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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9.30 15:16 수정 : 2018.09.30 15:20

<한겨레> 기획연재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 1회.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231]
‘유튜브 홍보’ 자유한국당, 가짜뉴스 책임 걱정
“가벼움 연상 ‘가짜뉴스’ 말 사용하지 말아야”
브렉시트·트럼프·극우정당 등 민주주의의 위기
기득권 편승한 우리나라 언론 불신 훨씬 심각
“언론 신뢰 않고 확증편향 도와줄 유튜브 의존”
“정치 성향에 따라 분열···선동에 쉽게 넘어가”

<한겨레> 기획연재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 1회.
<한겨레>가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기획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추석 연휴 직후인 9월 27일 치 탐사기획 첫 번째 ‘혐오 확산의 진원지’에서는 동성애·난민 혐오 가짜뉴스 공장으로 극우 기독교단체 에스더를 찾아냈습니다. 28일 ‘유튜브 독버섯, 가짜뉴스 실태’에서는 노회찬 타살설을 유튜브 극우 채널이 만들고 키웠다고 폭로했습니다.

이번 기획은 <한겨레> 기자들이 가짜뉴스를 유통하는 유튜브 채널 100여개, 카카오톡 채팅방 50여개를 전수 조사하고 연결망 분석기법을 통해 생산자와 전달자를 찾아 나선 결과입니다. 가짜뉴스의 뿌리와 극우 기독교 세력의 현주소를 해부하는 탐사기획은 두 차례 더 이어질 예정입니다.

우연이겠지만 석간인 <문화일보> 28일치 6면에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자유한국당 쇄신작업 잇단 딜레마’ ‘지지세 확산은 좋은데···태극기 부대 입당에 가짜뉴스도 걱정’이라는 제목입니다. ‘가짜뉴스 걱정’은 “보수층이 몰려드는 유튜브를 자유한국당이 개방형 제작 방식 등으로 당 차원의 홍보 채널로 활용하려고 하는데, 가짜뉴스 생산과 확산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쓸 수 있어서 걱정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최근 이른바 보수 성향 유튜브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의 대변인”이라거나 “문재인 대통령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등 엉터리 주장과 가짜뉴스가 무책임하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자유한국당에서도 이런 가짜뉴스의 심각성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향신문> 29일 치에는 한국언론진흥재단 황치성 전문위원의 ‘가짜뉴스에 숨어있는 덫, 이젠 그 말을 버려야 한다’는 글이 실렸습니다. 가짜뉴스라는 말 자체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짜뉴스라는 말에서 풍기는 뉘앙스와 그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가짜라는 말은 일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 정도의 가벼움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어 위조지폐와 가짜 돈을 놓고 볼 때, 같은 의미지만 들리는 뉘앙스와 문제의식은 사뭇 다르다.

위조지폐란 말은 얼른 들어도 중차대한 문제로 인식된다.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화폐유통, 나아가 경제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당국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경각심을 갖는다. 가짜돈은 다르다. 문제는 문제지만 개인적 일탈 정도로 끝날 수 있는 가벼운 문제로 생각되기 십상이다.

가짜뉴스로 지칭되는 정보의 무질서 현상은 이렇듯 가볍게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프랑스 가짜뉴스 대책 보고서가 50개 권고안을 제시하면서 1항과 2항에 각각 ‘문제가 되는 용어를 명확히 정의하라’, ‘가짜뉴스의 위협을 과소평가하지 말라’를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세계 각국이 가짜뉴스와의 전면전을 선언하듯 앞다퉈 내놓고 있는 정책 사례들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우리도 이제 가짜뉴스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때이다. 첫 출발점은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가짜뉴스’라는 용어를 버리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가짜뉴스를 연구하는 전문가 중에는 ‘가짜뉴스’라는 단어 대신에 ‘허위정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짜뉴스에 대한 최근 칼럼 가운데 28일 치 <한겨레>에 실린 ‘슬라보이 지제크 칼럼-가짜뉴스에서 거대한 거짓말까지’도 읽어볼 만합니다.

