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의 정치 막전막후 225
민주당 새 선장 이해찬 대표 들여다보기
“담백하고 가식 없는 삶” 아버지 큰 영향
민청학련·김대중내란음모 사건으로 옥고
6월항쟁 뒤 평민당 입당 13대 국회 출마
“성실하고 철저한 개량주의자가 진보에 기여”
“리더는 잘 맞지 않아···리더 도와주는 장기”
2010년 “2012년 정권교체는 어렵다” 예측
재단법인 광장 이사장 지내며 재집권 준비
“민주개혁진영 정체성·가치·비전 명확해야”
늦게 출마했어도 역량·경험은 ‘준비된 대표’
“한 표 줍쇼!”
“한 표 주소!”
“한 표 줘유!”
25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린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 폭소와 박수가 터졌습니다. 기호 3번 이해찬 후보가 연설 말미에 예능 프로그램 <한끼줍쇼> 얘기를 하며 대의원들에게 표를 구걸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자존심 강한 저 사람이 표 구걸을 다 하네”라고 촌평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7선의 전직 국무총리 이해찬 의원(66)이 새 대표에 당선됐습니다. 어떤 정치인을 알고 싶을 때 그가 과거에 썼던 글과, 했던 말을 찾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역사의 고비에서 시대 상황을 어떻게 인식했고 어떻게 대처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서전이 있었습니다. <청양 이 면장댁 셋째 아들 이해찬>(2007, 푸른나무)입니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을 때 쓴 책입니다. 책 표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는 발표를 한 뒤 나는 아버님 산소를 찾았다. 사람들 눈에는 으레 하는 ‘의식’이나 ‘절차’로 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청양 이 면장’께 고하고 싶었다. 당신의 짧지만 한없이 무거운 당부를 잊지 않겠다고. 정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번잡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이 면장 댁 셋째 아들’로서 그 속에서도 담백하고 가식 없이 살아보겠노라고.”
이해찬 대표는 1952년 7월 10일 충남 청양에서 출생했습니다. 청양초등학교, 덕수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했다가 다음 해 사회학과에 다시 입학했습니다.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과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 뒤 민청련과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서 활동하던 재야인사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서전도 아버지 얘기로 시작합니다.
나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이던 1974년 4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 재판이 끝나고 대전교도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던 한겨울의 어느 날 , 엽서를 한장 받았다 . 아버님이 보낸 엽서였다 . 아버님은 서대문구치소에 있을 때 한 번 면회를 오셨고 , 그 뒤 재판정에도 한 번 오셨지만, 교도소로는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으셨다 . 엽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추운 겨울에 동상 걸리지 않도록 해라 .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잘해라 .
애비 씀
딱 세 줄이었다 . 나는 그 엽서를 보고 혼자 가만히 웃었다 . 담백하고 가식 없는 삶 ···. 그 엽서는 아버님이 살아오신 모습 그대로였다 . 그리고 그것은 내가 살고 싶은 삶이기도 했다 .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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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에는 <한겨레신문 >에 갈 생각을 했다 . 재야운동을 할 때 늘 정책이나 기획 분야를 맡아 정세 분석이나 글 쓰는 일에 익숙했고 , 예전부터 책이나 잡지 ·출판에 관심이 많아서 나한테 잘 맞을 것 같았다 . 그런데 평민당(평화민주당)이 재야인사들한테 영입을 제의해 왔다 .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근본주의적이거나 극단적인 주장에는 잘 끌리지 않는 개량주의자이다 .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가장 공감했던 말은 “가치는 역사에서 배우고 방법은 현실에서 배우라 ”는 말이었다 .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오가는 불성실하고 불철저한 근본주의자보다는 성실하고 철저한 개량주의자가 사회의 진보에 훨씬 더 기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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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올해 20년간의 관악구 국회의원 생활을 마감하고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 관악주민 여러분의 과분한 사랑에 대한 보은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마는 관악이 길러낸 정치인 이해찬으로서 좀 더 큰 시야에서 나라를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여러분께 보답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민족사의 정기를 되살리기 위해서 독립투사 운암 김성숙 선생님의 기념사업회 일을 맡았습니다 . 아울러 한국 개혁진영의 정체성과 노선을 복원하고 서민을 위한 정책을 개발하는 재단법인 광장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일에 힘을 쏟기로 하였습니다 . 관악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일할 것을 관악주민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
나는 리더가 잘 맞지 않아요 . 리더를 도와주는 데는 대단한 장기 ( 長技 )가 있어요 . 김 대통령도 그렇고 노 대통령도 그렇고 , 내가 두 번 선거에서 모두 기획본부장을 했는데 , 두 번 다 쉬운 전술이 아니었어요 . 그리고 굉장히 용의주도하게 해야지 허술하게 해서 되는 게 아니었어요 .
단언할 수는 없지만 2012년 대선에서 야당이나 진보진영의 집권은 생각보다 쉽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 혹 2017년에는 가능할지 모르죠 . 민심의 역사적 반전 ( 反轉 )이 오는 시점이 있는데 , 그냥 오진 않아요 . 현재 이쪽 진영의 인물이나 역량으로 보면 2012년에 반전을 기대하긴 어려워요 . 그런데 한 십 년 하고 나면 국민들의 정서나 마음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 2017년에 가서는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하는 반전이 올 가능성이 있어요 .(중략 )
우리에게도 그런 식의 정권교체 내지 새로운 역할이 요구될 때가 올 텐데 그것에 맞춰서 2017년 후보는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거기에 누가 가장 적합할 건가를 생각하지요 . 7년 후면 우리 사회가 많이 변할 텐데 , 그 시대와 국민들의 요구를 생각해보면 , 지금 40대 초중반에서 50대 중반 정도의 나이에 , 앞으로 십 년을 앞두고 자기 관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하는데 ···. 유시민 전 장관과 박원순 씨가 가시적인 후보고 , 2022년쯤이면 민노당의 이정희 의원도 가능하다고 봐요 . 상당히 야무지고 열정도 많고 , 2022년이면 나이가 50대니까 , 지금 페이스로 십 년만 열심히 하면 제 2의 노무현이 나올 수도 있어요 . 노 대통령이 초선을 40대 초반에 해서 13년 만에 대통령이 된 거거든요 . 이정희 의원은 능력도 있고 , 품성도 훌륭하고 , 제가 보기에는 유시민 , 박원순 , 이정희 정도가 2017년 , 2022년 후보로서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
2007년 자서전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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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대표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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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대표의 어릴 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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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총선 평민당 후보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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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이해찬 평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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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이해찬 평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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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의정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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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문제는 리더다>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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