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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20 20:36 수정 : 2015.01.15 14:38

임영웅 산울림극단 대표

[짬] ‘한국 연극계 소극장 운동 대부’ 임영웅 산울림극단 대표

임 대표는 ‘한국 연극계의 대부’, ‘소극장 운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산울림 소극장’을 만든 이후 사무엘 베케트 희곡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40여년째 올리고 있다. 80~90년대에는 <위기의 여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 등을 통해 여성의 삶을 집중조명해 여성연극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연출 60년’을 맞아 ‘임영웅 사단’이 헌정 연극을 올린다. 임 감독을 중심으로 박명성 신시컴퍼니 예술감독, 손숙·한명구 등이 모두 모였다. 작품은 잉마르 베리만 원작의 <가을소나타>로, 이달 22일부터 새달 6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무대에 오른다.

지휘자의 꿈을 접은 그에게 연극은 우연히 찾아왔다. 48년 휘문중 1학년 때 국어교사가 <얄개전>을 쓴 조흔파였다. 휘문중 개교 50돌을 맞아 명동 국립극장에서 유치진 원작의 연극 <마의태자>를 올렸다. 국어 성적이 좋았던 그는 조흔파의 손에 이끌려 신라 대신들 중 한 명으로 출연했다. 만 12살의 까까머리 중 1년생이 국립극장 무대에 선 것이다.

참 겁도 없었다. 부산 피란 시절엔 휘문 출신 백두진 재무장관을 찾아가 “연극 올리는 데 필요하니 100만원을 내놓으시오”라고 했다. 그렇게 모은 후원금으로 막스 프리쉬 원작의 연극 <전쟁이 끝났을 때>를 올렸다. 이번엔 주연배우으로 등장했다.

고3 때 운명처럼 동랑 유치진을 만났다. 동랑은 “자네, 연극을 공부할 생각 없나”라고 물었다. 그는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만 했다. 이듬해 또다시 동랑을 만난다. 서라벌예대 1학년 때 연출을 맡았던 휘문고의 연극 <사육신>을 그가 본 것이다. 동랑은 “자네, 이제 정말 연극 공부를 하게”라고 권했다. 그제야 “아, 하느님 같은 선생님이 저리 말씀하시니까 정말 연극을 해야겠구나”라고 마음먹었다. 바로 60년 연출 인생의 시작이었다.

재즈 클라리넷 대가였던 아버지 등
집안 음악가 넘친다며 말렸지만
결국 예술의 끼는 막지 못해

연극만으로 밥벌이 힘들어
신문기자·방송사 PD 겸업하기도
‘고도를 기다리며’ 45년째 올려
“음악은 연출에도 큰 보탬 돼”
‘연출60돌’ 헌정 ‘가을소나타’ 무대에

68년 극작가 오태석의 공모 당선작이자 데뷔작 <환절기>를 연출했다. 그때부터 극작가 데뷔작 전문 연출가로 통했다. 국립극단 연출을 하면서도 거의 창작극만 했다. “오태석, 정하연, 노경식, 전진호 같은 친구들이 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극작가가 됐죠.”

연극을 좋아했지만 연극만으로 밥을 먹기 힘들었다. 그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와 방송국에서 드라마 피디로 일했다. 밥과 꿈. 그는 직업과 예술을 힘겹게 병행해야 했다.

그는 69년 산울림 소극장을 만들고 베케트의 국내 초연작 <고도를 기다리며>를 올렸다. 당시 번역본은 아내인 오증자 서울여대 불문과 교수의 것이 아니라, 정명환 서울대 교수 것이었다. 그런데 연습 중에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부조리극이라 책은 어려운데, 연극이 올라간다니까 공연 일주일 전에 표가 동났어요.” 닷새 잡았던 연극은 연장공연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모두 18회나 앙코르 공연을 했다. 당시 산울림의 창단멤버는 김성옥, 김무생, 김용림, 손숙, 최선자, 사미자씨 등이다.

임영웅 연출 인생의 열쇳말로는 ‘고도’ 말고도 ‘여성’이 있다. 산울림 소극장은 여성의 삶을 조명하는 연극의 메카였다. <위기의 여자>를 시작으로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등이 줄줄이 여성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이번에 올리는 <가을소나타>도 여성 이야기다. 이 작품은 성취욕 강한 피아니스트 어머니(손숙)와 애정결핍증에 시달리는 큰딸(서은경)의 갈등을 통해 현대인의 단절과 화해를 다룬다. “엄마와 딸이라는 두 세대를 아우르는 여성의 삶을 다루지요. 동시대 여성의 삶과 앞 세대 여성의 삶을 함께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성연극 연출가’ 꼬리표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남자가 주인공이면 남성연극인가요? 나는 여성이 아니라 인간을 그린 겁니다.”

음악가의 꿈은 접었지만, 그의 곁엔 늘 음악이 있다. 요즘도 종종 명동의 음반가게 ‘클림트’를 찾는다. “바흐에서 비틀스까지, 클래식에서 재즈와 팝까지 거의 다 듣는 편입니다.” 음악은 연출에도 큰 보탬이 됐다. 그는 66년 국내 첫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에 이어 <꽃님이 꽃님이>, <대춘향전>까지 뮤지컬 세 편을 연달아 연출했다.

팔순을 앞둔 현역 연출가의 눈동자엔 지난 세월이 화살처럼 스쳐갔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음악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예술을 말리진 못한 겁니다. 조흔파, 유치진 같은 좋은 분들을 만나서 그리됐지요. 참 고맙습니다, 관객한테도 같이 작업한 사람들한테도. 좋아하는 연극 연출을 60년 할 수 있었다는 건 정말 행운입니다.”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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