“지금 우리는 포퓰리즘의 물결로 기존 정치제도가 불안정해지는 와중에, 이 제도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떠받들던 ‘진실 대 거짓'이라는 구도가 무너지고 있는 현상을 보고 있다. 이러한 붕괴가 일어나는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상대주의 때문이 아니라, 지배체제가 이제는 이전처럼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우리는 이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진실’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우리는 보편적 해방이라는 새로운 인식론적 관점에서 진실을 재구성해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지제크의 칼럼은 가짜뉴스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다른 글과는 차원이 다르고 내용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의 칼럼에서 “우리는 이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대목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짜뉴스의 위력이 점점 더 강해지는 최근 현상의 원인이 어쩌면 좀 더 근본적인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가설을 세워 보았습니다.

▷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사회 구성원 간의 정보 격차가 급속히 사라졌다. 사회 지도층과 전문가들의 권위가 무너졌다. 평범한 사람들도 정치인, 교수, 의사를 이제는 존중하지 않는다. 존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뢰하지도 않는다. 권위가 무너지며 신뢰가 함께 무너졌다. 이제 사람들은 아무것도 신뢰하지 않는다.”

▷ “사람들은 글을 읽지 않는다. 읽어도 짧은 글만 읽는다. 주로 영상을 본다. ‘읽는 인류’에서 ‘보는 인류’로 진화하고 있다. 글을 읽을 때는 연역적 추론이 필요하지만 영상을 볼 때는 귀납적 직관이면 충분하다. 지식을 습득할 때 주로 사용하는 뇌의 부위도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뉴스를 골라서 듣고 골라서 보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인공지능이 이런 선택을 도와준다. 사람들은 이제 믿음과 사실이 충돌하면 믿음을 선택하고 사실을 외면함으로써 인지부조화를 해소한다. 확증편향은 점점 강화된다. 포스트 트루스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정치 편향이 강한 유튜브가 번성하는 토양이다.”

이런 가설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전문가들에게 몇 차례 물어 본 일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검증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면서도 아직은 속 시원한 대답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메디치 미디어에서 발행하는 ‘피렌체의 식탁’이라는 온라인 미디어가 있습니다. 9월 11일 한승동 편집인이 ‘중간선거 앞둔 트럼프 현상 그 실체와 전망’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트럼프 현상을 떠받치고 있는 세 가지 요소로 미디어 환경 변화, 미국 중산층의 몰락, 트럼프의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분석한 글입니다. 이 가운데 미디어 환경 변화 대목이 제가 무척 궁금해하던 바로 그 내용이었습니다.

“9월 2일 자 <아사히신문>이 1면 머리기사로 올린 ‘트럼프 시대, 2018 중간선거’ 타이틀의 기획기사 ‘Q 음모론, 트럼프를 떠받친다―대통령은 구세주 수수께끼 투고의 영향력’은 주류 언론에 대한 트럼프 지지세력의 시각을 보여주는데, 충격적이다. ‘7월의 텔레비전 여론조사에서는 트럼프를 강하게 지지하는 사람 중에서 주류 미디어가 흘리는 정보가 ‘정확하다’고 응답한 이는 겨우 11%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에 트럼프 지지세력이 신뢰하는 정체불명의 인물 큐(Q)를 중심으로 한 음모론 집단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단다. <아사히> 기자가 8월 21일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열린 트럼프 지지 집회에서 만난, Q를 디자인한 셔츠를 입고 아들과 함께 나온 40대 남자는 말했다. ‘주류 미디어의 90%는 악의 비밀결사 중 일부다. 트럼프는 구세주로 뽑혔다. 세계를 구할 것이다.’

Q는 지난해 10월부터 사이버에 등장해 트럼프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정체불명의 투고자인데, 그의 글을 지지하고 해석하는 집단 ‘Q아논’(아논anon은 익명을 뜻하는 anonymous에서 따왔다)이 만들어졌고, 이들이 만든 수많은 사이트 중 하나에만 월 800만 이상이 찾는다. 그들이 올린 유튜브 동영상만 13만 개. <타임>이 ‘인터넷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세계의 25인’에 Q를 넣었단다.”

