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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6.29 18:49 수정 : 2015.01.15 14:48

27일 오후 임종진 사진가가 자신의 사진집을 들고 포즈를 잡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짬] 임종진 사진작가

산이 보이지 않는 푸른 들판. 그 위의 파란 하늘과 흰 구름. 티없는 맑은 눈의 어린 소년소녀들. 물소 두 마리를 몰며 밭 가는 아버지 곁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 거대한 쓰레기 처리장. 흐린 물 늪 위에 떠 있는 초가지붕. 멀리 고층빌딩들이 띄엄띄엄 보이는 오염된 도시 근교 호숫가 목조 가옥들의 녹슨 양철지붕. 옛 서울 청계천변 판자촌을 연상케 하는 철거민 움막들. 그 속에 남녀노소가 있고 그들 모두 이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경계심 없이 때로는 수줍게, 때로는 환하게.

“물질적으로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가난하지만 캄보디아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 서로를 살펴주는 시선, 조그만 것이라도 주변과 나누려는 인정이 있다. 속도와 성과를 좇아 개인화하고 파편화한 우리에겐 사라져버린 것들이다.”

첫 사진집 <캄보디아-흙 물 바람 그리고 삶>(오마이북 펴냄)을 낸 사진가 임종진(47)은, “그러나 작가적 관점의 작품을 찍고 싶다거나 우리가 잃어버린 그 무엇을 찾기 위해 캄보디아에 간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곳과 인연을 맺은 2004년 이후 10년을 찾아 헤맨 끝에 그가 얻은 결론은 “타인의 삶을 위한 ‘쓰임’의 도구,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쓰이는 사진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캄보디아 곳곳을 다니면서 가족사진을 찍고 함께 나눴다. 2008년부터 2년 남짓한 기간에는 이동식 무료 사진관 ‘달팽이 사진관’을 홀로 운영하며 아예 그곳에서 살았다. 지금도 해마다 2~3차례 캄보디아에 가는 임 작가는 이번 사진집에 “그 땅을 디디면서 만난 수많은 ‘귀한’ 삶들”, “캄보디아의 땅과 삶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어떻게 제대로 전달할까를 고민하며 지난해까지 찍은 수많은 사진들 중에서 160여점을 골라 실었다.

2004년부터 10년간 찾아헤맨 땅
현지 무료 사진관 차려 찍은 삶
첫 사진집 ‘캄보디아…’에 담아
가난하지만 잃어버린 시선 아련
판매 수익 현지학교 건립 등에
속 얘기 담은 산문집도 낼 계획

시골, 도시빈민과 노동자, 지뢰피해 장애인 기술센터, 소수민족 프농의 마을들, 주로 아이들과 그가 ‘누님’으로 부르는 빈민촌 아줌마와 그 가족 등을 두루 담은 사진들이다.

“추려내느라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 책에 담지 못한 사진들과 캄보디아와의 인연, 첫걸음 때의 두려움과 10년 지기가 돼 더 속깊이 알게 된 사연 등을 담은 산문집을 조만간 따로 낼 예정이다.

“기자로 일하는 동안 냉철하고 분석적인 시선보다는 동정과 연민의 감정이 앞선 상태로 수없이 많은 ‘삶’들 앞에 서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보통 ‘소외 계층’이라 불리는 이들이었고, 나는 그들의 삶이 지닌 가치를 전한다는 명목으로 소외의 사회적 근거가 되는 ‘외형’에만 집착하는 오류를 범했다. 빈민에게서는 가난을, 장애인에게서는 장애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서는 나와 다른 피부색과 잘려 나간 손마디를 바라봤다. 그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개선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욕심에 빠져 가장 중요한 ‘사람’ 그 자체 를 보지 못한 것이다.”

뭔가 다른 방식, 사진의 관점과 시선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절감하기 시작한 세월과 맞닥뜨렸고 고민에 빠졌다. 뭔가 더 깊이, 더 길게 들여다보고 싶었다.

“2003년에 <한겨레> 사진기자로서 반전평화팀의 일원이 돼 이라크 전장에 갔다. 상황이 좋지 않아 팀이 철수하기로 했지만 나는 남기로 했다. 그런데 내 안내자였던 카심이 날 보자더니 ‘난 너를 친구로 생각하는데, 너는 어떠냐? 내가 몸이 아플 때 달려와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가 그렇다면 자신의 부탁 한 가지만 들어달라며, 당장 이라크를 떠나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거기서 죽게 될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그는 펑펑 울었다.

결국 돌아왔지만 방황했다. 그리고 그 뒤 휴가를 내 회사일과 무관하게 다시 이라크를 찾아갔다. 그 무렵 누군가가 캄보디아 에이즈 말기 환자 수용소 얘기를 하며 가보겠느냐고 했다.

“수용소에 갔는데,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다. 그때 올려다본 하늘은 푸르고 아름다웠다. 그 순간 인기척이 있기에 뒤돌아봤다. 그리고 기겁을 했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에 반점투성이의 에이즈 환자가 휠체어를 타고 가만히 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수용소에 가면 환자들을 껴안아 주겠다는 마음을 먹고 갔다. 하지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0.01초도 안 되는 그 짧은 순간, 나는 내 부끄러운 가식과 허위의식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를 이끈 동정심의 정체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그동안 내가 뭘 했던가.”

2주쯤 그곳에 머문 뒤 그곳에 상주하며 그들을 돌보던 한국인 신부, 지금은 “친형이나 다름없다”는 분을 만났고 캄보디아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때 그의 나이 37살. 2008년엔 아예 신문사를 그만두고 그동안의 경험들을 2권의 산문집으로 정리해서 낸 뒤 캄보디아로 갔다.

“한국을 성장모델로 여기는 훈센 총리가 이끌어온 캄보디아는 지난 10년간 급속한 개발과 함께 극심한 빈부격차를 겪고 있다. 개발에서 밀려나는 가난한 주변인들의 척박하지만 존엄한 삶을 (연출 없이) 그대로 전하는 게 내 사진의 의미다. 지금은 사람을 중심에 놓고 찍는다. 가난과 장애와 다른 피부색 자체가 아니라 인간들과 그 사연을 그대로 전하는 전달자의 역할이 내 임무다.”

그리고 어떻게 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고민하겠다고 했다. “가난한 이들을 시혜 대상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그들을 동정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서로 살펴주는 수평적 관계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는 지금 가난한 소수민족 프농 마을의 유치원 후원회에 매달 1000달러씩 보내고 있다.

이번 사진집도 4000부를 찍어 3000부는 전세계를 상대로 판매해 캄보디아 비정부기구(NGO)가 운영하는 하비에르 예수회의 시골 초·중·고 학교 건립·운영비에 보탠다. 학교는 지금 부지만 확보된 상태인데, 향후 10년간의 운영비까지 포함한 100억원의 기금을 모으고 있다. 일반인들 대상으로 판매중인 1000부도 그 수익금은 캄보디아 엔지오 활동비로 쓰일 것이다. 지난 26일 출판기념회에서 임종진은 후배 엔지오 활동가와의 결혼 계획을 밝혔다. 47살 나이에.

한승동 기자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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