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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국회의장이 1일 20대 정기국회 개회사를 통해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과 관련한 논란은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라며 고위공직자 전담 특별수사기관 신설 법안의 필요성을 제기하자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의장석으로 와 항의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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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야당 출신인 정세균 국회의장은 20대 국회 첫 정기국회 개회사를 통해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비리 문제와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배치 관련 정부의 소통 부족을 비판했습니다. 이에 새누리당 의원들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집단 퇴장했고, 한밤중 의장실 점거를 감행했습니다. 이어 국회 일정 보이콧을 선언하고 정 의장을 ‘악성균·테러균’이라고 지칭하는 등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국회 파행 사태는 하루 만에 봉합됐지만 정 의장이 지지와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화제의 중심에 선 것만은 분명합니다. 국회의장은 국민이 직접 뽑은 의원들로 구성된 입법부의 수장입니다. 국가 의전서열에서도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 위치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대통령에 견줘 그 역할이 덜 알려져 있는데요. 과거 국회의장마저 대통령 그늘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사정부 시절, 국회는 민의를 반영하기보단 대통령의 독단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통법부(법률을 통과시켜주는 부처)’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국회의장의 리더십도 변하기 시작했는데요. 한국 정치사에서 국회의장의 역할과 위상은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짚어보았습니다.
1. 국회의장, 어떻게 뽑나?
국회법 제15조를 보면, ‘의장과 부의장은 국회에서 무기명 투표로 선거하되 재적 의원 과반수의 득표로 당선된다’고 돼 있다. 정당 간 협상을 통해 국회 원 구성이 시작된 13대 국회(1988년~1992년) 이후 관례적으로 다수의석을 차지한 제1당이 임기 2년의 국회의장 자리를 가져갔다. 올해 20대 국회 원 구성 협상에서 여·야는 국회의장 및 상임위원장 배분을 놓고 막판까지 대치했다. 6월8일 원 구성 협상이 타결되면서 국회의장 자리는 더불어민주당 몫이 됐다. 이에 당내 ‘경선’을 통해 6선의 정세균 의원이 후보로 결정됐고, 본회의 투표를 거쳐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야당에서 국회의장이 배출된 건 이번이 두 번째다. 16대 국회 후반기(2002~2004년)를 이끈 박관용 국회의장은 당시 야당이자 제1당 한나라당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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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 대표 등 새누리당 지도부가 2일 낮 정세균 국회의장실을 항의방문하려다 정 의장이 자리에 없자 의장실 앞 복도에 앉아 팻말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른쪽부터 이 대표, 정진석 원내대표, 조원진 최고위원.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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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낙하산’ 국회의장, 입법부 흑역사
과거에도 국회의장은 형식상 국회의원들이 선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통령이 내정하는 인사가 국회의장이 됐다. 특히 군사정부 시절 대통령이 국회의장을 낙점했고, 국회의장은 대통령을 대신해 야당의 비판을 무릅쓰고 여당이 원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951년 여당인 자유당이 창당되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대통령 권한이 강화되면서 대통령 의중이 반영된 ‘낙하산 국회의장’이 탄생한다. 1954년~1960년 3·4대 국회의장은 이승만 대통령 비서 출신인 이기붕 의원이었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들어선 6·7대(1963년~1971년) 국회의장은 박정희 대통령 뜻에 따라 이효상 의원이 맡았다. 이 의원은 1960년 처음 국회에 입성한 정치 신인이었다. 이효상 의장은 1969년 9월14일 새벽 2시 30분 여당 의원들만 참여한 상황에서 본회의 개의를 선포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가능케 하는 이른바 ‘3선 개헌안’을 6분 만에 통과시켰다.
3. 26년 전 국회의장 개회사 논란, 왜?
