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11.16 12:02 수정 : 2016.11.16 18:21

[뉴스AS] 무릎을 치며 보는 ‘정윤회 파문’ 그때 그 사건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관련 보도가 쏟아지면서 특종이 특종을 묻어버리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티브이(TV)조선>이 입수해 지난 10일부터 공개 중인 <김영한 비망록>은, 청와대가 권력을 남용해 2014년의 ‘비선실세 국정농단 의혹’을 억누르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물증’입니다. 2년 전 ‘한 눈에 보는 정윤회 파문 총정리’를 선보였던 <한겨레>는 ‘김영한 비망록’ 국면을 계기로 다시 한 번 그 때 그 사건을 다뤘던 보도들과 최근 주요 보도의 갈피를 AS해 드립니다. ‘최순실’이라는 퍼즐조각이 맞춰진 지금, 과거 보도들이 쏙쏙 이해되는 ‘쾌감’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정윤회씨가 2015년 1월19일 낮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법원에서 일본 산케이신문의 박근혜 대통령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 의혹 보도와 관련한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김기춘이야말로 태어나지 않아야 될 사람이 태어났다.” 지난 11일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이 비대위 회의에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한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사람, 즉 ‘귀태’라는 표현은 2013년 7월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변인이 “만주국의 ‘귀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의 후손들이 한국과 일본의 정상으로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라고 비난하면서 정치권에 등장했습니다. (▶관련기사보기 : 귀태 발언에 멈춘 국회) 주로 박정희 전 대통령 혹은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할 때 쓰였던 말인데, 모욕적이라며 새누리당 의원들이 국회를 멈추기도 했죠. 이런 강도높은 비난을 박 의원이 김기춘 전 비서실장에게 퍼부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 청와대 공작정치 폭로한 ‘김영한 비망록’

“김기춘이라는 작자는 사법부까지도 이용해 정적을 제거하려 했던 공작 정치의 부두목” “박근혜 정부의 사법부, 변협, 검찰, 정치인 죽이기” “이번 (김영한 비망록) 사건은 박근혜 청와대 헌정유린 정치 공작사건”…. 박지원 의원이 이렇게 맹공을 퍼부은 이유는 바로 10일 저녁 TV조선 보도로 공개된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 때문입니다.

김영한 전 수석은 2014년 6월부터 2015년 1월까지 청와대 민정수석을 역임했습니다. 수석직을 내려놓은지 반 년 여 뒤인 2015년 8월21일, 간암이 원인이 돼 갑작스레 사망했습니다. “청와대 민정수석 당시 받은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원래 있던 간염이 간암으로 발병했다”고 주변에서 수군거렸습니다.(▶유승민 “김영한 사표 던진 날 밤 함께 통음”) 청와대를 나온 뒤 그는 거의 매일 밤 괴로워하며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유승민 “내 친구 김영한 사망, 항명 표현에 속상해했다”)

■ 김영한은 누구? “공안검사 출신이 항명 스캔들”

뭐가 그렇게 괴로웠을까요? 김 전 수석은 사상 초유의 ‘청와대 항명 파동’ 주인공이었습니다. 김 전 수석의 상사가 바로 박근혜 정부에서 ‘왕실장’이라고 불린 김기춘 비서실장(2013년 8월~ 2015년 2월)입니다. 청와대 비서실 산하 9개 수석실 중에서도 민정수석실은 막중한 자리로 꼽힙니다. (▶관련기사 보기 : 하루새 뒤집어진 민정비서관…실세들 파워게임? ) 주요 국정을 조정하고, 민심 동향을 파악하며, 인사에서 고위공직자를 검증하는 일, 검찰 관련 업무나 사정 업무를 총괄하기 때문입니다. 특별감찰관실이 생기기 전엔 민감한 대통령 친인척 비리 문제도 민정수석실이 챙겼습니다. 그래서 이전 정권에서도 민정수석은 대통령과 가까운 인물이 맡았습니다.

