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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13 18:58 수정 : 2015.01.15 14:39

임인자 예술감독.

[짬] 광주비엔날레서 마당극 활용 전시 임인자 예술감독

“새로운 언어로 ‘광주’를 말하고 싶어요.” 새달 5일 개막하는 ‘2014광주비엔날레’에서 기존의 마당극과 무대극의 자료를 활용한 전시작품으로 광주민중항쟁을 표현하는 임인자(38·사진) 예술감독은 ‘최연소 예술감독’의 타이틀을 갖고 있다. 4년 전 그는 변방연극제의 예술감독을 맡아 새바람을 일으켰다. 그가 기획하고 연출하는 연극은 기존의 관념을 파괴했다. 무대는 폐쇄된 공간을 벗어나 인파가 출렁이는 거리로 연장됐고 대학 자퇴생, 인권운동가 등 다양한 일반인이 배우로 등장했다. 지난달 14~27일 서울 광화문 일대와 명동 삼일로창고극장 등지에서 열렸던 변방연극제를 마무리한 임 감독은 쉴 틈도 없이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광주비엔날레 전시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11일 오전 광화문광장에서 만난 그는 세월호 유가족의 단식이 이어지고 있는 천막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광주항쟁 새로운 형식으로 부활
“헌혈 매춘부·음식 나른 아주머니…
시민공동체가 만든 위대한 산물”

고교때 도청 문화제 보며 예술 흡수
변방연극제 최연소 예술감독 이력
“이 시대의 많은 ‘벽’들 깨고 싶어”

그가 이번 광주비엔날레에서 전시할 <비영웅의 극장>(가제)은 광주항쟁을 새로운 형식으로 부활시키려는 시도다. 1980년 5월 ‘광주’를 세상에 알려낸 놀이패 신명과 극단 토박이의 사진, 대본, 인물 등 아카이브를 동원해, 사회운동과 문화적 재현의 상관관계를 새롭게 해석한다. 당시의 신문기사와 홍보물 등 시대적 자료들도 다양하게 활용한다.

사실 그는 80년 5월 광주를 직접 겪지 않은 세대다.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네살 아이였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비 오는 날의 최루탄 냄새, 휴교로 닫힌 교문, 깨진 보도블록 사이로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궁금함을 키웠다. 초등학생 때 이사를 가면서 정착한 광주는 그에게 현실의식과 예술적 감성을 키워주기 충분했다. 중학교 때 교문 옆에 붙어 있던 포스터 한 장, 저수지에 떠오른 이철규 열사의 처참한 주검 모습은 어린 그에게 “왜 저렇게 비참하게 죽어가야 했을까?”라는 의문을 던져줬다. 고교 시절엔 해마다 열리는 전남도청 앞 금남로의 오월문화제를 보며 다양한 예술을 흡수할 수 있었다. “금남로 분수대를 중심으로 열리는 연극제와 사진전, 민중미술전은 언제나 나를 흥분시켰어요.”

교대에 입학한 그는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 배우가 됐다. 김지하 원작의 <금관의 예수>에 창녀로 출연했던 그는 곧 자퇴하고, 다시 중앙대 연극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연기가 아니라 연출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그는 젊은 연출가의 감각으로 과거의 사건을 오늘에 재현하고 싶어한다. “과거의 사건은 반드시 현재와 연결돼 있어요. 그래서 과거를 꺼내보면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각성’시키기 마련이죠.”

그가 생각하는 광주항쟁은 몇몇 시대적 영웅의 성과물이 아니다. 광주 시민공동체가 만들어냈기에 더 위대한 산물이다. “80년 ‘광주’는 헌혈을 한 매춘부, 음식을 날라준 시장통 아주머니 등 광주의 모든 시민이 주역이었습니다. 지난해 12월부터 자료를 모았어요. 지금까지 주목되지 않았던 인물들의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과거를 그대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새로운 언어로 표현할 것입니다.”

이번 작품은 일본인 작가 아라카와 에이(37)와 공동 연출한다. 그는 미국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는 시각예술가로, 지역의 이야기를 독특한 행위예술로 풀어낸다. 지난해 뉴욕에서 연극을 보러 갔다가 객석에서 기획자에게 질문하는 임 감독을 보고 즉석에서 협업을 제의했다고 한다.

임 감독은 “우리 시대는 풍요 속에서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이루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이면에 배제되고 희생되었던 삶과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 세대는 한국전쟁과 독재를 거쳐 광주와 그 이후의 민주화 과정까지 조부모·부모 세대에 빚을 지고 있어요. 저와 나이가 같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던 이들이 있어요. 지금 우리는 용산, 강정, 밀양, 해고노동자 등 수많은 그들과 ‘세월호’를 직접 목격하고 있습니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모임의 간사도 맡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이 대목에 이르러 한층 비장해졌다.

“이 모든 것을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삶의 밑바탕에 깔려 압사당하고 있는 이웃들을 회피하지 말고 응시해야 합니다. 동시대적 사건에 대해 예민하게 감각하는 것은 시민으로서의 책무이자 동시대 예술가의 책무이죠. 권력과 자본에 억눌린 삶들을 돌아보는 일이 결국 변방의 목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예술은 끊임없이 대중에게 질문을 던져줘야 한다고 믿는다. “왜 이런 일이 있어났는지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게 만들고 싶어요.”

그는 또 이 시대에 존재하는 많은 ‘벽’을 깨고 싶어한다. “예술은 물과 같아요. 예술은 사회에 경계지어진 수많은 벽과 경계 사이를 침투하고 바꾸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요. 예술의 책무는 그 자체로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것, 다르게 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쓸모없는 것들을 감각하는 것, 그리고 질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쓸모없어도, 병들었어도, 아름답지 않아도, 돈이 없어도 괜찮은 세상을 꿈꾸고 있어요.”

젊은 연출가의 꿈이 아름답다.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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