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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24 13:38 수정 : 2019.11.24 14:27

1987년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받고 숨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층 조사실의 현재의 모습.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296
22일 ‘김근태 8주기’ 학술행사 열려
1호선 남영역 바로 옆 ‘고문의 공간’
2018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관
민주주의와 인권의 학습장으로 활용
5층에 고문실···4층에 박종철 기념관
건물 설계한 김수근 둘러싸고 ‘공방’

1987년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받고 숨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층 조사실의 현재의 모습.

서울 금천구와 경기도 부천, 인천 등지에서 오랫동안 사는 저는 전철 1호선을 자주 이용하는 편입니다.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로 출근하려면 여러 길이 있는데, 1호선 남영역에 내려서 숙명여대와 효창공원을 지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이 코스를 거의 이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저 자신도 이유가 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습니다. 제가 무의식적으로 남영역을 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확히는 남영역이 아니라 남영역 근처 어떤 장소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치안본부 대공분실입니다.

1985년 김근태 민청련 의장이 23일 동안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았던 곳, 1987년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숨진 곳이 저는 무서웠던 것입니다.

2005년 대공분실 기능이 홍제동으로 옮긴 뒤 그 건물이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었고, 건물 안에 2008년 박종철 기념관이 만들어졌고, 2018년 12월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이관되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조성되고 있습니다. 저도 물론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 한편에는 그 건물이 여전히 그 무서운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근태 전 의원 서거 8주기를 앞두고 11월 22일 오후 민주인권기념관에서 ‘김근태의 평화, 한반도와 그 지평을 넘어’라는 학술 행사가 열린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여태 ‘남영동 대공분실’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저의 나태함과 비겁함을 자책하며 학술행사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혼자서 그곳을 찾아가기는 왠지 좀 거북했습니다. 임석규 한겨레신문사 디지털미디어국장이 박종철 열사의 서울대 언어학과 친구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동행을 부탁했습니다.

남영역에서 5분도 걸리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탱크 소리를 내며 열린다는 육중한 철문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관이 들어설 예정인 테니스장은 잡초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4층 박종철 기념 전시실에 먼저 들어갔습니다. 박종철 열사가 1985년 11월 친구 임석규 국장에게 보낸 편지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석규야 .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몹시 궁금하구나 . 이제사 편지 해서 미안하다 . 늘 오늘내일하다가 오늘에야 겨우 펜을 들었다 . 그동안 줄곧 학내 상황이 개헌 ST에 대한 방향성도 제대로 못 잡고 허둥지둥하면서 정신없이 돌아가고 혼란했던지라 나도 정신없이 바쁘기만 하고 해 놓은 일도 별로 없는 것 같다 .”

“석규야 어쩐지 너무 허전하고 맥이 빠진다 . 내일모레면 바야흐로 3학년이 된다 . 그동안 , 지난 2년 동안 무엇으로 내 생활을 채워왔는지 모르겠다 . 1학년들에게는 늘쌍 ‘올바른 세계관에 기초한 과학적인 운동론’을 강조하면서도 나 자신은 과연 얼마나 그런 토대 위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

1985년 11월 박종철 열사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당시 평범했던 한 서울대 운동권 학생의 인간적 체취가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5층 조사실로 올라갔습니다.

그 무서운 고문실과 복도에서 맞닥뜨린 것은 뜻밖에도 수십명의 학생들이었습니다. 해맑은 얼굴의 청소년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신기한 듯 고문실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박종철 열사가 숨진 509호 조사실은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물고문을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욕조, 세면대, 책상, 침대가 작은 방 안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었습니다.

복도 끝에는 김근태 전 의원이 1985년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한 515호 조사실이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김근태 전 의원의 기록과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515호는 509호보다 공간이 훨씬 넓었습니다. 임석규 국장은 “전기고문을 하기 위해 칠성판을 놓아야 하는데 그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김근태 전 의원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겪은 일을 나중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남영동 5층 구석방에서의 23일 , 이것은 지옥이었다 . 독가스 대신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설치는 나치 수용소였다 . 시간이 종국적으로 멈춰 버린 영원한 저주의 세계였다 .”