그런데 김 전 수석은 2015년 1월9일, 여야가 합의하고 직속상관인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지시한 국회 운영위원회 출석을 거부했습니다. 당시 김기춘 비서실장이 출석해 “출석하도록 지시했는데도 할 수 없다는 취지의 행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김 전 수석은 운영위에 출석할 바에는 차라리 사표를 내겠다고 버텼습니다.

국회 운영위에서 김 전 수석이 질문받을 주제가 바로 2014년 말 ‘비선 실세(정윤회)의 국정 개입 의혹’이었습니다. 당시 청와대는 비선 실세의 존재를 부정하고,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으로 프레임을 짜 문건을 유출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위기를 넘긴 바 있습니다. 이 흐름을 주도한 것이 바로 민정수석실 산하의 민정비서관실이었습니다.

■ ‘정윤회 국정 개입 의혹’ 수습하던 김영한이 왜?

지금 다시 살펴보는 ‘정윤회 게이트’는 새삼 다르게 읽힙니다. 파문은 2014년 11월28일치 <세계일보>가 ‘정윤회씨가 김기춘 비서실장의 경질 등을 꾀하는 등 국정에 개입하는 실세’라는 내용을 담은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문건을 입수했다고 보도한 데서 시작됐습니다.

▶자세한 정윤회 파문을 보려면 : 한 눈에 보는 정윤회 파문 총정리 1탄

최순실씨의 존재가 확실히 드러난 지금, 과거 보도됐던 정윤회 파문과 그 대응을 돌아보면 비선 라인 내부의 치열한 갈등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정윤회씨의 애매모호하고 모순되는 대응이 특히 그렇습니다.

정씨는 문건 파문 이후 인터뷰에서 “나는 사실상 ‘잘린 것’이다” “대통령으로 모시고 싶던 꿈이 지금은 멀어졌다”(▶[중앙시평] “나는 떳떳하니 모든 걸 조사하라”)고 했습니다. 정씨는 청와대의 ‘정윤회 문건’이 작성(2014년 1월6일)된 지 두 달이 지난 때이자, <시사저널>이 ‘정윤회가 박지만 미행을 지시했다는 의혹’을 보도(2014년 3월22일)한 직후인 2014년 3월27일 최순실씨(2014년 2월 최서원으로 개명)와의 이혼 조정에 들어갑니다. (▶관련 보도 보기 : 정윤회 “언론으로부터 아내 지키려 이혼”) 그해 5월 이혼이 확정됐고 7월 언론에 이혼 사실이 공개됐습니다. 7년간 야인으로 살며 “아내가 강남에 빌딩을 가지고 있다. 아내의 수입으로 생활한다”고 했는데, 이미 이혼한 전 아내의 재산을 거론하며 생계수단이라고 한 것은 의구심을 자아내는 대목입니다. 또 7년간 문고리 3인방이 “연락이 없어 섭섭하다”고 했지만 최근까지 이재만 비서관과 전화통화를 했다는 정황이 곧바로 드러났습니다.

정씨와 친분이 깊고 세월호 사고가 났던 2014년 4월16일 함께 있었던 역술인 이씨는 2014년 10월31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정씨는 조용한 성격으로 명석하고 치밀하다. 십수년간 박 대통령에 대한 충정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보좌하던 시절 박 대통령이 실수한 적이 없었다. 그를 비선 의혹을 받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대통령 비서실장을 시키면 지금보다 훨씬 잘 할거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혼 뒤인 2014년 8월3일 일본 산케이신문 지국장의 ‘사라진 7시간’ 보도 사건에 연루되고, 2014년 11월 말엔 <세계일보>의 ‘정윤회 문건’ 파문을 겪으면서 언론 등을 통해 “나는 야인”이지만 “박 대통령에 대한 충정은 변치 않았다”고 호소했던 정씨의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돌아보게 됩니다. (▶관련 최근 기사 보기 : 정윤회 문건 십상시 모임, 최순실이 실제 주최?)

