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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5.29 18:51 수정 : 2015.01.19 16:28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으로 고초를 겪다 먼저 떠난 남편 강우규씨의 누명을 벗기고자 80년 만에 고국을 방문한 구순의 부인 강화옥(가운데 휠체어 앉은 이)씨가 28일 첫 재심 공판이 열린 서울고법 앞에서 딸·조카 등 가족들과 함께했다.

[짬] 80년 만에 고국 땅 밟은
아흔넷 강화옥 씨

‘재일동포 실업인 간첩단’ 사건
남편 강우규 등 6명 재심에 참석
“당시 사형선고, 11년간 얼굴 못봐
무고한 사람을…이런나라 어디 있나
고향 찾아 간첩 아니라고 말하고파”

올해 아흔넷인 강화옥씨는 며칠 전 80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14살에 고향 제주도를 떠나 일본으로 건너간 그다. 강씨가 오랜만에 고국에 와서 찾은 곳은 법원이다.

28일 서울고법 302호 법정에서는 1977년 3월 ‘재일동포 실업인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고 강우규씨 등 6명에 대한 재심 사건 첫 공판이 열렸다. 묵묵히 이날 공판을 지켜본 강씨는 바로 강우규씨의 부인이다. 64년 결혼했으니 올해 50돌이다. 남편은 스무 살 때 일터에서 한쪽 다리를 다쳐 의족을 차고 다닌 장애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진 게 없어도 남에게 뭐라도 주려고 하는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그는 남편을 회고했다.

도쿄에서 함께 살던 남편은 72년 서울의 대영플라스틱에 감사로 취직했다. 같은 제주도 출신이 설립한 회사였다. 강씨는 남편과 떨어져 지내야 했지만 취직 소식에 들떴다. “어려서 일본에 왔기 때문에 늘 내 나라에 돌아가고 싶었다. 남편의 회사 생활이 안정되면 집을 마련해 나도 서울로 이사할 생각이었다.”

77년 1월 남편이 연락이 끊겼다. 두달 뒤 남편은 텔레비전 뉴스에 등장했다. 간첩 혐의로 구속됐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뉴스에선 남편이 대영플라스틱 감사 신분을 이용해 북한 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서울에 위장 잠입해서 10명을 끌어들여 간첩 활동을 했다고 했다. 강씨는 뉴스를 보자마자 기절해 3시간 뒤 깨어났다. “서울에 집을 마련해 가족들 다같이 살 날을 기다리며 기쁜 마음으로만 지냈는데…. 그때 이후로 요새도 가끔 현기증이 난다.”

남편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11년 뒤 88서울올림픽 특별사면으로 가석방될 때까지 강씨는 한번도 남편의 면회를 가거나 재판을 참관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밤낮으로 일해 변호사 비용을 마련해야 했다. 낮엔 도쿄에 차린 찻집에서 일했다. 밤엔 ‘강우규를 구원하는 모임’ 등 재일동포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 후원 모임에 나갔다. 셋째 딸과 거리에서 전단지도 뿌렸고, 일본 국회에 탄원서도 제출했다. 강씨는 “변호사 비용이 필요한 데 정말 돈이 없었다. 장사도 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시간이 없었다. 정말로 아무짓도 안한 사람을 이렇게 잡아놓고 그 자식과 부인을 이렇게 고생시키는 나라가 어디있나 생각하며 지냈다”고 했다. 대신 주변의 일본 사람들이 큰 힘이 됐다. “일본 사람들이 후원 운동을 해서 돈도 모아주고 도와줘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고 했다. 주변에서는 가족들까지 간첩으로 몰릴 수 있다며 재판 참관이나 면회를 말렸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지난 일들을 잘 얘기하지 않았다. 그동안 후원 운동을 해 준 동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만 가끔씩 그때 얘기를 꺼냈다. 남편은 “내 사건은 완전히 날조됐다. 일주일간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때리고 발로 밟고 잠을 계속 자지 못하게 했다. 나는 양 손목과 발목을 면도칼로 자르고, 면도칼을 삼키고 죽겠다고 각오를 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담당관들이 말렸고 고문이 중지됐다”고 했다. 고통스런 기억을 안고 살던 남편은 2007년 결국 세상을 떴다.

강씨는 남편의 사건에 대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하지 않았다. 그런 게 있는지 전혀 몰랐다. 남편의 공범으로 몰린 고 김추백씨 딸의 부탁으로 변호사가 일본으로 강씨를 찾아왔다. 같이 재심을 청구하자고 했다. 강씨는 “옛날 재판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재판은 다시 못하겠다”고 했다. 당시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끈질긴 설득에 마음이 바뀌었다. 4년 전이다. 그때부터 그는 걷기운동을 시작했다. 비행기 타고 재판하러 오려면 다리 힘을 길러야겠다고 결심해서다. “내 남편은 이미 떠났고, 난 일본에 살면 되지만, 한국에 사는 (비슷한) 피해 가족들은 더 힘들지 않겠냐. 내가 만약 뭔가를 해서 저 사람들한테 보탬이 되면 남편 대신 하겠다”고 했다.

강씨는 제주도에는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과 친지들에게 “남편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동안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남편 대신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매일 아침 동네 공원을 걷는다. “정말로 이 일을 끝내기 위해서 내가 있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다. 제 나라에서 부지런히 살아보고자 했던 죄 없는 남편처럼,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돼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항상 하며 걷는다”고 했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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