조사실을 둘러본 뒤 7층 강당에서 열린 학술행사에 참석했습니다. 김근태 전 의원의 부인이며 김근태 재단 이사장인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고문을 당한 장소에 올 수가 없어서 참석하지 않았다고 김근태 재단 이사인 홍종학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설명했습니다.

가해자들은 발 뻗고 잘살고 있을 텐데 피해자들은 아직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22일 오후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7층 강당에서 김근태 전 의원 서거 8주기 학술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래도 그 악명 높던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탈바꿈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학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영동 치안분실 대공분실은 건축가 김수근 씨가 지은 건물입니다. 고문을 하기에 딱 적합한 구조로 건물을 설계한 사람이 과연 고문에 대해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하는지는 지금도 논쟁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이세영 한겨레신문 기자가 2016년 <건축 멜랑콜리아>라는 제목으로 한국 근현대 건축·공간 탐사기를 책으로 냈습니다. 여기에 남영동 대공분실이 나옵니다.

“한국 현대건축의 한 시대를 풍미한 김수근도 동시대 권력을 위해 악명 높은 ‘치안 기계 ’를 헌정했다 . 서울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다 . 1976년 완공된 건물은 애초 5층으로 지어졌으나 1980년대 초에 7층으로 증축됐다 . 이 건물은 1985년 김근태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22일 동안 살인적 고문을 당한 곳이다 . 1987년 1월 14일에는 서울대생 박종철이 5층 9호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졌다 . 물론 김수근은 박종철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 사건이 있기 7개월 전 지병인 간암으로 타계했기 때문이다 .

2000년 중반 이 ‘고문 공장 ’의 설계자가 김수근이란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을 때 제자와 지인들은 곤혹스러워했다 . 누군가는 거장이 남긴 졸작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했다 . 건축가의 설계를 실무자가 변경했을 것이란 선의의 추측도 나왔다 . 건물을 악용한 사람들을 비난할 일이지 , 건물 자체를 두고 시비를 걸어선 안 된다며 ‘사용자 책임론 ’을 펼치는 이도 있었다 .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 유신 정권이 김수근을 지목해 설계를 의뢰했고 , 김수근은 이에 부응해 ‘간첩 잡는’ 대공수사기관의 업무에 최적화된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 2005년부터 경찰청 인권센터로 사용 중인 이 건물에는 1970년대 김수근 건축을 특징짓는 조형 언어들이 또렷이 각인되어 있다 .”

“이 건물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건물의 외부가 아닌 내부 구성이다 . 특히 조사실이 들어선 5층은 창의 크기와 각 방의 출입문 위치, 조명등의 종류와 기능에 이르기까지 설계자의 세심한 계산과 고려가 엿보인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배치된 열여섯 개의 조사실은 마주 보는 방의 출입구가 엇갈리게 배치돼 동시에 문이 열리더라도 맞은 편에서 조사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동선의 흐름과 시선의 움직임까지 고려한 치밀한 공간 설계다.

조사실마다 두 개씩 설치된 세로 창은 폭이 20센티미터 정도로 사람의 머리가 통과할 수 없다. 추락이나 투신을 막기 위한 고려로 보인다. 조사실마다 설치된 욕조 또한 용도가 미심쩍다. 가정집이나 숙박업소에 설치된 것에 비해 유난히 길이가 짧아 성인이 들어가 앉으면 다리를 뻗기가 어려울 정도다 . 목욕물을 받기 위한 쓰임새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벽은 내부 소음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철제 흡음재로 마감했고, 조명등은 자해를 막기 위한 목적인 듯 내부로 밀어 넣은 뒤 철망으로 막아놓았다.

특징적인 시설을 하나 더 꼽으라면 1층 후면에서 5층 조사실 복도로 이어지는 철제 원형 계단이다. 건물로 이송된 피의자들은 정면의 주 출입구가 아닌, 후면의 쪽문과 이어진 원형 계단을 통해 5층 취조실로 이동했다. 계단실은 중세 수도원의 첨탑과 비슷한 구조인데, 이 건물에서 조사받은 피해자들은 수사관들에게 이끌려 가파른 계단을 돌아 올라가는 동안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극도의 불안과 공포감에 휩싸였다고 진술한다.”