■ “최순실이 진짜 실세” 하지만 증거가 없었다

당시도 최순실씨가 진짜 실세라고 지목하는 국내 언론 보도들이 나왔으나, 최씨가 공적인 직책을 맡은 적 없고 이렇다 할 물증도 없어 수그러들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이 강하게 부인하고 나선 까닭도 있습니다. (▶박 대통령 “정윤회·박지만 갈등설 말 안 돼…실세는 靑진돗개”)

최근 불거진 ‘비선 논란’의 핵심인 정윤회(59)씨와 함께 정씨의 전처 최순실(58·최서원으로 개명)씨의 역할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최순실씨는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이 되기 전인 1990년 육영재단 이사장 시절 ‘박근혜 이사장의 측근’으로 정윤회씨보다 먼저 등장한다. (…) 이를 종합하면, 정윤회씨가 박 대통령과 연결된 것도 최순실씨의 남편이라는 점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2014년 12월4일치, “정윤회 전처 최순실, 10·26 이후 박 대통령 ‘말벗’”)

정윤회 관계보다 더 주목해봐야 하는 것이 박 대통령과 부인 최씨의 관계라는 것이다. 딸 승마와 관련, 박 대통령이 직접 문화체육관광부 실무자를 문책한 것에 전 부인이 관련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정씨는 “내가 관여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고 (최씨가 관련되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대통령의 패션에 최씨가 관여되어 있다”는 ‘풍문’이 관련 업계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는 것은 확인된다. 한 인사의 전언.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최순실을 아는 주변에서 ‘어떻게 자신이 입고 다녔던 것과 똑같이 옷을 만들어 주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단적으로 ‘저도의 추억’ 사진 때 입고 나온 옷과 목 칼라까지 똑같은 옷을 (최순실이) 전에 입고 다녔다는 것이다. 정윤회씨와 그런 남녀 사이라면 왜 그 전 부인과 박 대통령이 옷을 똑같이 입느냐, ‘박 대통령이 (최씨의) 아바타냐’라는 말이 나왔다.” (경향신문, 2014년 12월6일, 정윤회·최순실 실세설…아니 땐 굴뚝의 연기?)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1월28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 극장에서 ‘문화가 있는 날’ 행사의 하나로 영화 <국제시장>을 관람하기에 앞서 주연배우 황정민(맨 오른쪽)씨가 휴대전화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무렵 박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 의혹 보도와 관련해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이 검찰에 소환(2015년 1월19일)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청와대, 검찰에 ‘수사 가이드라인’…유출 혐의 지목 경찰은 자살

정윤회 파문이 보도된 지 사흘 뒤인 12월1일, 박 대통령은 “(문건 유출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라고 말합니다. 이후 프레임은 비선실세가 정말 있는지, 그게 누구인지가 아니라 청와대의 문서가 바깥으로 새어나간 것에 대한 문제로 바뀝니다. (▶박 대통령 문건 유출 두 잣대, 1급기밀 남북대화록은 “알권리” ‘찌라시’라는 문건은 “국기문란”)

검찰은 청와대 문건이 어떻게 유출됐는지 조사했는데, 당시 문제의 보고서를 작성한 박관천 경정을 비롯, 공직기강비서관실에 있던 한일 경위와 최경락 경위가 유출 혐의를 받고 검찰 조사를 받았습니다. 최 경위는 보고서를 언론에 넘겼다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해 왔습니다만, 한일 경위가 ‘최 경위에게 보고서를 줬다’고 ‘자백’하면서 검찰 수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최종 유출자로 지목된 최 경위는 2014년 12월13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유서에서 “한일에게. 나는 너를 이해한다. 민정비서관실에서 그런 제의가 들어오면 당연히 흔들리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썼습니다. 한 경위는 최근 <중앙일보> 인터뷰(11월11일치)에서 “청와대 민정비서관실에서 연락이 와 ‘문건을 최경락 경위에게 넘겼다고 진술하면 불기소도 가능하다’며 협조를 종용했다”고 털어놨습니다. 당시 민정비서관은 우병우 전 민정수석입니다. (▶“정윤회 문건 수사 때 우병우 민정수석비서관실서 회유했다”)

비선 실세의 진위 여부보다 문건 유출로 프레임을 돌리고, 문건 유출자를 찾아내 책임을 묻는 것이 당시 청와대의 탈출 ‘플랜’ 이었고 그 플랜을 기획한 것은 우병우 당시 민정비서관이었다는 얘기입니다. 민정비서관이 검찰 수사 보고를 받아가며 수사에 개입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김영한 민정수석은 바로 이 의문을 해명하기 위해 2015년 1월9일 국회에 출석해야 했던 것입니다.

