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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30 14:37 수정 : 2018.05.30 16:29

농기계 업체 ‘대호’ 누리집 갈무리. 현재는 사과문과 함께 다른 광고가 올라와 있다.

[뉴스AS] 농기계 파는 ‘대호’는 왜 신문에 사과문을 냈나

‘오빠~대물이어야 작업을 잘해요’
자사 누리집.언론 광고 비난 일자
30일 한겨레·농민신문 등에 ‘사과문’

“여성 성적 대상화 뼈저리게 반성” 불구
“농기계를 남성들만의 전유물로 인식
여성농민은 없는 존재 취급” 지적 나와

농기계 업체 ‘대호’ 누리집 갈무리. 현재는 사과문과 함께 다른 광고가 올라와 있다.

“저희 대호㈜를 믿고 사랑해주신 전국 여성 농민분들께 실망을 안겨드린 점 고개 숙여 진심으로 사과 말씀드립니다.”

5월30일치 <한겨레> 13면 하단에 실린 사과문 일부입니다. 대호주식회사 임직원 일동 이름으로 실린 이 사과문은 <경향신문>과 <농민신문>에도 나란히 실렸습니다.

논·밭의 흙덩이를 부수거나 바닥을 평평하게 고르는 데 쓰는 써레와 파종 뒤 흙을 덮어주는 복토기 등을 파는 농기계 업체 ‘대호’는 어쩌다 이런 사과문을 내게 됐을까요? 궁금했습니다.

■ “오빠~대물이어야 뒤로도 작업을 잘해요”

“오빠~실린더와 연결 링크가 대물이어야 뒤로도 작업을 잘해요.”

‘오리발평생써레’라는 이름의 농기구를 팔기 위해 대호가 자사 누리집에 실어둔 광고 문구입니다. ‘오빠’라는 호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 모델은 여성, 소비자는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은 여성 모델은 실린더를 양손으로 잡고 있습니다. ‘뒤로도 흙을 밀 수 있는’ 써레의 장점은 핫팬츠를 입은 여성의 ‘뒤태’로 표현됐습니다.

5월11일치 <농민신문>에 실린 ‘대호’ 광고.
5월11일치 <농민신문>에 실린 광고는 어떨까요. 농기구가 논둑을 쉽게 올라탄다면서 옆으로 누운 여성 신체 위에 ‘올라탄다’는 표현을 넣었습니다.

해당 광고는 대호 홍보팀이 자체 제작했습니다. 신문 지면에 실리는 광고는 ‘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에서 사후에 심의하고 있습니다. 대호의 한 관계자는 30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광고를 기획하고 지면에 싣기까지 (사내에서) 문제 제기는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 ‘성적 대상화’ 쏟아진 비판

광고가 공개되자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하 전여농) 등 여성 농민단체들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며 성 평등한 사회를 역행하는 광고 게재를 당장 중단하라”고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농기구를 파는데 여성의 신체를 부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전여농은 지난 21일 낸 성명서에서 해당 광고의 문제점을 이렇게 짚었습니다.

“튼튼하고 성능 좋은 농기계를 남성으로 상정하고, 여성 모델은 농기계의 성능이 좋은지에 대해 성적인 비유와 표현으로 대상화되고 있다. (중략) 튼튼하고, 성능이 좋으며 농기계의 장점을 해설하기 위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호농기계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통해 성 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지금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행위를 일삼고 있다.

농기계 업체 ‘대호’ 누리집 갈무리. 현재는 사과문과 함께 다른 광고가 올라와 있다.
정치권도 논평을 내며 동참했습니다. 정의당 여성위원회는 22일 “사회 모든 영역에서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심각한 상황이지만, 농기구 선전까지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해야 하는지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며 광고 철회를 촉구했습니다. “(광고가 언론에 게재될 때까지) 제작자도, 광고주도, 언론사도 그 누구도 문제 제기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에 더욱 분노한다”(25일 녹색당 논평)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 ‘여성농민’은 없는 존재 취급

‘성적 대상화’라는 고질적인 문제 이면에 소외되고 배제되는 ‘여성 농민’의 현실이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정영이 전여농 사무총장은 30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이런 광고가 실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여성농민이 농민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꼬집었습니다.

정 사무총장은 “여성 농민의 비율이 절반을 넘어섰고 노동 감당 비율도 남성보다 더 높다. 그런데도 농기구 연구개발부터 남성 위주로 이뤄지고 소비자 역시 남성 농민으로 한정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 사무총장은 현재의 농기구는 여성 농민이 쓰기에 그 크기가 크고, 의자를 앞으로 당기는 등의 조절이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습니다. 농기계를 ‘남성들만의 전유물’로 여기는 현실이 광고에 고스란히 드러난 셈입니다.

이와 관련, 정의당 여성위원회는 22일 논평에서 “여성 농민들은 당당한 농업 경영의 주체이며, 가사 노동을 포함하여 가장 많은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며 “가장 많이 일하고도 당당한 주체로 대접받지 않는 현실에 여성 농민들의 분노는 끝이 없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 사과보다 더 중요한 ‘재발 방지’

결국 대호는 30일 사과문을 내고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 표현과 문구에 대해서 뼈저리게 책임을 통감한다”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성능 좋은 농기계를 남성으로 상정하고 이러한 기능적 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여성 모델을 배치하여 성적 대상화한 것은 명백한 불찰이자 사려 깊지 못한 판단이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대호는 모든 지면 광고를 중단하고, 기존에 배포된 2만여 장의 홍보물을 수거, 폐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전 직원 대상의 성 평등 교육 강화, 광고 외부 사전 감수, 여성 농민도 안전하게 사용하기 쉬운 농기구 개발 등도 약속했습니다. ‘성적 대상화’ 논란에 휘말리게 된 여성 모델에 대해서도 깊은 유감을 표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은 전여농 등 여성 단체들과의 협의에 따른 것입니다.

농기계 업체 대호가 5월30일치 일간지에 실은 사과문.
사과문을 냈다고 끝이 아닙니다. 정영이 전여농 사무총장은 “이번 광고 사태는 여성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더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방식으로 제안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 기대가 또 다시 시대착오적이고 성차별적인 광고로 무너지지 않길 바랍니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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