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받고 숨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층 조사실의 현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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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296
22일 ‘김근태 8주기’ 학술행사 열려
1호선 남영역 바로 옆 ‘고문의 공간’
2018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관
민주주의와 인권의 학습장으로 활용
5층에 고문실···4층에 박종철 기념관
건물 설계한 김수근 둘러싸고 ‘공방’
1987년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받고 숨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층 조사실의 현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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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규야 .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몹시 궁금하구나 . 이제사 편지 해서 미안하다 . 늘 오늘내일하다가 오늘에야 겨우 펜을 들었다 . 그동안 줄곧 학내 상황이 개헌 ST에 대한 방향성도 제대로 못 잡고 허둥지둥하면서 정신없이 돌아가고 혼란했던지라 나도 정신없이 바쁘기만 하고 해 놓은 일도 별로 없는 것 같다 .”
“석규야 어쩐지 너무 허전하고 맥이 빠진다 . 내일모레면 바야흐로 3학년이 된다 . 그동안 , 지난 2년 동안 무엇으로 내 생활을 채워왔는지 모르겠다 . 1학년들에게는 늘쌍 ‘올바른 세계관에 기초한 과학적인 운동론’을 강조하면서도 나 자신은 과연 얼마나 그런 토대 위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
1985년 11월 박종철 열사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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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5층 구석방에서의 23일 , 이것은 지옥이었다 . 독가스 대신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설치는 나치 수용소였다 . 시간이 종국적으로 멈춰 버린 영원한 저주의 세계였다 .”
22일 오후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7층 강당에서 김근태 전 의원 서거 8주기 학술행사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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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건축의 한 시대를 풍미한 김수근도 동시대 권력을 위해 악명 높은 ‘치안 기계 ’를 헌정했다 . 서울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다 . 1976년 완공된 건물은 애초 5층으로 지어졌으나 1980년대 초에 7층으로 증축됐다 . 이 건물은 1985년 김근태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22일 동안 살인적 고문을 당한 곳이다 . 1987년 1월 14일에는 서울대생 박종철이 5층 9호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졌다 . 물론 김수근은 박종철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 사건이 있기 7개월 전 지병인 간암으로 타계했기 때문이다 .
2000년 중반 이 ‘고문 공장 ’의 설계자가 김수근이란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을 때 제자와 지인들은 곤혹스러워했다 . 누군가는 거장이 남긴 졸작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했다 . 건축가의 설계를 실무자가 변경했을 것이란 선의의 추측도 나왔다 . 건물을 악용한 사람들을 비난할 일이지 , 건물 자체를 두고 시비를 걸어선 안 된다며 ‘사용자 책임론 ’을 펼치는 이도 있었다 .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 유신 정권이 김수근을 지목해 설계를 의뢰했고 , 김수근은 이에 부응해 ‘간첩 잡는’ 대공수사기관의 업무에 최적화된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 2005년부터 경찰청 인권센터로 사용 중인 이 건물에는 1970년대 김수근 건축을 특징짓는 조형 언어들이 또렷이 각인되어 있다 .”
“이 건물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건물의 외부가 아닌 내부 구성이다 . 특히 조사실이 들어선 5층은 창의 크기와 각 방의 출입문 위치, 조명등의 종류와 기능에 이르기까지 설계자의 세심한 계산과 고려가 엿보인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배치된 열여섯 개의 조사실은 마주 보는 방의 출입구가 엇갈리게 배치돼 동시에 문이 열리더라도 맞은 편에서 조사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동선의 흐름과 시선의 움직임까지 고려한 치밀한 공간 설계다.
조사실마다 두 개씩 설치된 세로 창은 폭이 20센티미터 정도로 사람의 머리가 통과할 수 없다. 추락이나 투신을 막기 위한 고려로 보인다. 조사실마다 설치된 욕조 또한 용도가 미심쩍다. 가정집이나 숙박업소에 설치된 것에 비해 유난히 길이가 짧아 성인이 들어가 앉으면 다리를 뻗기가 어려울 정도다 . 목욕물을 받기 위한 쓰임새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벽은 내부 소음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철제 흡음재로 마감했고, 조명등은 자해를 막기 위한 목적인 듯 내부로 밀어 넣은 뒤 철망으로 막아놓았다.
특징적인 시설을 하나 더 꼽으라면 1층 후면에서 5층 조사실 복도로 이어지는 철제 원형 계단이다. 건물로 이송된 피의자들은 정면의 주 출입구가 아닌, 후면의 쪽문과 이어진 원형 계단을 통해 5층 취조실로 이동했다. 계단실은 중세 수도원의 첨탑과 비슷한 구조인데, 이 건물에서 조사받은 피해자들은 수사관들에게 이끌려 가파른 계단을 돌아 올라가는 동안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극도의 불안과 공포감에 휩싸였다고 진술한다.”
“이 건물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 중 한 명으로 알려진 김수근의 작품이다. 김수근은 5·16 쿠데타의 핵심이었던 김종필과 친분을 쌓으면서 박정희 군사정권과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많은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한 건축가이다. 워커힐 (1961), 자유센터와 타워호텔 (1963), 세운상가 (1966), 여의도 종합개발 계획 (1967), 올림픽주경기장 (1976), 올림픽 체조 ·사이클 ·수영 경기장 (1984), 서울지방법원 청사 (1984)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김수근은 자신이 사용했던 ‘공간’ 사옥과 같이 검은색 벽돌을 활용하여 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지었다. 지금도 김수근의 제자들은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해 “건물을 운영한 사람이 잘못이지 건물을 지은 사람이 무슨 죄냐”고 항변한다지만, 이 건물을 직접 본 사람이면 누구나 스승에 대한 맹목적 감싸기에 불과하다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처음부터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민주인사나 학생들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걸 알고, 오히려 그에 충실하게 설계된 건물이다. 우선 입구에 들어설 때 탱크 소리를 내면서 열리는 육중한 문만 봐도 연행되어 온 민주인사나 학생들의 공포감을 극대화할 목적으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당으로 들어와 건물을 올려다보면 당시 조사실 (고문실)이 있던 5층의 창문 구조가 다른 층의 창문과 확연히 다르다는 걸 쉽게 발견하게 된다. 고문을 받다 고통에 못 이겨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역할과 더불어 밖을 손쉽게 내다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가늠할 수 없도록 한 그 치밀함에 보는 이들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보안시설은 건축가에게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하고 도면을 요구한다. 그 건물에서 어떤 작업이 이루어지고 각 방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거의 알려주지 않는다. 설계한 이들에게 도면을 남겨주지도 않는다. 건물이 도면대로 시공되었는지 확인할 길도 없다. 건축가 작품 연보에도 못 넣는다.
고문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합법이었던 적이 없다. 보안시설 설계의 경험이 조금만 있다면, 정부기관이 건축가에게 불법의 밀실을 요구하고 건축가가 적극 호응했다는 데 동의하기 어렵다. 남영동 대공분실도 분명 도면을 놓고 시공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건축가가 어두운 복도로 공포심 유발시키고 좁은 창문으로 탈출 막고 효과적 고문 도우려 욕조 설치했다는 건 상상이 그려낸 마귀의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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