그런가 하면 ‘민주열사 박종철 기념사업회’가 제작한 남영동 대공분실 탐방 안내 소책자는 건물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 중 한 명으로 알려진 김수근의 작품이다. 김수근은 5·16 쿠데타의 핵심이었던 김종필과 친분을 쌓으면서 박정희 군사정권과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많은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한 건축가이다. 워커힐 (1961), 자유센터와 타워호텔 (1963), 세운상가 (1966), 여의도 종합개발 계획 (1967), 올림픽주경기장 (1976), 올림픽 체조 ·사이클 ·수영 경기장 (1984), 서울지방법원 청사 (1984)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김수근은 자신이 사용했던 ‘공간’ 사옥과 같이 검은색 벽돌을 활용하여 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지었다. 지금도 김수근의 제자들은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해 “건물을 운영한 사람이 잘못이지 건물을 지은 사람이 무슨 죄냐”고 항변한다지만, 이 건물을 직접 본 사람이면 누구나 스승에 대한 맹목적 감싸기에 불과하다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처음부터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민주인사나 학생들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걸 알고, 오히려 그에 충실하게 설계된 건물이다. 우선 입구에 들어설 때 탱크 소리를 내면서 열리는 육중한 문만 봐도 연행되어 온 민주인사나 학생들의 공포감을 극대화할 목적으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당으로 들어와 건물을 올려다보면 당시 조사실 (고문실)이 있던 5층의 창문 구조가 다른 층의 창문과 확연히 다르다는 걸 쉽게 발견하게 된다. 고문을 받다 고통에 못 이겨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역할과 더불어 밖을 손쉽게 내다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가늠할 수 없도록 한 그 치밀함에 보는 이들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반론을 서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가 2019년 8월 30일 치 <중앙일보> 중앙시평에 실은 적이 있습니다. ‘죽은 건축가를 위한 변론’이라는 제목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보안시설은 건축가에게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하고 도면을 요구한다. 그 건물에서 어떤 작업이 이루어지고 각 방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거의 알려주지 않는다. 설계한 이들에게 도면을 남겨주지도 않는다. 건물이 도면대로 시공되었는지 확인할 길도 없다. 건축가 작품 연보에도 못 넣는다.

고문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합법이었던 적이 없다. 보안시설 설계의 경험이 조금만 있다면, 정부기관이 건축가에게 불법의 밀실을 요구하고 건축가가 적극 호응했다는 데 동의하기 어렵다. 남영동 대공분실도 분명 도면을 놓고 시공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건축가가 어두운 복도로 공포심 유발시키고 좁은 창문으로 탈출 막고 효과적 고문 도우려 욕조 설치했다는 건 상상이 그려낸 마귀의 형상이다.”

여러분은 어느 쪽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중요한 것은 ‘김수근 책임론’이 아니라 박정희 전두환 독재 시절 국가 권력에 의한 고문이라는 반인권적 행위가 자행됐고 다시는 그런 범죄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서현 교수가 글을 쓴 의도도 국가의 범죄를 방어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그래도 김수근 씨가 설계해서 지은 건물에서 국가 기관의 고문이 자행된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입니다. 또 바로 그 건물이 이제는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남아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학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김수근 씨가 저승에서 뭐라고 할지 참 궁금합니다.

콘텐츠 무상 공유 운동을 하는 셀수스 협동조합(http://celsus.org/)이 박종철 열사가 마지막으로 보고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면과 소리를 모아 7분 정도 영상물로 지난 6월 만들었습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8QAJygrz_5Y)

길지 않으니 한번 열어서 보시기 바랍니다. 20대 초반의 서울대 운동권 학생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겪었을 고통과 두려움을 생생하게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누리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는 누군가의 목숨을 대가로 치른 매우 소중하고 값비싼 것입니다.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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