이미 계약 그 자체로 통제가 이뤄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대법원은 정씨 사건에서 “위탁판매원들의 어떠한 의무 위반에 대해 피고(회사)로서는 계약 해지에 따른 불이익만을 줄 수 있을 뿐, 복무규정에 따른 각종 제재를 부과할 수는 없다”고 해 특고 노동자에겐 사실상 해고에 해당하는 계약해지를 가벼이 여기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대법원 판결 직후 낸 논평에서 “노동법 적용을 면하고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비전형적 고용 형태가 사회 전체로 확대되고, 일자리는 점점 더 불안정하고 열악해지고 있는 현실인데도, 법원이 여전히 사회·경제적 종속성의 문제와 근무형태의 실질에 눈 감으며, 드러난 형식에 따라 노동자 보호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유감”이라며 “특히 여성 집중 직종(골프장 캐디, 보험모집원, 학습지 교사 등)에 대해서는 이를 마치 여유로운 부업이라도 되듯 부수적이고 이차적인 것으로 취급하면서 근로자성을 쉽게 부인하는 선입견이 이번 판결에도 그대로 투영된 것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습니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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