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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8.25 19:44 수정 : 2018.08.26 20:24

성한용의 정치 막전막후 225
민주당 새 선장 이해찬 대표 들여다보기

“담백하고 가식 없는 삶” 아버지 큰 영향
민청학련·김대중내란음모 사건으로 옥고
6월항쟁 뒤 평민당 입당 13대 국회 출마

“성실하고 철저한 개량주의자가 진보에 기여”
“리더는 잘 맞지 않아···리더 도와주는 장기”

2010년 “2012년 정권교체는 어렵다” 예측
재단법인 광장 이사장 지내며 재집권 준비

“민주개혁진영 정체성·가치·비전 명확해야”
늦게 출마했어도 역량·경험은 ‘준비된 대표’

“한 표 줍쇼!”

“한 표 주소!”

“한 표 줘유!”

25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린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 폭소와 박수가 터졌습니다. 기호 3번 이해찬 후보가 연설 말미에 예능 프로그램 <한끼줍쇼> 얘기를 하며 대의원들에게 표를 구걸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자존심 강한 저 사람이 표 구걸을 다 하네”라고 촌평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7선의 전직 국무총리 이해찬 의원(66)이 새 대표에 당선됐습니다. 어떤 정치인을 알고 싶을 때 그가 과거에 썼던 글과, 했던 말을 찾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역사의 고비에서 시대 상황을 어떻게 인식했고 어떻게 대처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서전이 있었습니다. <청양 이 면장댁 셋째 아들 이해찬>(2007, 푸른나무)입니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을 때 쓴 책입니다. 책 표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는 발표를 한 뒤 나는 아버님 산소를 찾았다. 사람들 눈에는 으레 하는 ‘의식’이나 ‘절차’로 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청양 이 면장’께 고하고 싶었다. 당신의 짧지만 한없이 무거운 당부를 잊지 않겠다고. 정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번잡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이 면장 댁 셋째 아들’로서 그 속에서도 담백하고 가식 없이 살아보겠노라고.”

이해찬 대표는 1952년 7월 10일 충남 청양에서 출생했습니다. 청양초등학교, 덕수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했다가 다음 해 사회학과에 다시 입학했습니다.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과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 뒤 민청련과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서 활동하던 재야인사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서전도 아버지 얘기로 시작합니다.

나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이던 1974년 4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 재판이 끝나고 대전교도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던 한겨울의 어느 날 , 엽서를 한장 받았다 . 아버님이 보낸 엽서였다 . 아버님은 서대문구치소에 있을 때 한 번 면회를 오셨고 , 그 뒤 재판정에도 한 번 오셨지만, 교도소로는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으셨다 . 엽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추운 겨울에 동상 걸리지 않도록 해라 .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잘해라 .

애비 씀

딱 세 줄이었다 . 나는 그 엽서를 보고 혼자 가만히 웃었다 . 담백하고 가식 없는 삶 ···. 그 엽서는 아버님이 살아오신 모습 그대로였다 . 그리고 그것은 내가 살고 싶은 삶이기도 했다 .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자서전에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진로에 대한 고민도 담겨 있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한겨레신문 >에 갈 생각을 했다 . 재야운동을 할 때 늘 정책이나 기획 분야를 맡아 정세 분석이나 글 쓰는 일에 익숙했고 , 예전부터 책이나 잡지 ·출판에 관심이 많아서 나한테 잘 맞을 것 같았다 . 그런데 평민당(평화민주당)이 재야인사들한테 영입을 제의해 왔다 .

이 대목을 읽으며 만약 이해찬 대표가 정치를 하지 않고 <한겨레신문>에 왔다면 뛰어난 논설위원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해찬 대표는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에 입당했고 1988년 총선이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서울 관악을 지역구에 평민당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민정당의 김종인 후보, 통일민주당의 김수한 후보 등 거물들을 꺾고 당선됐습니다. 재야인사에서 정치인으로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자서전에는 이해찬 대표 자신의 정체성이나 정치적 스타일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정치인 이해찬’의 본질을 잘 묘사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개량주의자라고 설명했습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근본주의적이거나 극단적인 주장에는 잘 끌리지 않는 개량주의자이다 .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가장 공감했던 말은 “가치는 역사에서 배우고 방법은 현실에서 배우라 ”는 말이었다 .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오가는 불성실하고 불철저한 근본주의자보다는 성실하고 철저한 개량주의자가 사회의 진보에 훨씬 더 기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이 즐겨 쓰던 말 중에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이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해찬 대표를 좋아했던 이유가 바로 이해찬 대표의 이러한 가치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재야 출신인 이해찬 대표가 처음부터 균형 감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989년 출판한 <이해찬 평론집 : 민주와 통일의 길목에서>라는 책에서 평민당 초선 국회의원이었던 이해찬 대표는 자신의 생각이 변화하는 과정을 꽤 진솔하게 써 놓았습니다. 통일민주당의 노무현 강신옥 의원, 평화민주당의 이해찬 양성우 의원이 ‘우리에게 정치는 무엇인가’를 주제로 좌담을 했습니다. 사회를 본 이해찬 의원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노 의원께서 말씀한 것처럼 정치에는 여러 가지 이해관계 집단들이 여러 가지 로비와 여론의 형태로 압력을 가해오기 때문에 단순히 이념만을 가지고 정치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이념 이외에 이해를 대변하고 조정하는 문제가 우선 재야에서 하던 일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재야에서는 어떤 이념이다 통일문제다 노동자들의 권익 문제다 하면 그 문제를 가지고 주저 없이 밀고 나가면 됩니다. 일이 해결되든 안 되든 하다 보면 일정한 성과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데 적어도 자기 운동으로서의 자기실현은 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재야운동권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많은 요구를 하지 않아요. 적어도 직접 일상적인 자기 문제를 호소하는 일이 흔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정당에는 엄청나게 많은 이해가 다 쏟아져 들어오는 곳이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그것을 선별하고 중점을 두고 하는 일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고 중요한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만 열심히 추구하기 어려운 그런 구조상의 문제들에서 재야와의 차이를 느낍니다.(중략)