<세계일보>가 보도한 ‘정윤회 문건’. <한겨레> 자료사진
■ ‘정윤회 문건’ 보고서 관련자는 모두 청와대서 쫓겨났다

김영한 전 수석은 불출석 사유로 ‘정윤회 문건 유출’은 자신이 민정수석으로 임명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어서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문제의 보고서는 민정수석 산하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2014년 1월6일 작성됐고, 그가 민정수석으로 부임한 뒤엔 실무자들이 모두 청와대를 떠났습니다. 1월 보고를 받은 김기춘 비서실장이 그대로 덮었고(▶김기춘 ‘정윤회 보고서’ 직접 받아봤다), 2월 보고서 작성자인 박관천 경정을 경찰로 원대 복귀시켰습니다. 4월엔 책임자인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을 경질했고, 7월에는 민정수석실에 파견됐던 비위 감찰 담당 경찰들도 모두 경찰로 복귀시켰습니다.(▶靑 민정수석실 파견 경정 5명, 올 2월·7월 무더기 교체) 청와대는 “(6월) 김영한 민정수석이 부임하면서 조직 쇄신 차원의 인사”라고 설명했지만, 한일 경위는 당시 “승마협회 비리를 조사하고 있었다” 최씨의 개입을 의심했습니다. 문건 유출 자체만 놓고 보면 모두 김 전 수석의 부임 전에 끝난 일인 것은 맞습니다.

■ 청와대, 문고리 3인방 대신 김영한 민정수석 내줬나

하지만 김 전 수석의 “잘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내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항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외에 다른 말도 나오고 있다. 우선 김기춘 비서실장과의 불화설이다. 주요 업무에서 그가 배제됐다는 얘기가 여권 주변에선 나오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방식에 대해 김 실장과 이견(異見)이 있었던 것 같다”고도 했다. 또 김 수석은 ‘정치적 거래에 이용당할 수 없다'는 생각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여야가 정호성 제1부속·안봉근 제2부속 비서관 등 이른바 ‘핵심 비서관’을 출석시키지 않는 대신, 김 수석 출석에 합의한 것에 기분이 상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1월10일)

비선 실세와의 연결고리로 지목된 정호성·안봉근 비서관을 국회에 내보냈다가는 ‘비선 실세’ 추궁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관심은 문건 진위... ‘소환 피하기 힘든 문고리 권력 3인방') 그렇다고 문건 유출이 중대한 문제라면서 검찰에 수사를 촉구하는 청와대가, 문건 유출 책임자인 민정수석실 관계자 한명 내보내지 않는다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비서관들 대신 ‘희생양’으로 김 전 수석이 떠올랐고, 김 전 수석이 거부했다는 해석입니다. (▶김영한 “항명이 아니라 원칙 지키려 사퇴한 것”)

■ 김기춘에 치이고, 우병우에 밀리고

민정수석 일까지 도맡아 하며 막대한 권한을 휘두르던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김 전 수석의 일처리에 불만을 가졌고, 검찰 장악에 적극적인 우병우 민정비서관을 더 마음에 들어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검찰 수뇌부와의 소통 문제다. 박근혜 정부 들어 검찰에 대한 협조 요청 사항이 많았는데, 김기춘 실장이 보기에 김 수석이 성에 차지 않게 일을 한 것이다. 검찰 관계자도 “김영한 수석이 검찰총장과 가끔씩 통화를 하나 부담을 주는 언행은 되도록 피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김기춘 실장이 검찰 수뇌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업무를 지시하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 김 수석이 보고서를 들고 대통령 집무실을 찾아가도 문고리 3인방으로부터 “보고서만 거기에 놓고 가세요”라는 말을 듣고는 해 좌절감을 많이 느낀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게 한 지인의 전언이다. 그러다보니 김영한 수석으로서는 자신이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해야 하는 국회에 출석하는 게 참기 어려웠을 수 있다. 특히 자살을 한 최 경위 문제에 대해서는 김 수석이 일체 아는 게 없는데 청와대와 문고리 3인방을 방어해야 한다는 게 자존심상 허락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 (한겨레, 2015년 1월11일, ‘항명 파동’ 김영한 수석이 사표 던진 진짜 이유는… )