1988년 13대 총선 결과,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국회가 열린다. 당시 4당 총무들은 국회의장 자리를 제1당인 민주정의당에 주고, 부의장 2명은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에 할당했다. 민정당은 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협의를 거쳐 김재순 의원을 국회의장 후보로 지명했고, 그는 13대 전반기(1988~1990년) 의장을 맡는다. 그런데 여소야대였던 국회가 하루아침에 여대야소로 뒤바뀐다. 1990년 2월 민정·민주·공화당 3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한 것이다. 김재순 의장이 민자당 창당 닷새 뒤 열린 임시국회 개회사에서 “여소야대의 4당 병립체제가 해체되고 국민에게 신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다수 여당과 소수야당으로 양립된 모습을 갖추게 됐다”며 3당 합당을 옹호하자 이에 반발한 평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에서 집단 퇴장했다. 김태식 평민당 대변인은 김 의장에 개회사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국회의장이 입법부 장이 아닌 민자당의 시녀로 전락해 3당 야합을 찬양·지지하는 파당적 언사를 농하는 것은 결코 묵과할 수 없다.” (<한겨레>1990년 2월21일)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국회의장은 정치적 중립을 요구받아왔다. 국회의장이 집권여당의 이해관계를 입법 과정에서 반영했던 ‘흑역사’가 뿌리 깊었기 때문이다. 1988년 국회법 개정으로 다수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국회를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만들어진다. 국회의장이 원 구성·의사일정 등 국회 운영 전반을 교섭단체 대표와 협의해 결정하도록 한 것이다.
4. 국회의장이 무소속인 까닭
대통령·소속 정당과 일정한 거리를 둔 최초의 국회의장으로는 이만섭 의장이 꼽힌다. 그는 1993년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과정에서 부동산 투기 등이 문제가 된 박준규 의장이 중도 퇴진하면서 1993년 4월부터 1년여가량 의사봉을 처음 쥐게 된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이 예산안을 처리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2000년 16대 총선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하면서, 국회의장 선출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대통령 뜻을 반영해 국회의장을 선출하던 관례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1·2당은 각각 국회의장 후보를 내어 본회의에서 투표로 선출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전반기(2000~2002년)에는 민주당 후보로 추대된 이만섭 의원이 서청원 한나라당 의원을 누르고 의장에 선출됐다. 같은 방식으로 후반기엔 사상 첫 야당 출신 국회의장이 탄생한다.
지난해 말 작고한 이만섭 의장은 2000년 6월5일 16대 국회 임시국회 개회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저는 앞으로 이 자리에서 의사봉을 칠 때, 한번은 여당을 보고 한번은 야당을 보며, 또 마지막으로는 국민을 바라보며 양심의 의사봉을 칠 것입니다.”
2002년 국회법을 개정하면서, 국회의장은 당선 다음날부터 직을 유지하는 동안 당적을 가질 수 없도록 했다. 국회의장이 소속 정당의 이해관계를 초월해, 전체 국민의 이익을 고려하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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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22일 당시 민주당 강기정 의원(국회의장 연단 앞)이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강행 처리에 반대하며 국회의장 연단으로 뛰어들고 있다. 2008년 12월 국회에 제출된 미디어법은 2009년 7월22일 김형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통해 국회를 통과했다. 류우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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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유신시절 태어난 직권상정
국회의장은 국회의 최종 의사결정 권한을 갖는다. 특히 직권상정 권한은 국회의장이 지닌 힘의 원천이다. 직권상정이란, 소관 상임위 심사 과정을 건너뛰고 법률안을 본회의 표결에 곧바로 부치는 것이다. 법률안 국회 통과 요건은 재적 의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 찬성이다. 여당이 과반의석을 가진 상황에서 쟁점법안이 직권상정될 경우, 야당에서 법 통과를 제지할 도리가 없다. 야당이 반대하는 정책을 날치기 처리하는데 직권상정 권한이 악용돼 온 것도 사실이다.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이라는 칼자루를 쥐여준 건 유신정권이었다. 유신체제의 제9대 국회(1973년~1979년)에서 의원들의 의정활동은 매우 위축됐다. 발언 시간에 제한이 생겼고, 대통령의 사생활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됐다. 반면, 국회의장은 의석 배정까지 할 수 있을 만큼 권한이 확대됐는데, 대통령이 국회의장을 통해 국회 의사결정 과정을 쥐락펴락하려 한 흔적이다.
