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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06 19:23 수정 : 2015.01.15 14:27

작가 김성동(67) 씨는 6일 4년 만에 나온 신작 <염불처럼 서러워서>(작은숲 펴냄)를 “진혼곡”이라고 했다.

[짬] 신작 역사소설 ‘염불처럼…’ 발표 김성동 작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들 한다. 승자들이 꾸려 가는 역사가 바로 오늘 이 현실인 것이라면, 역사의 패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후손들은 잘못된 역사를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적어도 역사에서 밀려난 우리 할아버지들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이 어떤 세상이었던지는 알아야 한다. 그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고자 어떻게 움직이다가 어떻게 그리고 왜 쓰러지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의 진실만큼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자손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10년째 93살 노모와 함께 살고 있는 경기 양평군 청운면 벚고갯길 마을에서 바랑이 같은 가방하나 달랑 메고 서울 공덕동 나들이를 한 작가 김성동(67·사진)씨는 6일 4년 만에 나온 신작 <염불처럼 서러워서>(작은숲 펴냄)를 “진혼곡”이라고 했다.

고려 궁예부터 동학 서장옥까지
‘역사의 패자’ 한맺힌 이야기 담아
“역사의 진실 알아야 자손의 도리”
아버지는 6·25때 ‘좌익’몰려 학살
어머니는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
자신도 ‘연좌제’ 피해 승려생활도

2010년 12월에 낸 전작 <현대사 아리랑-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녹색평론사 펴냄)에서 그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가 남북 모두로부터 배신당하고 잊혀져 간 ‘패자’ 50여명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이번 책은 “위무요 천도재, 그리고 눈물어린 기억의 싸움”이라 했던 그 패자들의 “뿌리, 그들보다 앞선 이들의 기막힌 이야기”라고 했다. 궁예에서부터 묘청과 신돈, 15세기 중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반대해 난을 일으켜 황제라 칭했던(칭제건원) 이징옥, “진짜 녹두장군”이라고 부르는 동학농민전쟁 전략가 김개남, “남돌석(신돌석) 북백선이라 일컬었다”는 의병장 김백선, 최시형으로부터 법통을 물려받은 동학 남접 우두머리 일해선사 서장옥, 그리고 <탈출기>를 쓴 프롤레타리아 작가 최서해 등이 그들이다.

“궁예를 정사나 드라마에서 애꾸눈에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묘사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는 왕건의 쿠데타 뒤에도 3년을 버텼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포천·파주·철원·안성 일대에 성까지 쌓을 정도였다. 그가 무너진 것은 아마도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원칙으로 삼은 경제정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왕건을 비롯한 ‘호족 4인방’과 유산자들, 말하자면 기득권세력이 연합해 궁예를 몰아냈다. 그를 괴짜로 묘사하는 건 승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찬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얘기다. 울음바위에 가면 궁예가 앉았던 ‘궁예바위’가 있다. 거기서 버티던 그는 기운 대세를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삶을 마감(자진)했다.” 조선을 세운 자들이 신돈이나 공민왕을 괴짜로 몬 것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김개남의 손자뻘 되는 할아버지한테서 직접 들은 얘긴데, 김개남이 잡혀갈 때 사람들이 구름같이 뒤따르면서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하는 노래를 불렀단다. 그래서 원래 서울로 압송하려던 관군이 무서워서 그를 부랴부랴 전주성 남문 밖에서 즉결 처형했다. 그런데 학자라는 이들이, 그 할아버지와 동학에 직접 참여한 했던 사람들이 살아 있는데도 단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았단다. 그들의 말을 들으려 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연배들은 1960년대까지는 동학전쟁에 직접 가담했던 분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쓴 이야기는 슬프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이야기든 노래든 모름지기 다 슬퍼야 한다고. 슬프지 않은 이야기나 노래는 다 가짜라고.” 한맺힌 이야기들이니 슬플 수밖에.

그가 허물없는 글동네 사람들한테 우스개 소리로 하는 말 중에 “우리 집에서는 위원장이 다섯 명 나왔다”는 게 있다. “할아버지는 토지분배 위원장, 큰삼촌은 조선민주청년동맹 위원장, 어머니는 조선민주여성동맹 위원장을 하셨는데, 아버지는 공식적인 직함은 없었다. 굳이 직함이라면 전국농민조합총동맹 충남지부 대변인을 잠시 하셨다.” 그리고 그 자신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설분과위원장이었다. 아버지는 이승만의 단정수립 직후인 48년 가을 예비검속 당했다가 50년 7월께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던 수천명(그는 8천명이라고 했다)의 ‘좌익사범’들과 함께 학살당했다. 할아버지, 큰삼촌도 그렇게 비명에 갔다.

“지금도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이야기를 써서 ‘방불하다’거나 ‘슬프구나’하는 칭찬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원래 글 쓸 생각이 없었다. 그보다는 아버지 등 당대 지식인들이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선대의 좌절은 그의 대에서도 되풀이됐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 지독한 연좌제 때문이었다. 불교에 몸 담았을 때 그가 ‘참선’이나 하고 앉아 있을 위인이 아니라는 걸 알아본 스승 지효 스님이 그를 일본 유학이라도 보내려고 애썼으나 그마저 신원조회에서 걸려 좌절당했다. “그때 마음을 정리하고 쓴 게 <만다라>였다.”

창작집 3권과 <만다라> 등 장편 5권, 산문집까지 10여권의 책을 냈다. 그 중에서 가장 아끼는 책은 “10여 년 전에 쓴 장편 <꿈>”이라고 했다. 3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질 뻔했는데 그 뒤로 담배를 끊고 “연일장취”하던 술도 줄여 이젠 조금밖에 못한다고 했다. 그래선지 오히려 얼굴은 좋아보였다.

그는 희생당한 선대들의 바람은 “뒤집힌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었다면서 자신의 글작업 역시 “뒤집힌 세상을 바로 보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세월호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사건 같은가? 아니다. 친일을 거쳐 친미까지 뒤집힌 세상이 4~5대에 걸쳐 계속되고 있고 그게 뿌리다.”

절에 있을 때 그의 이름은 ‘묘돈’이었다. 묘청과 신돈이다. “이런 작업도 갑자기 시작한 것 아니다. 일종의 영구혁명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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