아시다시피, 우병우 당시 민정비서관은 김영한 수석이 물러난 뒤 40대에 최연소 민정수석의 자리에 오르며 박근혜식 ‘파격 인사’의 당사자가 됩니다. (▶이명재 특보에 우병우 전진배치… 검찰을 사실상 ‘호위대’로)지금 이 시점에서 돌아보면, 우씨가 민정수석직에 오른 뒤 최순실씨의 전횡은 더욱 거침없어집니다. (▶청와대는 뭐가 두려워 우병우 내치지 못하나)

▶관련기사 보기 :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 우병우-김기춘 라인”

2015년 9월24일 당시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이 청와대에서 열린 장·차관 워크숍에서 신발을 벗고 의자에 다리를 올린 채 박근혜 대통령의 모두발언을 듣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 검찰 압박 꺼린 김영한…청와대 지시 꼼꼼히 기록해

전임인 홍경식 민정수석이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동향인데다 검찰 때부터 알고 지낸 것과 달리, 김영한 전 수석은 김 전 비서실장과 별 다른 인연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를 천거했을까요?

최근 최순실 게이트 정국에서 김 전 수석 발탁 전 ‘민정수석실 추천인 및 조직도’ 문건(2014년 4월15일~5월12일 사이 작성 추정)이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모았습니다. (▶최순실, 민정수석 추천문건·국가안보 기밀 문서도 받아봐)이 문건에선 곽상욱 감사위원이 추천돼 있었는데, 실제로 민정수석에 임명된 것은 김 전 수석이었습니다. 최씨가 이 과정에서 어떤 방향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을지는 미지수이나, 민정수석 인사까지 챙겨봤다는 정황은 드러납니다. (▶관련기사 보기 : 최순실은 어떻게 대통령을 ‘기획’했나)

김영한 전 수석은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경북고·연세대를 나온 티케이(TK)출신으로, 사법연수원 14기를 수료하고 공안 검사로 활약했습니다. 초년 검사 시절 폭력배 검거에 두각을 보여, 검찰 수뇌부에서 특수부와 공안부 중 선택권을 주자 공안부를 골랐다고 합니다. 2003년 서울지검 공안1부에 재직하며 ‘희망돼지 저금통’ 모금운동을 벌인 배우 문성근씨를 기소하기도 했습니다. (▶‘공안통’ MB·박근혜 정부서 ‘화려한 부활’)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을 보면 굽히지 않는 성격으로, “소신이 강하다”는 평과 “독불장군”이라는 평이 엇갈립니다. (▶鄭총리, 김영한 항명사태에 “고집 바람직하지 못해”) 유승민 의원은 “대쪽같다”고 표현했습니다.

■ ‘비망록’서 드러난 청와대의 검찰 수사 개입

청와대 수석으로 지낸 210일간 김 전 수석은 월별 일정과 날짜별로 해야할 일, 수석비서관 회의 내용을 노트에 적었습니다. 정윤회 파문 당시의 청와대 대응과, 검찰 수사에 개입한 정황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그 노트를 조선일보가 입수해 공개했습니다.

