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기(78) 케이비엘(KBL·한국농구연맹) 새 총재가 지난 24일 서울 여의도 매리어트호텔 커피숍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케이비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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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팔순 앞두고 복귀한
김영기 KBL 새 총재
KBL 출범시킨뒤 10년전 은퇴
후배들 삼고초려에 현업 복귀
“흐름끊는 심판 판정 개혁하고
경기력 향상시켜 중계 늘릴것” 그가 농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7살 때인 배재고 2학년 시절이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1885년 미국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은 그 시절 이미 방과후 동아리 활동이 활발했는데, 키 크고 공부 잘하는 학생만 뽑았던 농구부에 들어갔다. 왜 하필 농구부였을까? “농구는 마치 수학 같았어요. 상대 수비를 따돌리는 패턴 플레이로 골을 넣으면 마치 공식을 풀어서 답이 나온 것 같은 희열을 느꼈죠.” 체육특기생이 아니라 일반 전형으로 고려대 법대에 진학한 그는 대학 1학년 때 농구에 다시 한번 눈을 떴다. “미국프로농구(NBA) 출신 선수들이 한국에 순회 코치를 왔죠. 지금의 르브론 제임스 같은, 당대 스타 선수가 직접 지도를 해준 거였죠.” 대학 2학년 때 국가대표로 멜버른 올림픽에 처음 출전해 막내였지만 맹활약했다. 8년 뒤 도쿄올림픽에선 어느덧 대표팀 최고참에 간판스타가 됐다. 그는 “팬레터가 한번에 600통이나 오는 바람에, 그 속에서 아내가 보낸 ‘연애편지’를 찾느라 힘들었다”며 껄껄 웃었다. 은퇴 뒤 기업은행에서 근무하던 그는 1969년 33살에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그해 아시아선수권과 70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연거푸 우승했다. 감독 5년을 마치고 다시 금융인으로 돌아갔던 그는 신용보증기금 설립에 참여했다. “그때 사무국장 경험이 훗날 케이비엘을 설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신용보증기금에 여자농구단을 만들고, 농구협회 부회장을 12년이나 맡았던 그는 81년 40대 초반에 대한체육회 부회장이 됐다. 당시 대한체육회 회장이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직접 찾아와, 88 서울올림픽을 유치해야 하는데, 경기인은 없고 모두 ‘회장님’들뿐이니 도와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해 10월 개최지 선정하는 날 <한국방송>에서 갑자기 개최지 발표를 생중계하는데 사회를 해달라는 거예요. 이미 술에 취해 못 한다고 했더니, 방송사 관계자가 화장실로 데려가서 수도꼭지에 내 머리를 처박고 찬물을 틀더라고요. 조금 정신이 들었죠. 어차피 유치에 실패할 테니 길게 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덜컥 유치에 성공하면서 새벽 3시까지 방송을 했죠. 화장실이 급해 정말 혼났어요.” 프로농구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이 전면 허용된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대만, 필리핀도 프로농구가 있는데 이러다 뛰어난 선수들 모두 해외로 빼앗기겠다는 걱정이 앞섰다. 이미 ‘최고의 슈터’ 이충희 선수는 대만리그에 진출해 있었다. “프로화를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른바 ‘수구파’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어요. 그때 생각만 하면 정말 속상하죠.” 우여곡절 끝에 97년 2월1일, 프로농구 개막 경기가 열렸다. 집으로 돌아가다가 한강변에 잠시 차를 세우고 강물을 내려다봤다. ‘기어코 해냈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의 ‘산통’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케이비엘에서 10년 가까이 일했다. 전무이사와 부총재를 거쳐 2002년 11월부터 3대 총재도 지냈다. 그런데 2004년 초 프로농구 사상 초유의 몰수경기 사태가 터졌다. 안양 에스비에스(SBS)가 심판 판정에 항의하며 선수단을 철수시킨 것이다. 그는 “뮤지컬 공연 중에 배우들끼리 싸우고 막을 내리는 것과 똑같은 꼴”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총재직을 던졌다.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책임감 때문이었다. 프로농구 인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그만의 ‘히든카드’는 무엇일까. 그는 ‘판정 개혁’을 강조했다. “스포츠 규칙은 교통법규와 같고, 심판은 교통경찰입니다. 그런데 감독이 거칠게 항의해도 심판이 못 본 척합니다. 마치 음주운전하는데 적발 안 하는 것과 똑같죠. 솜방망이여선 안 됩니다.” 심판이 지나치게 수비자 편에서 서서 공격자의 흐름을 끊는 것도 문제로 지적했다. “재미있게 영화 보고 있는데 갑자기 필름이 끊어지는 꼴이죠. 이런 상황에선 마이클 조던도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거예요.” 최근 몇년간 시들한 프로농구 중계방송 문제에 대한 해답도 명쾌했다. “제품(경기력)이 엉터리인데, 가격(중계료)을 비싸게 달라면 말이 됩니까? 제품(경기력)이 좋으면 판매(중계권)는 저절로 됩니다.” 70대 후반의 나이를 거스르는 듯, 그의 스마트폰 ‘만보기’에는 이른 오후였지만 이미 ‘8871보’가 찍혀 있었다. “하루 1만보를 채우려고 늘 지하철을 이용한다”고 했다. 그의 열정은 코트를 누비는 현역 선수 못지않았다. 글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사진 케이비엘(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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