“요시미 교수는 SNS의 ‘필터 버블’(Filter Bubble) 현상에도 주목했다. 인터넷 정보들이 인터넷 이용자가 선호하거나 유리한 것 위주로 구성돼 전달되는 현상인데, 인터넷 검색 사이트의 알고리즘에 의해 그렇게 구조화된다. 이로 인해 심각한 정보 왜곡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심할 경우 사람들은 각자 취향이나 정치 성향에 따라 좁고 작은 그룹들로 분열, 단절된 채 자신들에게 유리하거나 좋아하는 정보만을 접하면서 점점 더 분극화하게 된다. 전체를 위한 의제나 거대담론을 상실한 고립된 소집단이나 개인들의 정치적 사회적 편향은 그럴수록 더 심해지고, 그런 환경은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언어를 구사하면서 반대자들 주장을 통쾌하게 박살 내고 모든 문제를 속 시원히 해결해 주겠다는 낯 두꺼운 선동가에게 쉽게 넘어간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느 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가려내는 건 중요하지 않고 알 수도 없다. 얼마 전까지 정확성, 공정성, 객관성에 토대를 둔 저널리즘을 앞세운 주류 언론들이 그런 기능을 대신 해왔으나 그것은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트럼프의 등장이 그것을 상징한다.

그와 함께 미국사회 자체가 과거와는 전혀 다른 그 무엇으로 급속히 바뀌고 있다. 쌍방향적이고 평등하며 자유로울 것이라던 뉴미디어 시대의 전망은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올드 미디어 시대보다 더 어두워졌다고도 할 수 있다.

<역사의 종언>을 쓴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처럼 인터넷으로 분열된 세계, 각자의 취향이나 지식, 재산, 성별, 인종, 문화, 직업 등에 따라 각기 달리 형성된 정체성을 중심으로 잘고 좁게 나뉘어진 세계를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라는 말로 설명했다.(<포린어페어즈> 2018년 9·10월호)”

한승동 편집인의 글을 통해 저는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정보 격차가 사라지면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순진한 기대가 산산이 조각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둘째, ‘진실의 시대’가 아니라 ‘믿음의 시대’가 다가오면서 사람들이 논리보다는 선동에 의해 움직일 가능성이 훨씬 커졌다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과 조금이라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는 아예 대화나 토론을 하지 않고 각자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서 끝없이 분열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사실은 세계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영국의 브렉시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당선, 유럽 극우정당의 약진은 기존의 ‘합리적인’ 정치·경제학적 분석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트럼프 덕분에 북한 비핵화 협상을 시작할 수 있었던 우리로서는 트럼프가 정말 고마운 사람이지만, 트럼프는 미국 정치에서 그 존재 자체가 미스터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가짜뉴스 확산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9월 12일 치 <기자협회보>의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불신 키우는 오보, 가짜뉴스 진원지 되나’였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 부설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가 발간한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18’에 따르면 우리나라 뉴스 신뢰도는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꼴찌를 기록했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언론자유 지수는 전년 대비 20계단이나 상승했지만, 신뢰도는 여전히 바닥에 머물렀다.

언론을 믿지 않으니, 직접 다른 ‘화자’를 찾아 나선다.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는 ‘언론을 신뢰하지 않고 이념적인 위치가 다르면 거부하며, 자신의 확증편향을 도와줄 만한 유튜브 등을 믿거나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유튜브에는 지라시처럼 출처가 불분명한 정보가 넘쳐나고 허위 사실이 진실로 둔갑하곤 한다. ‘뉴스의 탈을 쓴’ 이런 가짜뉴스들이 SNS를 타고 빠르게 확산되며 때론 언론 보도를 넘어서는 파급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가짜뉴스로 인한 언론불신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가 이미 현실로 성큼 다가와 있는 것입니다. 선진국 언론의 위기가 주로 기술 혁명과 정보화 혁명의 부작용 때문인 데 비해, 우리나라 언론이 신뢰를 잃게 된 또 하나의 결정적 원인은 언론의 기득권 편승입니다.

기득권 편승이란 우리나라 주요 언론사와 구성원들이 1970~1980년대 권언유착, 1990년대부터 시작된 자본 예속화로 언론의 정체성을 잃고 타락하기 시작한 현상을 말합니다. 이 대목은 전적으로 우리 언론의 잘못입니다. 우리나라의 심각한 언론불신은 언론과 언론인들의 자업자득인 측면이 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짜뉴스 확산으로 인한 민주주의의 위기가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훨씬 더 심각한 폐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다수 국민이 가짜뉴스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고 ‘깨어있는 시민’으로 남아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당장은 정치와 언론의 신뢰 회복 노력이 시급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 노력으로 과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을까요? 걱정입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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