2014년 11월28일 <세계일보>의 정윤회 게이트 보도가 나온 날 김 전 수석은 ‘식당 CCTV 분석’이라고 썼습니다. 보도에 나온 음식점의 CCTV를 청와대가 먼저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1월29일, 청와대는 ‘검찰 수사 착수’를 논의했습니다. 실제로 이틀 뒤 박 대통령의 ‘국기 문란’ 발언과 함께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착수 다음날엔 ‘휴대폰, 이메일, 통신 내역 범위기간’ ‘압수수색’ ‘청와대 3비서관 소환 등 협의’라고 적었습니다. ‘수사의 템포, 범위, 순서가 모든 것→ 수사결과’라고도 썼습니다. 이후 검찰은 정윤회 문건의 유출 과정을 수사하는 데 주력합니다. 보고서 작성자들을 대상으로 유출을 의심하며 압수수색을 했고, 정작 정윤회씨에 대한 압수수색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는 ‘세계일보 공격 방안’도 논의했습니다. 압수수색과 ‘세무조사’도 논의됐는데, 실제로 세계일보 대신 세계일보를 소유한 통일교 재단 관련 회사가 특별세무조사를 받았습니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비판 언론에 ‘불이익’ 지시)

■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본때 보여라” 지시

비망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직접 “시사저널 일요신문-끝까지 밝혀내야. 본때를 보여야. 열성과 근성으로 발본 색원”하라는 지시를 합니다.

<시사저널>은 2014년 3월, ‘박지만 미행 사건’을 내사하던 청와대 직원이 돌연 인사 조처됐으며 배후가 정윤회씨로 보인다는 내용의 보도를 내보냈습니다. 이 기사에는 최순실씨의 존재를 암시하는 듯한 대목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ㄴ씨를 인사 조치하라”고 지시했던 ‘대통령 측근’은 누구일까. 이에 대해 여권 인사는 그가 누구인지 실명을 밝히진 않았다. 다만 “ㄴ씨를 청와대에서 내보내라고 지시한 ‘대통령의 측근’은 정윤회씨와도 오래 전부터 가까운 사이다”라고만 언급했다. 이 인사는 “ㄴ씨가 박 회장 미행 사건에 대해 내사를 벌이자 이를 중단시키기 위해 ㄴ씨를 인사 조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사를 통해 자칫 정씨가 곤경에 처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대통령 측근’이 내사를 중단시켰던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시사저널, 2014년3월22일, ‘박지만 “정윤회가 날 미행했다”’)

4월에는 ‘정윤회가 승마협회 좌지우지한다’ 는 기사를 보도했고 6월에는 ‘정윤회씨 딸,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 특혜 논란’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2014년 4월 김기춘 비서실장과 이재만 총무비서관 등 4명은 <시사저널>을 상대로 8000만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5월에는 <일요신문>을 상대로 4000만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습니다. (▶시사저널 기자들 “박근혜 대통령 퇴진해야”)

반면 호의적 언론에게는 당근을 썼습니다. “VIP 관련 보도-각종 금전적 지원도 포상적 개념으로. 제재는 민정이”라는 기록이 발견됐습니다. (▶어버이연합 “청와대가 보수집회 지시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6월2일(파리 현지시각) ‘K브랜드’ 홍보 행사에서 샤이니 민호(오른쪽)와 함께 붕어빵을 시식하고 있다. 이 행사는 CJ그룹이 한류 확산과 산업화 지원을 위해 매년 미국·일본 등지에서 개최하는 컨벤션 및 콘서트로,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파리에서 개최됐다. 연합뉴스
■ 공작정치 진두지휘한 김기춘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은 정윤회 파문 전후로 법조계와 문화계, 야당 정치인 등을 압박하며 전방위적인 정권 보위에 나섰습니다. 15일 현재까지 공개된 김기춘과 관련한 김영한 비망록 내용은 크게 세 갈래입니다.

첫째, 사법부 길들이기입니다. 김 전 비서실장은 상고법원 등을 미끼로 법원을 길들이려 했고, 법조삼륜(법원, 검찰, 변협) 중 하나로 꼽히는 변협에도 영향력을 끼치려 했습니다.

