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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5.22 21:18 수정 : 2015.01.19 16:28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백용성 스님에 대해 법륜 스님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짬] ‘독립운동가’ 용성 재조명
법륜 스님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33인이 지금 태화관에 모여 있으니 빨리 잡아가라고 제자를 시켜 일본 총독부에 전화한 분이 용성 스님이라고 들었다.”

22일 서울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법륜 스님(61)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준다. 법륜 스님은 이날 즉문즉설의 대가나 <인생수업>의 저자로서가 아니라 ‘㈔독립운동가 백용성 조사 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서 나왔다. 그는 용성 스님(1864~1940)의 탄생지인 전북 장수에 세워진 죽림정사의 주지를 맡고 있다. 한국 근대 불교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백용성 스님 탄생 150돌 행사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그는 ‘용성 스님 문중’에서만 회자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3·1운동 당시 종교인 대표 33인이 애초 작정한 탑골공원에 가지도 못하고, 인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만 낭독하고 헤어져버리면, 독립운동이 전국민적으로 불이 붙지 않기 때문에 태화관 기생들을 시켜 33인의 두루마기와 신발을 감추어 돌아가지 못하게 한 뒤, 제자 동헌스님을 시켜 “내가 바로 태화관 주인”이라고 총독부에 신고전화를 하게 해, 자신을 비롯한 33인을 모두 잡아가게 했다는 것이다.

용성 스님은 3·1운동 때 15살 연하의 젊은 만해 한용운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독립선언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때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 1년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당시 3·1운동에 참여한 민족대표들이 긴긴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변절했지만, 그는 한용운 등과 함께 끝까지 지조를 지킨 독립운동가로 남은 것으로 전해진다.

법륜 스님에게 용성 스님은 증조부뻘이다. 용성의 제자가 동헌 스님이고 동헌의 제자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뒤 우면산 대성사 조실 도문 스님(80)이다. 법륜 스님은 도문 스님이 경주 분황사 주지 할 때 경주고에서 영남불교학생회를 조직해 학생회장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도문 스님은 평생 용성 스님의 유언을 실현하기 위해 성지 복원과 불경 한글번역 등에 매달려왔다. 법륜 스님은 스승인 도문 스님이 그런 삶을 살게 된 인연을 들려준다.

3·1운동 당시 불교계 대표로 참여
독립운동 불 붙이려 총독부에 신고

간도에 대각교당 세워 운동가 돌봐
김구 선생, 해방뒤 찾아 감사 표해

기복위주 조선 불교 개혁 선구자
불경 한글번역 뜻 도문스님이 이어

“은사(도문) 스님의 증조부와 용성 스님이 고향 친구였다. 전라도의 만석꾼 부자였던 도문 스님의 증조부가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 자금을 몰래 댔다고 한다. 용성 스님이 열반하실 때 도문 스님은 7살 외동아들이었는데, 용성 스님이 ‘이 아이는 출가시켜 내 유지를 잇도록 하라’고 유언했고, 만석꾼 집안의 외동아들인데도 출가시켜 용성 스님의 뜻을 잇게 했다.”

학생시절부터 은사 스님으로부터 귀가 닳도록 용성 스님에 대해 들었던 법륜 스님은 ‘3·1운동 때 여러 종교가 힘을 합할 수 있게 된 배경’과 관련한 일화도 전해준다.

“애초 용성 스님이 출가한 곳이 전북 남원(당시 장수) 교령산성 안에 있는 덕밀암의 혜월 스님이었다. 혜월 스님은 동학(천도교)을 창도한 뒤 조정에 의해 쫓기고 있던 수운 최제우를 6개월 이상 숨겨주었다. 수운은 이곳에서 동학의 주요 경전을 썼다고 한다. 훗날 용성 스님은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를 만났을 때, ‘당신 스승과 나의 스승이 그런 인연이 있다’고 말해 3.1운동때 종교가 달라도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용성은 간도에 대각교당을 세워 독립운동가들의 뒤를 돌봤다고 한다. 법륜 스님은 “윤봉길 의사를 김구 선생에게 보낸 이도 용성 스님이라는 이야기가 우리 문중에선 전해온다”고 말했다. 김구 선생이 해방 뒤 귀국해 용성 스님이 열었던 대각교당을 찾아 “이미 5년 전 열반한 용성 스님 덕분에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고 한다.

용성 스님은 독립운동가이기 전에 한국 근대불교의 최고승이었다. 성철 스님은 출가하자마자 은사 동산 스님의 스승이어서 조부뻘인 용성 스님을 시봉(비서)했는데, “용성 스님 곁에 있으면 평생 시봉밖에 못할 것 같아 야밤에 도망쳤다”고 고백한 바 있다. 조계종의 해인사, 범어사, 화엄사, 쌍계사, 신흥사 등이 용성 문중 사찰이며, 고암·동산·성철·혜암·법전 등 조계종의 종정 60%가 용성 문중일 정도로 여전히 조계종의 중추세력이다. 용성 스님이 정도전의 <불씨잡변> 등 불교 비판에 맞서 쓴 <기원정종>과 수행문답집인 <각해일륜> 등은 중국 불교의 답습을 넘어선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법륜 스님은 “용성 스님은 수행력도 깊었지만, 조선 500년간 한양 도성 출입도 못하면서 권위가 실추돼 민간신앙 속에 묻혀 기복이나 행하던 조선 불교를 현대적으로 개혁시킨 선구자였다”고 사례를 들었다.

“용성 스님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뒤 도성 안에선 최초로 창덕궁 앞에 포교당인 대각사를 열고, 한자로만 되어 있던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앞장섰다. 한문경전을 한글화하면 승려의 권위가 하락한다는 주변의 만류를 꺾고 출가자 위주의 불교에서 떠나 대중불교의 첫삽을 떴다. 또 찬불가를 만들고 대각사에 어린이 포교를 시작해 풍금까지 들여 노래를 부르게 했다. 3·1운동 때 당시로선 노인 취급 받는 쉰여섯살이었고, 조실을 다 거친 뒤였는데도 획기적인 생각들을 실현해 갔다.”

법륜 스님은 “용성 스님은 불교가 삶과 유리된 게 아니라며 간도에서 대규모 농장을 마련해 선농일치(참선과 농사가 둘이 아님)를 주창하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는 중생을 보살핌)을 실현해 이 땅에서 진정한 대승불교를 열었다”고 밝혔다. 불교적 가치관을 시민운동, 환경운동, 통일운동 등을 통해 삶 속에서 실현한 대승불교 운동의 선구자였다는 것이다.

한편 용성 스님을 기리는 심포지엄이 오는 29일 오후 2~5시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이이화 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조성택 고려대 교수 등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다. 이어 6월5일엔 죽림정사에서 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용성 스님 탄생 150돌 기념식과 용성음악제가 열린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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