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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11 14:57 수정 : 2018.05.17 15:41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뉴스AS]
피해자, 가해자 ‘선처’ 탄원했다 살해당해
가해자는 ‘우발적 살해’ 주장하지만
지속적 폭행이 살해로 이어진 ‘여성살해’ 전형

“애인·남편 등 친밀한 관계 특수성 배제하고
피해자 처벌 의사 기계적 적용은 매우 위험” 지적
가폭법상 보호조치, 단순 동거 경우엔 해당 안 돼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동거녀 상습폭행한 30대 남성, 피해자 선처로 풀려나 끝내 살해’

최근 한 여성의 죽음이 기사화됐습니다. 서울 관악경찰서는 4일 함께 살던 여성을 흉기로 살해한 혐의로 유아무개(39) 씨를 구속했다고 9일 밝혔습니다. 매일 같이 쏟아지는 사건 기사 가운데 유독 이 기사가 사람들의 공분을 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유 씨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4차례나 경찰 조사를 받은 전력이 있습니다. 유 씨는 가위로 피해자의 등을 찌르고, 배를 걷어차 하혈시키기도 했습니다. 집에 불을 지르려다 미수에 그친 적도 있습니다. 유 씨는 “돈 문제로 말다툼하다 우발적으로 죽였다”고 경찰에 진술했지만, 여러 차례에 걸친 폭행이 끝내 살해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그 진술에는 의문이 생깁니다.

무엇보다 가장 공분을 산 사실은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고 한달여 만에 피해자가 살해당한 일입니다. 반복된 폭행으로 피해자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경찰은 지난 3월23일 특수상해·특수폭행·현주건조물방화미수 등의 혐의로 유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법원은 유 씨의 주거가 일정하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탄원서를 낸 것을 주요 사유로 들어 영장을 기각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탄원서에서 피해자는 “앞으로 잘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기사가 나가고, 해당 법원을 비난하는 댓글이 쏟아졌습니다. 더 나아가 선처를 호소한 피해자를 두고 “동거녀도 문제”, “맞고도 탄원서 내는 사람은 뭔가”, “판사 문제라기보다 여자 팔자”, “남자 가려 만나라”와 같은 댓글을 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 사건을 ‘여성 살해’라는 큰 틀에서 바라보지 못하거나 피해자에게 되레 책임을 묻는 비합리적인 목소리가 넘치는 모양새입니다. 왜 ‘비합리적’이냐고요?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 우발적? 상습폭행이 끝내 살해로

우선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사건이 그리 특별하거나 예외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17년 애인·남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최소 85명입니다. 살인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103명입니다. 여성의전화는 “살인사건 당일의 범행 경위 중심의 보도가 대부분임에도, 보도 상에 지속·반복적인 폭력이 언급된 경우만 따져도 피해 여성이 20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습니다.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지극히 선택된 행동이며, 상습적이고, 계획적”이라고 여성의전화 쪽은 강조했습니다.

통계뿐 아니라 실제 사례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지난해 1월 재혼한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살해하고 주검을 훼손한 50대 남성은 장기간 가정폭력을 행사해왔고 상해죄로 처벌받은 전력까지 있었습니다.

문제는 상습적인 폭력의 맥락은 가린 채 ‘우발적으로 죽였다’는 가해자들의 주장이 종종 받아들여진다는 점입니다. 이 50대 남성 역시 ‘이혼요구로 싸우다가 화가 나 죽였다’고 주장했고, 법원은 “처음부터 살인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살인 범행에 이르게 됐다”고 인정했습니다.

이에 대해 여성단체들은 지속해서 문제를 제기해왔는데요. 다음은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 1월 낸 논평의 일부입니다.

“도대체 왜 혼인이나 데이트 관계의 남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폭력 사건에서 유독 남성의 폭력 행위는 “우발적”인 것이 되고, 감형의 이유가 되는가? (중략) 배우자나 애인의 외도를 의심하고, 화가 나 때리고, 때리다 보니 죽었다는 너무도 비합리적이고 부정의하고 끔찍한 가해자들의 범행동기와 시나리오는 왜 이토록 설득력을 갖는가?”

■ 피해자 의사라는 ‘함정

데이트폭력·가정폭력 가해자의 처벌을 피해자 의사에 100% 맡겨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잇따릅니다. 유 씨에게 살해당한 피해자는 죽기 전 경찰에 “(유 씨를 처벌하면) 자살하겠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노컷뉴스> 등 언론보도를 보면, 피해자는 진술을 거부하고 경찰 만남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이 피해자의 뜻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게 맞을까요. 전문가들은 피해자들의 심리 상태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박현정 조선대 초빙 객원교수는 <수사연구> 2017년 9월호에 실린 ‘데이트폭력범죄에 대한 독자적 형사제재의 필요성에 관한 고찰’에서 “데이트·가정폭력 범죄는 다른 범죄에 비해 폭력의 행태가 반복적이고 지속적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위험성이 높은 유형”이라며 “피해자 스스로가 피해라는 인식이 부족하고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상당수가 관계를 유지한다. 폭력 행위 뒤 반성과 위로의 반복은 피해자로 하여금, 가해행위에 대하여 오히려 이해하고 동조하는 스톡홀롬 증후군 증세를 보이게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만성적으로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에게 나타나는 자기방어적 인지 왜곡 현상도 짚어봐야 합니다. 아래는 <한겨레> 디지털 기획 ‘스토킹살인은 편견을 먹고 자란다’ 2화에 나온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의 말입니다.