“법원이 지나치게 강대하다” “견제 수단이 생길 때마다 길을 들이도록”

(법원의 숙원사업인 상고법원을 협상 수단으로 활용하라면서) “판사의 성향에 트집잡히지 않도록 치밀하게 준비하라”

“국가적 행사 때 법원도 국가안보에 책임있다는 멘트가 필요하다”

“변협회장 선거에 애국단체의 관여가 요구”

재일동포유학생 간첩조작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에는 당시 공안검사였던 김기춘이 등장한다. 최승호 감독은 1970년대 간첩조작 사건의 재일동포 피해자를 취재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갔다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우연히 마주쳤다. 엣나인 필름 제공
■ 문창극 인선 뒤 ‘비선’ 의혹 불거지자…

둘째, ‘만만회’(박지만-이재만-정윤회)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비선 실세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던 박지원 의원에 대한 탄압을 기획했습니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로 인해 인적 쇄신 여론이 높아진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6월 국무총리 후보자로 문창극씨를 ‘깜짝 발탁’합니다. 이후 벌어진 참극은 아시는 대로입니다. 여당 중진들이 서로 문씨를 천거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떠넘기는 촌극이 벌어졌습니다. 이 인사 참사를 계기로 여야는 일제히 비선 실세의 존재를 거론하게 됩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새누리당)이 “박 대통령이 공식채널이 아닌 소규모 비선라인을 통해 상당히 많은 얘기를 듣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고, 박지원 의원은 “문 후보자에 대한 추천을 청와대 비선라인인 만만회에서 했다는 말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청와대의 심기를 거슬렀습니다.

메모 내용으로 미뤄보아 청와대는 사법부를 통한 압박을 꾀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박 의원은 저축은행과 관련해 알선수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는데, 1심에서는 무죄를 받았다가 항소심에서 뒤집혔고, 다시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박지원 항소심 공소유지 대책 수립” “박사모 등 시민단체 통해 고발” (2014.7.5)

“만만회 고발” (2014.7.17)

박근혜 대통령은 총리 후보자의 잇따른 낙마로 “만만회가 인사를 움직인다”는 의혹이 제기된 2014년 6월 이후 적극적으로 당과의 접촉을 늘렸다. 6월25일 새누리당 지도부를 7개월 만에 청와대로 불러 공개회동을 했고, 7월14일에는 새누리당 전당대회에 방문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만만회’ 문제제기가 이뤄진 뒤인 7월7일, 김기춘 비서실장은 국회 운영위에 출석해 “누군가 악의적으로 만들어 낸 말이고 실체는 없다” “만만회는 인사에 전혀 관여한 일이 없다” “인사가 잘되고 못되고 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인사위원장인 저에게 있다”고 비선의 존재를 적극 부인했습니다.

■ 2014년 여름… 생각보다 빨리 비선 문제 터졌다

한겨레 카드뉴스 <박근혜 어록> 중.
‘만만회’ 거명을 계기로 정치권에서는 “생각보다 이른 시점에 비선 문제가 불거졌다”는 우려가 나왔습니다.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은 “만만회는 상상의 산물”이라고 박지원 의원의 거론을 일축했는데, 거론되는 박지만·이재만·정윤회씨가 각자 견제하는 사이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만만회가 하나의 조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선의 존재 자체를 강조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김 실장이 “만만회는 인사에 개입한 적 없다”고 비호하고 나서면서 문고리 3인방과 그의 ‘암묵적 협력관계’를 주목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한편 정치권 일각에서는 청와대 권력의 핵심이라 불리고 있는 ‘기춘대원군’ 김기춘 실장과 비선라인의 관계에도 주목하고 있다. 아무리 비선 측 힘이 크다 해도 무언가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청와대 공식라인인 김 실장을 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선라인과 김 실장 간에 상부상조하는 암묵적 협력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추측이 힘을 얻고도 있다. (월요신문, 2014년 7월2일, ‘존재 불확실 ‘만만회’, 언급만으로 정치권 들썩’)

김기춘 실장은 비서실장 부임 당시 부속실(3인방)에게 쏠리던 인사권을 훌륭하게 견제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요. 문고리 3인방을 지휘한 것이 최순실씨임이 드러나고 있는 요즈음, 비선 실세 최씨와 김 전 실장 간의 줄다리기 내지는 어떤 ‘교감’이 이뤄졌을 정황은 앞으로도 주목해야 할 지점으로 보입니다.

