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살 소녀 때 ‘시다’(미싱 보조사)로 취직해 청계피복노조의 주역으로 활동했던 신순애씨가 이제는 옛 자취를 찾기 힘든 평화시장에서 전태일 열사의 동상을 바라보며 험난했지만 열정적이었던 젊은 시절을 반추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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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청계 노동운동사 책 낸
여공 출신 신순애씨
노동운동 눈뜨며 징역살이 고초
50살에 검정고시로 초등과정 통과
대학원서 청계노조 정리한 논문
‘열세살 여공의 삶’ 책으로 묶어내 신씨는 13살 때 청계천 봉제공장의 ‘시다’가 됐다. 12살 때 온 가족이 전북 남원을 떠나 서울 중량교 뚝방의 판잣집에 정착한 뒤 그는 학교 대신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고향에서도 월사금을 못 내 초등학교를 그만둔 뒤였다. 부모님과 큰오빠 부부, 그 사이에 낳은 조카와 작은오빠 등 모두 8명이 한방에 끼어 자야 했다.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도 방을 나갈 수 없어 참아야 했다. 어렵게 취직한 청계천 봉제공장의 한달 월급은 700원. 당시 학생 버스비가 5원이었는데, 학생증이 없다는 이유로 그는 10원씩 내야 했다. 한달 교통비만 500원. 10원이면 온 가족 하루 반찬비였다.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청계천에서 중량교 뚝방까지 두 시간씩 걸어 출퇴근했다. 하루 종일 허리도 펴지 못하고 일하던 평화시장 안 먼지투성이의 다락방 공장에서 그는 어느 날 조그만 희망을 발견했다. “언니들이 시장 안에 있는 학교에 나오라며 나눠준 전단지에 ‘중등과정 무료’라는 글씨가 보였어요. 그래서 청계피복 노동교실에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자연스레 청계노조 조합원이 된 거죠.” 신씨는 1975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 날 밤을 잊지 못한다. 어느덧 ‘오야 미싱사’로 승격해 열심히 노조운동에 참여하던 무렵이었다. “잔업에 야근에 시달려 야학을 다닐 수 없는 여공들을 위해 전태일 열사의 이소선 어머니와 함께 ‘노동시간을 단축하라’는 농성을 시작했어요. 경찰이 몰려와 해산하지 않으면 전원 구속하겠다고 협박했죠.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그날 저녁 무렵 평화시장 내 안내방송에서 “오늘 저녁 8시부터 전깃불을 내릴 테니 작업을 그 이전에 마감하라”는 통보가 흘러나오더니, 정말로 8시에 불이 꺼진 것이다. “그건 엄청난 희열이었어요. 좁은 통로로 무리지어 퇴근하는 여공들을 보며 노동운동의 힘을 실감한 순간이었죠.” 그렇게 비록 노동시간 단축을 따낸 뒤, 여전한 사용자의 눈치를 무시하고 미싱의 모터를 제시간에 끄는 용기를 보인 신씨는 노동운동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구호를 외치는 ‘독종’으로 변해갔다. 그러다 77년 노동교실을 해체하려는 탄압에 맞서 농성을 하다가 결국 구속됐다. 경찰관에게 조사를 받다가 따귀를 맞아 고막이 파열되는 ‘훈장’을 얻기도 한 그는 1년간 서대문구치소 신세를 졌다. 당시 재판 때 그는 “피고인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적이 있냐?”고 묻는 판사에게, “경찰에서 빨갱이로 몰아 억울했는데, 판사까지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느냐”고 소리치며 항의하다가 기절하기도 했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선고를 받고 풀려난 뒤 청계노조에 복귀한 그는 80년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끌려갔다. 쌍욕과 구타를 참아내며 20일 만에 합동수사본부에서 풀려난 그는 새마을 연수원에서 4박5일 동안 반공교육을 받은 뒤에야 귀가할 수 있었다. 그 뒤 청계노조 투쟁 동지 ‘박재익’과 결혼해 소년원 상담사와 가출청소년 생활관의 선생님 노릇을 하던 신씨는 50살에 늦은 학업에 도전하기로 했다. “너무 쉽게 학업을 포기하는 청소년들에게 학교의 중요성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어요.” 2003~2004년 2년 사이 초·중·고 검정고시를 통과한 신씨는 2년 뒤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면접 날 유난히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라 눈물이 났단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 이런 모습 보여드렸으면….” 내친김에 대학원까지 진학한 그는 ‘7번 시다’ ‘1번 미싱사’ ‘공순이’로 불리던 자신에게 ‘신순애’라는 이름을 찾아준 청계피복노조 운동사를 정리해서 석사논문을 쓰기도 했다.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의 ‘청계 여공’ 모델이기도 한 신씨는 “대부분의 노동운동사는 지식인들이 썼어요. 그들은 노동운동 현장의 세세한 부분을 잘 몰라요. 60~70년대 노동운동을 제대로 평가받으려면 노동자가 직접 쓴 기록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오류를 줄일 수 있으니까요. 저 같은 현장 노동자 출신들이 자기의 역사를 쓰도록 용기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글·사진/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조희연·이재정·이청연 교육감 '교육 변화의 열망'을 나누다 [한겨레담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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