이렇듯 각 부문에서의 운동성과 정당의 노력이 불가분의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것이 국민적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가능한 한 그러한 운동과 정당 간에 괴리를 줄이도록 하는 작업이 앞으로 계속되어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고, 그동안에 국회가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미지를 빨리 극복하려면 이번 국회에서처럼 약간의 성과라도 국민들에게 바로바로 알려지고 그 반응이 돌아오고 하면 정당이나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성이 높아지리라 봅니다. 그리고 당내에서부터 그리고 국회 내에 새로운 정치문화를 형성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재야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어떻습니까? 이해찬 대표는 다른 자리에서도 여러 차례 자신이 현실 정치를 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성장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으며, 재야에서 받아들였던 민족경제론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시 2007년 시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해찬 대표는 처음으로 자서전까지 써가며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패배했습니다. 정동영-손학규-이해찬 후보가 겨룬 경선의 승리자는 이해찬 대표의 친구였던 정동영 후보였습니다. 정동영 후보는 2007년 대선에서 참패했습니다. 이해찬 대표는 2008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2008년 5월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의 의정보고서를 냈습니다. 의정보고서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저는 올해 20년간의 관악구 국회의원 생활을 마감하고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 관악주민 여러분의 과분한 사랑에 대한 보은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마는 관악이 길러낸 정치인 이해찬으로서 좀 더 큰 시야에서 나라를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여러분께 보답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민족사의 정기를 되살리기 위해서 독립투사 운암 김성숙 선생님의 기념사업회 일을 맡았습니다 . 아울러 한국 개혁진영의 정체성과 노선을 복원하고 서민을 위한 정책을 개발하는 재단법인 광장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일에 힘을 쏟기로 하였습니다 . 관악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일할 것을 관악주민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

2010년 1월 이해찬 대표는 재단법인 광장 이사장이었습니다. 이때 출판된 <문제는 리더다>(2010, 메디치)라는 책이 있습니다. 방송인 정관용씨가 남재희, 김종인, 윤여준, 이해찬 네 사람과 나눈 대담을 묶은 것입니다. 이 시기 이해찬 대표의 생각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우선 자신의 정치적 자질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나옵니다.

나는 리더가 잘 맞지 않아요 . 리더를 도와주는 데는 대단한 장기 ( 長技 )가 있어요 . 김 대통령도 그렇고 노 대통령도 그렇고 , 내가 두 번 선거에서 모두 기획본부장을 했는데 , 두 번 다 쉬운 전술이 아니었어요 . 그리고 굉장히 용의주도하게 해야지 허술하게 해서 되는 게 아니었어요 .

흥미로운 대목은 2010년 시점에서 내다본 정치 전망입니다. 이해찬 대표는 2012년 정권교체 가능성을 매우 낮게 봤습니다. 2017년에나 반전이 올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2012년 대선에서 야당이나 진보진영의 집권은 생각보다 쉽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 혹 2017년에는 가능할지 모르죠 . 민심의 역사적 반전 ( 反轉 )이 오는 시점이 있는데 , 그냥 오진 않아요 . 현재 이쪽 진영의 인물이나 역량으로 보면 2012년에 반전을 기대하긴 어려워요 . 그런데 한 십 년 하고 나면 국민들의 정서나 마음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 2017년에 가서는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하는 반전이 올 가능성이 있어요 .(중략 )

