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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6.24 18:35 수정 : 2015.01.19 16:21

최근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해 공동의장을 맡은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24일 오전 서울 신교동 우당기념관에 있는 이회영 선생 흉상 앞에서 문창극 총리 후보 사퇴자를 비롯해 박근혜 정부 실세들의 잘못된 역사관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짬]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본부’
이종찬 공동의장

“이른바 ‘문창극 사태’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식민사관이 무엇이고, 어디가 잘못됐으며, 그 폐해가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것이 바로 문씨의 역사적 역할이었나 보다.”

24일 오전, 경복궁이 가까운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신교동)의 ‘우당 기념관’에 들어서자 마자 이종찬(78) 관장은 그 이야기부터 꺼냈다. 때마침 그가 막 총리 후보직을 사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제 식민사관은 우선 역사적 사실 인식 자체에 오류가 많다. 저들은 한4군이 한반도 북부, 평양·대동강 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한4군은 요동에 있었다. 일제는 그와 함께 한반도 남부에는 이른바 ‘임나 일본부’가 있었다며 그것을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배의 근거로 들이댔다. 말하자면 한반도는 북부는 중국이, 남부는 일본이 지배한 정체되고 타율적인 역사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사람은 그런 역사에 걸맞은 게으르고 더럽고 노예적인 민족성을 타고 났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자신들의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을 테니까. 문창극씨가 한 얘기가 바로 그런 것이다.”

안전기획부장·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그는 노구에도 불구하고 해맑은 얼굴에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은 권력층 내에 그런 생각을 지닌 사람이 그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지난 4월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공동의장을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 관장은, 오는 30일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백범기념관에서 열릴 ‘한민족 평화통일연구소’ 창립식 준비로 지금 더욱 바빠졌다.

“내일 모레가 내 나이 80인데, 이제 이런 일 젊은 사람들에게 물려주고 인생 수습을 해야 할 나인데, (식민사관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

임동원 전 국정원장과 인명진·허성관·라종일·김희선씨와 역사학자 이덕일씨 등이 함께하는 한민족평화통일연구소는 최근 교육부 인가가 난 신한대학교를 남북 민족통일과 인문학 발전을 위한 인재양성소로 키워가기 위해 만들었다고 연구소 이사장도 맡게 될 이 관장은 설명했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직계 손자로, 우당의 11대 선조 백사 이항복 이래 10명의 정승을 배출해 ‘삼한 갑족’이라 불렸던 그 집안의 사실상의 장손 역할을 하고 있는 그는 말했다. “내가 식민사관을 증오하는 이유는, 아직도 그것을 믿는 이들이 많아 우리가 나라는 독립이 됐지만 역사는 여전히 독립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한’이란 이름은 일제에 나라가 망한 뒤 그의 할아버지대의 6형제 모두가 지금 돈으로 치면 수조원대에 달하는 전 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간 뒤 설립한 무관학교 등에 붙은 ‘신흥’ ‘신한촌’ 등을 떠올리게 한다. 그 6형제들은 모든 재산을 민족 독립운동에 쏟아붓고 굶주렸으며, 광복 뒤 살아돌아온 이는 오직 한 사람, 다섯째인 성재 이시영뿐이었다.우당은 넷째로, 우당 기념관에는 그의 여섯 형제 영정이 한 쪽 벽면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이 관장은 예컨대 중국 <후한서> ‘최인 열전’에 “낙랑군 장잠현은 요동에 있다(長岑縣,屬樂浪郡,其地在遼東)”는 기록이 있다면서, 그런 것을 부정하는 식민사관을 바로잡기 위해 정부가 설립한 동북아역사재단이, 우리에게 유리한 그런 1차 사료들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한사군이 북한 지역에 있었다는 일제 식민사관 논리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결과적으로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를 편들어주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장은 마오쩌둥 전 중국 주석이 김일성 전 북한 주석과 만난 자리에서 요동이 예전에 조선사람이 살던 땅이었다는 얘기를 했다는 문서를 인용한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의 최근 저서 <칼날 위의 평화> 얘기까지 꺼냈다.(그 책 403~4쪽에는 마오와 저우언라이 총리가 그런 맥락에서 한 얘기들이 인용돼 있다.)

그는 동북아역사재단이 얼마전 10억원을 하버드대의 한 연구소에 주어서 제작하고 해외 공관 등에 배포하려는 영문 책자 또한 식민사관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며 비판했다. “그 책은 서울에서 인쇄하고 하와이 대학에서 배포를 맡았을 뿐 하버드대 출판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대주의가 뼛속 깊은 이들이 하버드라는 이름에 혹해 그 산하 한국학 연구소에 막대한 자금을 상납했을 뿐이다.” 이 관장은 광복 뒤 한국사 연구의 주류를 형성해 온 서울대 등의 주요 한국사 연구자들이 쓰다 소키치, 이마니시 류, 스에마쓰 야스카즈 등 일제 식민사관의 기본틀을 잡은 일본인 연구자들의 생각을 그대로 물려받은 제자들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동북아역사재단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성재 이시영이 1934년 상하이에 있을 때 중국인 황옌페이(黃炎培)가 쓴 <조선>이라는 책이 한4군의 한반도 존재 등 일제 식민사관 주장을 그대로 늘어놓고 있는데 분개해 쓴 <감시만어(感時漫語)>를 꺼내와 보여주면서, “한4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생각은 성재뿐만 아니라 단재(신채호), 백암(박은식), 석주(이상용), 만해(한용운)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이 관장은 남북이 이런 고대사뿐만 아니라 조선사 등 근세사에 이르는 우리 역사에 대한 그런 인식을 공유하고, “쉬운 것부터 하면서 어려운 건 나중에 하는 ‘선이후난(先易後難)’, 경제와 문화 분야부터 공감대를 넓혀서 정치는 나중에 푸는 ‘선경후정(先經後政)’의 정신으로 가면 통일이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는 독일도 그런 식으로 했다며 “독일통일을 흡수통일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그리고 “대만과 중국 양안도 지금 그렇게 가고 있는데, 그걸 먼저 시작한 우리만 지금 그렇지 못하다”며 “민족 시원의 역사부터 시작해 남북이 동질성을 찾아가며 공존한다면 그게 통일이 아니겠느냐”고도 했다.

일본 아베 정권의 최근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해 그는 “원천적으로 2차대전 패전 뒤 일본이 독일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 정도의 전범재판조차 제대로 받지 않고 면죄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대) 전범은 바로 쇼와(히로히토 천황)다. (미국이) 소련 견제를 위해 그를 살리고 전범처리를 대충 한 것이 화근이다.” 그러나 이 관장은 일본 우익의 제국주의적 사상과 행태가 문제지 일본이란 나라와 일본인들 자체를 미워해선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역사적 사실들을 제대로 밝혀서 일본 내의 양심세력들을 우리의 노력에 동참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와다 하루키 교수 등이 얘기한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추진 같은 것도 그래야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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