12대 국회(1985~1988년)까지 항상 집권여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했고 입법 주도권도 정부가 장악했기 때문에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하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그러나 점차 직권상정이 증가하면서 여당의 날치기와 여당의 몸싸움 저지 등 충돌이 반복됐다. 특히, 18대 국회(2008년~2012년)에선 무려 99개 안건으로 급증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2012년 직권상정 요건을 강화한 국회법 개정안(국회선진화법)이 본회의에서 통과된다.
국회법 제85조(심사기간) ① 의장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위원회에 회부하는 안건 또는 회부된 안건에 대하여 심사기간을 지정할 수 있다.
1. 천재지변의 경우
2.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의 경우
3. 의장이 각 교섭단체대표의원과 합의하는 경우
②제1항의 경우 위원회가 이유없이 그 기간 내에 심사를 마치지 아니한 때에는 의장은 중간보고를 들은 후 다른 위원회에 회부하거나 바로 본회의에 부의할 수 있다.
천재지변이나 국가비상사태, 여야가 합의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국회의장이 상임위에 있는 법안을 본회의로 가져올 수 없게 됐다. 이러한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은 2012년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끌던 새누리당의 4·11 총선 공약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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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15일 국회의장실에서 당시 정의화 국회의장(가운데)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왼쪽),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문구를 수정해 강제성을 약화시킨 국회법 개정안 ‘정의화 중재안’을 정부로 이송하는 서류에 서명한 뒤 손을 맞잡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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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박근혜 대통령에게 미움받은 국회의장
19대 국회 후반기(2014~2016년) 국회의장은 새누리당 5선 출신 정의화 의장이었다. 비박계인 그는 2014년 5월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세간의 예상과 달리 ‘친박’ 황우여 의원을 제치고 국회의장 후보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과 정 의장은 줄곧 껄끄러운 관계를 지속했다. 지난해 말 청와대와 여당이 ‘국가비상사태’를 언급하며 노동5법, 테러방지법 등 쟁점법안을 직권상정할 것을 요구한 데 대해 정 의장은 ‘법에 따라 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올해 2월 테러방지법안에 대해선 남·북 상황이 달라졌다며 직권상정한다. 야당은 테러방지법안 표결을 저지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벌이며 법안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1969년 8월2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박한상 의원이 ‘3선 개헌안’을 막기 위해 10시간15분간 반대토론을 한 이후 47년 만에 등장한 필리버스터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 초 새해 기자회견에서도 국회를 맹비난했다. 박 대통령은 “동물국회가 아니면 식물국회가 될 수밖에 없는 수준밖에 안 되나, 어떻게 보면 이 선진화법을 소화할 능력이 안 되는 결과”라고 짚었다. 새누리당도 직권상정 요건을 완화하는 국회법 개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에 정 의장은 1월 말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여당 주장처럼 직권상정 요건에 ‘재적의원 과반수가 본회의 부의를 요구하는 경우’를 더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발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4월 총선 결과 국회는 여소야대로 바뀌었다. 직권상정 요건 완화를 둘러싼 여·야 입장도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정국에서 정세균 의장은 어떤 국회의장으로 기록될 것인가.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참고자료
<민주화 이후 국회의장 연설문에 나타난 의정목표의 변화 연구>(2007년·최용환, 함성득)
<국회법, 정치상황, 그리고 국회의장의 리더십>(2012년·김민전)
<민주화 이후 역대 국회의장의 리더십 스타일: 새로운 측정과 분석>(2015년·최준영, 신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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