■ ‘박지만 견제’엔 뜻 모았나

만만회 의혹이 불거진 2014년 여름 이후, 박 대통령은 부쩍 가족과의 거리를 두는 한편 박지만씨 쪽 사람들을 인사에서 쳐냅니다. 추석 연휴에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씨의 묘역을 찾았지만 박지만 회장 등 가족과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취임식 때만 해도 박근령씨는 초청하지 않았지만 박지만 회장 내외는 초청했는데 말입니다.

“박 대통령은 가족의 정치 개입 논란을 차단하기 위해 가족과 철저히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여권 인사들의 설명이다.” (한국일보, 9월10일치 3면)

10월8일치 <조선일보>에는 ‘박지만과 가까운 사람들 잇따라 옷벗는 까닭은’ 이라는 기사가 실립니다. 11월28일 <세계일보>의 정윤회 문건 파문 보도 당시 박지만 회장 쪽이 비선 실세의 상대편으로 지목된 것은, 이처럼 박 회장의 사람들이 인사에서 밀려나고 있었던 정황 때문이었습니다. (▶ 관련기사 보기 : 문건들 최초 입수한 세계일보, 박지만 문건은 왜 보도 안했나)

12월 정윤회 문건 파동 때문에 박지만·정윤회·이재만이 모두 검찰 소환 조사를 받을 때도, 대통령의 동생인 박 회장과 ‘비선 실세’라는 정씨, 그리고 일개 청와대 비서관 가운데 이재만 비서관이 검찰 의전서 가장 “예우를 받았다”는 보도도 지금 다시 보면 새롭게 느껴집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 회장이 2014년 12월15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정윤회 문건 유출’과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들어서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관련기사 보기 : 최순실 덕분에 22개월 전의 ‘정윤회 파문 총정리'는 지금 술술 읽힌다 (복습)

■ ‘허수아비 박 대통령’ 그림에 문화계 탄압 주도

다시 김기춘 전 실장의 공작 정치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10월10일 <한겨레>가 보도한 바 있는 예술계 ‘블랙리스트’도 김기춘의 손길이 닿았다는 추측을 할만한 기록도 김영한 비망록에 있었습니다. 김 전 수석에 따르면 2014년 8월 청와대는 홍성담 제재 조처를 논의했는데, 박 대통령을 김기춘 전 실장의 조종을 받는 허수아비로 풍자하는 그림을 그린 화가입니다.

화가 홍성담씨는 2014년 8월 광주비엔날레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박근혜 대통령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그림 ‘세월오월’을 출품했다가 전시를 거부당했다.

“홍성담 배제 노력, 제재조치 강구” (2014.8.8)

“문화예술계의 좌파 책동에 투쟁적으로 대응할 것” (2014.10.2)

2014년 여름께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던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조윤선 수석 당시 정무수석실, 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 주도”)과 김종 전 문체부 차관 등이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주축이라는 보도(▶“김종 전 차관이 홍성담 전시말라 전화”)가 나온 가운데, 김 전 실장이 “제재 조치”를 그보다 먼저 언급한 기록이 나온 겁니다. (▶관련기사 보기 : “블랙리스트 청와대 공식문서 아닌 메일 팩스로…기록 감추기”)

[%%IMAGE11%%]

■ 최순실 비선 실세 논란, 다음은 김기춘-우병우?

최순실씨가 구치소에 수감된 뒤, 김기춘 전 실장이 다시 ‘7인회’를 포함해 박 대통령의 자문 그룹으로 떠올랐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순실대통령 가고 7인회 김기춘이 정국 주도”) 박 대통령의 ‘버티기’ 구상도 김 전 실장의 작품이라는 겁니다. <조선일보>가 김영한 비망록을 필두로 가장 먼저 10일 보도에서 김 전 실장을 ‘저격’하고 나선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김 전 실장은 “최순실씨를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IMAGE12%%]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최씨의 존재를 비호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우병우 전 수석이 다음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될 것인가입니다. 최씨가 우병우 변호사를 민정비서관으로 추천한 당사자이며, 우 전 수석의 장모가 최씨와 절친하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단순한 방조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측면입니다. 김영한 비망록이 불러올 파문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앞으로 계속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뉴스AS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