“만성적으로 가정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은 상황을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학습된 무기력, 우울증 등이 동시에 진행돼 자신이 처한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죠. 그래야 계속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무서워서 살 수가 없죠. 이런 게 자기방어적 인지 왜곡입니다.”

2014년 8월8일 오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여성가족부 `가정폭력 예방의 날' 제정 기념 보라데이 시작을 알리는 기념행사가 열려 경찰과 아이들이 가정폭력 메시지가 적힌 티셔츠를 둘러보고 있다. 빨래줄에 티셔츠를 널은 것은 가정폭력에서 구해달라는 메시지를 빨랫줄에 걸어 세상에 알리는 것에서 시작됐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유 씨에게 적용된 특수상해·특수폭행과 달리 단순폭행, 단순협박의 경우에는 ‘반의사불벌죄(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피해자의 의사표시가 있다면 검사의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처분이 내려지거나, 이미 공소가 제기된 경우는 공소기각 판결이 선고됨)’라 처벌 자체를 할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해 11월 펴낸 ‘이슈와 논점’ 발간물에서 “반의사불벌죄는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명목에서 시행되고 있다”면서도 “대부분의 데이트폭력 가해자는 피해자와 친밀한 관계라는 점에서 ‘반의사불벌죄’ 조항은 피해자 보호가 취약해지거나 무력해지는 제도적 빌미를 제공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한 배경입니다.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처벌법)’ 역시 가정보호사건 처리 등에 있어 ‘피해자 의사를 존중’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한겨레> 디지털 기획 ‘스토킹살인은 편견을 먹고 자란다’ 2화는 ‘스토킹 남편’의 성폭행을 신고한 당일 사망한 22살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스토킹 남편’은 ‘가정폭력범’이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9월 남편의 폭행을 보다 못한 남편의 지인이 신고한 덕분에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피해자의 목에는 칼을 댄 붉은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피해자는 경찰에 “남편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고, 남편은 어떤 격리 조치도 없이 피해자와 한 달을 더 살았습니다. 결국 협의이혼 숙려기간 중이던 11월26일, 남편은 피해자가 자신을 피해 혼자 살던 집으로 찾아가 흉기로 살해했습니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에겐 또 다른 고민도 있습니다. ‘경제적 자립’ 가능성입니다. 이와 관련,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지난해 ‘젠더폭력 근절 정책토론회’ 발표문에서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자립은 가해자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며 폭력 피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소한의 과제”라고 강조했습니다.

■ 사실혼이면 보호, 단순동거면 알아서 해라?

피해자 보호조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폭력처벌법’은 폭력 재발 우려가 있고 긴급한 경우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이 가해자를 격리하고 접근금지를 신청할 수 있는 긴급임시조치와 경찰신청-검사청구-법원결정을 거치는 임시조치, 피해자가 직접 가정법원에 신청하는 피해자 보호 명령 등을 마련해 두고 있습니다.

문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가정폭력 검거 건수 대비 집행률이 너무 낮습니다. 2016년 긴급임시조치 집행률은 3.9%, 임시조치는 12.5%에 불과했습니다. 한 여성청소년계 경찰관은 “가해자 처벌에 피해자 처벌 불원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듯, 수사 단계에서도 피해자 의사를 무시할 수 없다”고 토로했습니다. 임시조치를 신청하고 싶어도 피해자가 거부하면 별 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법률혼, 사실혼 등 ‘가정폭력처벌법’에서 정의한 가족구성원에 해당하지 않으면 이런 보호조치 대상조차 못 됩니다. 연인 관계, 혼인 의사가 없는 단순동거가 대표적입니다. ‘범죄피해자보호법’ 등에 따라 모든 폭력범죄 피해자는 신변보호를 신청할 수 있지만 피해자가 직접 심각한 물리적 폭력 피해를 증명해야 합니다.

묻고 싶습니다. 왜 데이트폭력·가정폭력 피해자가 범죄 혐의를 증명하고, 도망가야 할까요? 왜 가해자의 처벌을 피해자에게 물을까요? 고미경 대표의 말로 대답을 갈음하겠습니다.

“가해자 처벌여부를 피해자의 의사에 맡긴다는 것은 피해자의 용서만 있다면 국가가 처벌하지 않아도 되는 범죄로 본다는 것과 같다 . ‘애인 ’, ‘남편 ’ 등 친밀한 관계라는 특수성을 배제한 채 피해자의 가해자 처벌 의사를 기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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