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디 출신 예술의전당 사장 고학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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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피디 출신 예술의전당 사장 고학찬
지상파 외면 가곡·동요 살리려
무료 가곡무대·동요콘서트 열어
박제화된 서예박물관 개조도
“180여개 문예회관 활성화 고민” 그는 우선 ‘고급 문화 예술의 저변 확대’를 꿈꾼다고 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영상화였다. “국립오페라단이 10억~15억원의 예산을 들여 무대에 올린 발레는 3일간 고작 5천여명이 비싼 입장료를 내고 보고 맙니다. 그냥 사라져 버립니다. 그들만의 문화입니다. 그래서 카메라 14대를 동원해 다양한 각도에서 공연을 영상에 담았습니다. 오페라하우스 객석에서 보면 한정된 각도에서만 감상할 수 있지만 영상은 입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발레리나의 절묘한 발동작에서부터 무대 뒤 땀 흘리며 긴장하는 모습까지….” 그렇게 만든 영상물은 경기도 연천군부터 제주도 서귀포의 문예회관까지 전국을 돌며 발레를 소개했다. 한번도 발레를 접하지 못한 농부나 어부, 전방의 직업군인 등 1만여명이 발레를 즐길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그는 ‘잘나가는’ 피디였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던 1970년 당시 연극영화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지상파(공중파) 방송사 공채에 합격해 <동양방송>(TBC) 피디가 된 그는 생소한 에스에프(SF·공상과학) 어린이 드라마 <손오공>으로 지금의 <뽀로로>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코미디 프로 <좋았군 좋았어>에서는 ‘국내 최초’로 동물을 출연시켰다. 개의 눈에 비친 인간사를 코믹하게 풀어낸 ‘말하는 개 브리카’였다. 아나운서 황인용씨가 진행하고 배우로 데뷔하기 전 장미희씨가 보조진행자를 맡아 노인들을 대상으로 만든 <장수만세>는 그 시절의 ‘국민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소수가 보고 즐기는 클래식 예술을 대중과 친숙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그는 이제는 공중파 프로에서 사라진 가곡과 동요 살리기에도 나섰다. “가곡은 대중가요와 클래식의 중간입니다. 국민의 정서가 스며 있는 가곡은 모두를 웃기고 울립니다. 그래서 무료 가곡 무대를 예술의전당에서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8월 한달 매주 토요일 저녁 5차례의 무료 가곡 무대를 열어 1만여명이 예술의전당을 다녀갔다. 아이돌의 노래와 댄스에 중독된 어린이들에게도 동요를 심어주고 싶다. 그래서 올 들어 세차례 ‘부모와 함께 부르는 동요 콘서트’를 무료로 열었다. 예술의전당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서예박물관’도 ‘확’ 뜯어고치고 있다. 27년 된 서예박물관은 거의 박제화된 공간이었다. 서예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며 ‘메카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서예와 관련없는 예술단체의 사무실이 주로 입주해 있다. “서예는 조선시대까지 모든 지식인들의 필수 문화활동이었어요. 서예를 부흥시키면 국민 정서에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100억여원의 예산을 확보해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제주가 고향인 그는 어린 시절 제주로 유배 온 추사 김정희의 전설을 듣고 자랐던 기억도 있다. “추사가 제자들을 모아놓고 세숫대야 속의 물 위에 붓을 세워서 글씨를 쓰니 검은 글씨가 흩어지지 않았대요. 그만큼 정성과 기를 모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뜻이죠.” 그는 색깔 있는 먹으로 서예를 하거나 영어와 히브리어 등 외국어를 붓으로 써서 세계화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기발한 아이디어는 팔팔히 살아 있다. 전국 180여개의 문예회관이 ‘죽어 있는 현실’도 그의 과제다. “거액을 들여 만든 문예회관의 가동률이 30%도 안 됩니다. 무대에 올릴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죠. 지역 주민이 참가하는 축제를 만들어 그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보기만 하는 문화활동에서 내가 직접 해보는 문화운동으로 바꿔나가자는 것이다. 젊은 예술가들을 ‘문화운동 지도자’로 육성해 파견하면 청년 취업률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기반을 만들고 싶어한다. 외국 관광객들이 한국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고급 오페라도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리고 싶다. 고 사장은 24일 예술의전당 야외무대에서 열린 가곡의 밤에서 얼음물을 뒤집어썼다. 그러곤 자신의 대학 동창이기도 한 탤런트 노주현씨 등을 다음 ‘아이스버킷 챌린지’ 참여자로 지목했다. 얼음물에 젖은 흰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환하게 웃는다. “문화는 흘러가는 강물이어야 합니다. 고여 있으면 썩기 마련이죠.”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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