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볼팀 웰컴론(원래 이름 에이치시코로사)의 창단주인 정명헌 코로사 대표가 지난주 경기도 성남 사무실에서 웰컴론의 프로리그 남자부 첫 우승 이야기를 나누며 기뻐하고 있다. 사무실에는 주력 제품인 장미 육종보다는 각종 핸드볼대회 수상 기념품이 가득하다.
|
[짬] ‘웰컴론’ 구단주 정명헌 대표
장미육종회사 창업뒤 구단 창단
운영난 겪다 ‘네이밍스폰서’로 재기
5년만에 강호 두산꺾고 챔피언
“핸드볼 매력, 한마디로 미칩니다 미쳐”
1997년 코로사를 창업한 그는 영업사원으로 직원 2명을 채용했는데, 마침 핸드볼 선수 출신이었다. 2001년 상무에서 제대하는 선수들이 오갈 데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국내 남자 실업팀은 2개에 불과했다. “문득 ‘핸드볼팀을 만들어 볼까’ 하는 무모한 생각이 들더군요.” 제대한 7명과 기존 2명을 합쳐 9명으로 핸드볼팀을 만들었다. 회사 이름 앞에 핸드볼 클럽의 약칭인 ‘에이치시’(HC)를 붙여 ‘에이치시 코로사’가 됐다. 감독은 자신이 직접 맡았다. “주위에서 모두들 ‘미쳤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 나름대로 운영방안이 있었죠.” 선수들은 업무와 운동을 병행했다. 낮에는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새벽과 밤에 체육관에서 땀을 흘렸다. ‘주경야운’이었던 셈. 창단 첫해부터 2년 연속 당시 최고 권위의 핸드볼큰잔치 결승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2003년 제주 전국체전에서 감격의 첫 우승을 차지했다. ‘꽃파는 남자들의 우승’이라며 세간의 화제가 됐다. 그때부터 13년 동안 코리아리그와 핸드볼큰잔치, 전국체전 등 각종 대회에서 20번이나 우승했다. 하지만 영업해야 할 때 선수들이 대회에 출전해야 하니 회사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정 대표는 “선수들 대신 혼자 서너명 몫의 영업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회사 장부는 해마다 적자였다. 그나마 2004년부터 경남체육회의 지원을 받아 위기를 넘겼다. 고객 농가의 30% 이상이 경남 김해 대동 화훼단지에 몰려 있는 인연으로 전국체전에 경남 대표로 나섰다. 하지만 ‘언발에 오줌누기’였다. 은행 대출은 일상이 됐고, 집은 담보로 잡힌 지 오래였다. 결국 2009년 초, 핸드볼큰잔치를 끝으로 팀 해체를 선언했다. 그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손종주 웰컴저축은행 대표이사였다. 핸드볼 팬이라는 손 대표는 ‘코로사가 재정난으로 해체 위기에 놓였다’는 <한겨레> 기사(2009년 2월25일치)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지원에 나섰다고 했다. “전화를 받고 한동안 얼이 빠져 꿈인가 생신가 했어요.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문제는 성적이었다. 웰컴론이 네이밍 스폰서로 나선 5년 동안 지난해 전국체전 우승이 고작이었다. 정 대표는 전력 보강에 사활을 걸었다. 지난해 국가대표 피봇 박중규를 영입해 기존 에이스 백원철과 정수영과 함께 코리아리그 우승에 도전했으나 선수들의 줄부상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올해는 충남체육회에서 자유계약(FA) 선수로 풀린 골키퍼 이창우를 데려왔다. 대기만성형의 노력파인 이창우는 코리아리그 정규리그와 챔피언전 최우수선수(MVP)를 석권하며 기대에 보답했다. 정 대표가 핸드볼에 ‘꽂힌’ 것은 서울 동성중 1학년 때이던 73년이다. “동성고 핸드볼부와 국가대표가 많았던 성균관대가 연습 경기를 종종 했는데 박진감이 넘쳐 수업도 까먹고 구경한 적이 있었어요.” 2학년 때 동성중에도 핸드볼부가 생기자 선수로 자원했지만 팀은 이듬해 곧 해체됐다. 미련이 남았던 그는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교육과에 입학해 대학 2부리그에 속하는 핸드볼 동아리에 가입했다. 한국외대는 ‘동문기 쟁탈 교내 핸드볼대회’가 45년째 이어지고 핸드볼 명문이기도 했다. 졸업 뒤 독일 유학 길에 올랐다. 학비는 장학생으로 면제를 받았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태권도 강사, 우편물 배달, 맥주공장과 트럭공장 노동자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핸드볼을 중계하는 텔레비전에 시선이 고정됐다. “88올림픽에서 여자핸드볼이 금메달, 남자핸드볼이 은메달을 따는 모습이었죠. 잠재돼 있던 핸드볼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더라구요.” 그는 이웃집 소개로 동네 핸드볼클럽을 찾아갔다. “유소년 클럽은 물론 성인 클럽도 꽉 찼더군요. 직업도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회사원 등 다양했구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 경기를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독일은 그때 이미 핸드볼 문화가 생활스포츠로 자리를 잡았죠.” 독일은 4부 리그 클럽도 회원이 수백명이고, 스폰서도 붙는다. 그도 한때 4부 리그에서 뛰었다. “시합에 나가면 응원하는 클럽 회원들로 체육관이 꽉 찹니다. 초·중·고 경기에 선수 학부모들만이 관중석을 지키는 우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죠.” 독일의 핸드볼 클럽 운영방식은 그가 코로사에서 핸드볼팀을 꾸리는 데 ‘롤모델’이 됐다. 슈투트가르트대학 언어학과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지만 그는 한평생 핸드볼 인생을 살기로 했다. “핸드볼의 매력이요? 경기장에 한번 와서 보세요.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다이나믹하죠. 한마디로 미칩니다. 미쳐.” 그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글·사진/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