우리에게도 그런 식의 정권교체 내지 새로운 역할이 요구될 때가 올 텐데 그것에 맞춰서 2017년 후보는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거기에 누가 가장 적합할 건가를 생각하지요 . 7년 후면 우리 사회가 많이 변할 텐데 , 그 시대와 국민들의 요구를 생각해보면 , 지금 40대 초중반에서 50대 중반 정도의 나이에 , 앞으로 십 년을 앞두고 자기 관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하는데 ···. 유시민 전 장관과 박원순 씨가 가시적인 후보고 , 2022년쯤이면 민노당의 이정희 의원도 가능하다고 봐요 . 상당히 야무지고 열정도 많고 , 2022년이면 나이가 50대니까 , 지금 페이스로 십 년만 열심히 하면 제 2의 노무현이 나올 수도 있어요 . 노 대통령이 초선을 40대 초반에 해서 13년 만에 대통령이 된 거거든요 . 이정희 의원은 능력도 있고 , 품성도 훌륭하고 , 제가 보기에는 유시민 , 박원순 , 이정희 정도가 2017년 , 2022년 후보로서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

어떻습니까? 2010년 시점에서 이해찬 대표는 유시민, 박원순, 이정희 세 사람을 장래의 대통령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시민, 이정희 두 사람은 정치를 아예 그만뒀으니, 이제 박원순 서울시장 한 사람만 남았네요.

이해찬 대표는 공직에서 물러나 있는 기간에도 쉬지 않았습니다. 재단법인 광장 이사장으로 수많은 좌담, 토론, 출판을 기획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활동이 모두 민주·개혁 세력의 재집권 준비였던 것 같습니다.

“나쁜 정치를 바로 잡고 나라를 바르게 이끌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지켜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선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현 집권당이 무능하고 사심이 가득하며, 오만하다 할지라도 대안이 되어야 할 비판 진영이 지리멸렬하다면 국민은 좌절하고 무관심하게 됩니다.

대안을 만들기 위해 첫 번째로 할 일은 민주개혁 진영의 정체성과 가치, 그리고 비전을 명확하게 하는 일입니다. 자신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 하고 내가 실현할 가치가 어떤 미래를 만들 수 있는지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이 선택할 근거가 마련됩니다.“(2011, 광장에서 길을 묻다 : 이해찬과 진보 지성 23인의 대화)

“저는 주로 정책을 다룬 사람인데, 그러다 보면 사회가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자주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구조적 특성을 분명히 인식하지 않으면 자꾸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 특성 가운데 핵심은 분단입니다. 분단된 나라는 지금 우리나라밖에 없죠. 분단 때문에 전쟁도 터지고, 각종 음해도 일어나고, 국방비도 많이 써야 하는 등 별일이 다 생기는 겁니다. 분단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구조적 제약입니다.

두 번째는 지역주의입니다. 지역주의 때문에 정상적인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 번째가 개방형 통상국가입니다. 우리는 수출 위주로 경제성장을 추진하다 보니 구조적으로 개방형 통상국가가 돼버렸어요. 이 구조를 조금 벗어나기 시작하면 경기가 불황으로 빠져버립니다. 네 번째는 사회의 양극화입니다.(중략)

이 구조 때문에 사회의 안정을 이룰 수가 없는 겁니다. 남북분단, 지역주의, 개방형 통상국가, 사회적 양극화, 이 네 가지는 쉽게 고칠 수 없습니다. 제도 몇 가지를 고친다고 해서 금방 바뀌지 않거든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민생경제를 안정시키고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켜야 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과제죠. 김대중 대통령은 5년 동안 왜 못했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5년 동안 왜 못했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했잖아요. 5년, 10년 안에 고칠 수 있는 것이었으면 벌써 고쳤죠.”(2011,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

이해찬 대표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 지역구를 세종시로 옮겨 다시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그리고 민주통합당 6·9 전당대회에 박지원 원내대표와 이른바 ‘이-박 연대’로 출마해 대표에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내에서 퇴진론이 터져 나와 대표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해찬 대표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 공천을 받지 못했습니다.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고 복당했습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세종시 국회의원 이외에는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2018년 발간된 ‘국회의원 이해찬 의정보고서 제 6호’는 세종시 관련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동안 국회 상임위원회에서도 전직 국무총리로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세종시 관련 정책 질의에 치중했다는 것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전언입니다. 이번 전당대회 대표 출마 결정이 갑작스럽게 이뤄졌다는 정황 증거들입니다.

아무튼 이해찬 대표가 이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됐습니다. 출마는 갑작스럽게 이뤄졌지만 그의 인생과 가치관, 정치적 역량과 국정 경험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준비된 집권여당 대표’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한 축을 담당하는 더불어민주당 대표로서 국정과 정치를 잘 이끌어주기를 기원합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2007년 자서전 표지
이해찬 대표의 가족

이해찬 대표의 어릴 때 모습

13대 총선 평민당 후보 벽보

1989년 이해찬 평론집

1989년 이해찬 평론집

2008년 의정보고서

2010년 <문제는 리더다>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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