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07.10 18:59 수정 : 2015.01.19 16:17

사진가 박성태씨가 89살 김판임 할머니와 휴대폰으로 셀카를 찍고 있다. 전북 정읍에서 24살에 결혼하자마자 한센병에 걸려 여수 애양원으로 온 김 할머니는 손과 발이 없지만 성경과 찬송을 다 암송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아 마을에서 인기가 좋다. 사진가 김성환씨 제공

[짬] 여수서 한센인 사진전 여는 박성태 작가

다큐멘터리 사진가 박성태(47·사진)씨가 18일부터 새달 3일까지 여수진남문예회관에서 여수 애양원의 ‘평안의 집’과 도성마을에 살고 있는 한센인들의 일상을 담은 최초의 사진전 <우리안의 한센인-100년만의 외출>을 연다.

여수 사람이라면 애양원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지역에서 한 때 언론에 몸담았던 박씨도 “애양원은 알고 있었지만 상세한 상황엔 무관심했었다. 1년 전 우연히 평안의 집과 도성마을을 알게 되었는데, 귀신에라도 홀린 듯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사진찍어 편견과 경계를 허물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10일 전화 인터뷰에서 박씨는, 그때부터 사진을 찍기 위한 과정은 투쟁의 나날과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전염된다는 잘못된 상식으로 접촉을 꺼리는 일반인들의 편견만큼이나 한센인들도 일반인을 경계한다. 더구나 카메라에 대한 거부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카메라 거부하던 한센인 할머니도
자주 만나 얘기 나누자 경계심 풀어
그들의 일상 담은 ‘100년만의 외출’
미리 작품 보여준뒤 전시 허락받아

마음 한구석 ‘한센인 편견’ 허물려면
이웃처럼 교류기회 넓히는 게 핵심

-어떻게 경계심을 허물 수 있었는가?

“대학 때 신학과에 다녔고 지금도 기독교인이다. 한센인들은 대부분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로 성경과 찬송가는 달달 외울 정도다. 이들은 이승에선 차별을 받았지만 죽어 천국에선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예배시간에 자주 갔다. 그렇게 자주 만났고 얘길 많이 들었다. 사진 찍기보다 소통이 더 중요했고 어려웠다.”

-끝내 거부한 사람들은 없었는가?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들이 서넛 있었다. 무슨 이유로 사진을 찍느냐는 것이다.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사회적 관심을 받을 필요도 있다고 역설했다. 부부가 같이 사는 분들 중에서 할머니 한 분이 카메라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거부 반응을 보였다. 내가 결혼을 늦게 해서 7살짜리 아들이 있는데 한 번은 그 할머니를 만나러 갈 때 데리고 갔다. 아이를 낳더라도 격리시켜 생이별을 하게 되니 한센인들은 모든 아이들을 좋아한다. 개인적인 사연도 있다. 내가 4살 때 한번은 한센인이 나를 업어준 적이 있었다. 물론 아무일도 없었지만 무서웠다. 그 당시만 해도 한센인들이 아이들을 잡아가서 가마솥에 어떻게 한다는 소문이 돌 때였다. 그 어렸을 때의 오해가 이날 풀렸고 할머니도 나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내 아들을 얼마나 귀여워하시는지….”

-이번 전시의 의미는 무엇인가?

“처음 이 사진을 시작할 때 주제를 ‘이웃’으로 잡았다. 도성마을에서 개를 10마리나 키우던 분이 있는데 소리를 잘 듣지 못했다. 어느날 나를 보더니 차를 좀 태워달라고 했다. 율촌에 있는 백합식당이었다. 배가 고팠던 것이다. 식당 아주머니를 만나더니 서로 웃으시더라. 말하자면 둘은 이웃 사이다. 주변의 다른 식당에선 “한센인에게 밥을 주면 망한다”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한데 이 아주머니는 “우리 아들이 저분들에겐 더 잘해줘야 한다”라고 했다면서 숫제 밥을 같이 먹는 것이 아닌가. 전율을 느끼면서 사진을 찍는데 눈물이 나오더라. 일반인과 한센인의 교류가 핵심이다. 기아자동차 여천지점의 이형운 지점장은 25년동안 한센인들에게 차를 팔면서 보증을 서줬다고 했다. 주변에서 “할부금이라도 연체하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 단 한 사람도 단 한 번도 날짜를 어긴 적도 없다. 사정이 있어 못 오는 날에도 전날 미리 와서 동네 슈퍼에 맡겨서라도 날짜를 지키는 분들이다”라고 답했다. 이런 사연들이 모여서 이웃이 늘어갔다.”

-전시장에는 이웃들이 얼마나 올까?

“시장 상인들을 포함한 외부인들이 한 열명은 오지 않겠나 싶다. 무엇보다도 사진에 찍힌 분들이 이제 사진을 보고 싶어한다.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으니 전시장 가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은 찍었지만 전시 허락을 받기는 아주 어려웠다고 들었다.

“전시회를 못 열 뻔했다. 20년 동안 활동해온 송찬석 전도사가 ‘작품을 보고 판단하자’라고 중재해주셨다. 전시를 허락받기 위해 사진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마을 도성교회에서 장로님들을 모셔 놓고 틀었다. 그 자리에서 이야길 했다. ‘4살 때 여러분이 업어주었던 사람입니다. 40년 만에 다시 여러분 품으로 찾아들어왔습니다’ 장로님들의 반응이 좋았다. 사진의 내용에서 따뜻한 시선이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렵게 전시가 성사되었다. 1세대 한센인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후손들이다. 사진전을 계기로 2세대 3세대 한센인들에 대한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되길 바라고, 그게 나의 후속작업이 될 것이다.”

-특히 애정이 가는 사진이 있다면?

“한 어르신이 거울 앞에서 화장하는 모습이었다. 주일 예배 보러 가려고 아침 8시쯤 거울 없이 화장을 하시더라. 앞을 못 보시는 분이었다. 그래도 ‘여자니까’ 화장을 하는 것이었다. 소록도에서 결혼했다가 사별하고 혼자 남은 신영례 할머니로 올해 84살이다. 일제 강점기 때 소록도에서 일본군의 학살이 있었는데 신 할머니는 요즘도 매일 밤 그 총소리의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스럽게 주무신다고 들었다.”

-전시회 다음 계획은?

“88살 한 한센인 할머니가 평생 생이별 해야 했던 아들을 어렵사리 찾아 수십년간 모은 100만원을 쥐여주고는 ‘애미가 죽더라도 니는 오지마라’는 말만 남기고 오셨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찍은 사진에선 그 할머니의 가려진 삶을 볼 수 없어 민망했다. 앞으로 2, 3세대의 미래를 지켜볼 것이다. 죽을 때까지 한센인을 찍을 것이다. 이들을 찍으려면 사진 이전에 파트너 정신을 먼저 가져야 한다. 2, 3세대의 인권과 복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곽윤섭 기자

kwak1027@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