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부부 함께 회고록·서한집 펴낸 이해동 원로목사
70·80년대 반독재 투쟁사 고스란히
김대중 사건 때 옥중서한 190여통
그뒤 영국·독일 망명서한 180여통
민주화운동 동지들 100여명 망라 서한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김대중 일가, 문익환 일가, 이우정, 박형규·조정하, 이문영·김석중, 예춘호·황치애, 유인호·김정완, 리영희·윤영자, 고은·이상화, 박영숙·안병무, 한승헌·김송자… 그리고 문병란, 이우재, 김상근, 박경서, 권호경, 도로티아 슈바이처, 손학규, 변형윤, 홍세화, 홍동근, 허병섭, 염무웅, 이호철, 송기인 등 100여명이나 된다. 서한집은 1년간의 영국 버밍엄 체류와 4년간의 독일 체류 등 83~88년 국외 체류 때 받은 181통을 정리한 제1부 ‘망명 서한’, 80~81년 ‘김대중 사건’으로 복역할 때 받은 190여통을 담은 제2부 ‘옥중서한’으로 모두 370여통이다. 특히 독일 한인교회 목회 시절 이 목사 부부의 거처는 유럽 가는 한국인들이 모이고 결혼식장으로도 애용한 ‘해동 여인숙’ ‘해동 호텔’이었다. 서한집 정리와 출간 작업을 도운 한홍구 교수는 “70~80년대 민주화운동 동지들이 대부분 망라된데다 폭압적 시대상과 그에 맞선 개개인의 심정도 담겨 마치 ‘인명사전’ 같은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80년 5월17일 중앙정보부 남산 지하실로 붙들려 갔다. 그들은 나를 발가벗기고 무차별 구타했다. 하도 맞아 사흘간 엎드려 지내야 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정말 괴로웠던 건 불러주는 대로 받아적는 일이었다. 내란 모의 사실 자체가 완전 날조였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내 진술의 책임을 내가 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로지 ‘김대중 죽이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 목사는 59일 만에 남산을 벗어나 4년 징역형을 받았다. “군산교도소로 갔다. 사동 하나를 몽땅 비우고, 나와 교도관, 단둘만 그 사동에 배치했다. 81년 3월이던가 전두환 대통령 취임사를 스피커로 생중계했다. 그때 그가 ‘3대 해방’인가를 얘기했는데 빈곤, 전쟁 공포,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정말 코미디였다.” 5개월간의 군산교도소 수감 시절 아내는 “하루도 빼지 않고” 그에게 엽서를 보냈다. 해남으로 귀양을 간 인평대군 후손 집안으로 ‘참판댁’ 출신인 그는 한신대를 나와 61년 인천에서 기독교장로회 첫 개척교회를 연 뒤 2002년 6월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40여년 교역자로 목회 활동을 했다. 인천 7년 활동에 이어 문익환 목사의 서울 한빛교회로 옮겨 15년간 일했다. 71년 박정희-김대중 대선과 이듬해 유신헌법 선포 등 격랑의 시절 한빛교회 이 목사에겐 연행과 조사, 출입금지, 경찰서 유치장살이, 가택연금이 다반사였다. 사실 그의 가족은 6·25 때 양반집안이라는 이유로 좌익들로부터 큰 고초를 당했다. 어린 시절 내내 그 기억 때문에 좌익에 적개심을 품고 있던 그는, 목회자가 돼 이 땅의 역사에 눈을 뜨고서야 거기서 벗어났다. “남북이든 좌우든 주민들은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정치적 세뇌 때문에 그 모진 비극이 일어났다. 남북문제에 관한 한 누가 옳고 그르다는 식의 시비를 가려서는 절대 안 된다. 남북이 정말 소통하고 화해하려면 민족적 회개부터 해야 한다. 교회가 앞장서야 하는데 더 엉망이다.” 이 목사는 특히 “언론도 다 죽어버렸다. 유신 때는 폭압과 강압 때문에 보도는 제대로 못했지만 기자들이 기개는 살아 있었다”며 “지금 주류 언론이 지키려는 보수는 극악한 보수”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시절을 동경하고 모델로 여기면서 그것을 되살리는 걸 소명으로 여기는 듯한데, 그건 정말 잘못하는 거다. (그런 퇴행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고 터져 나온다. 유신 때처럼. 그건 그 개인뿐 아니라 한국인, 한국이라는 나라에도 불행한 일이다.” 그는 “지금 상황이 아주 좋지 않다”고 했다. “거의 절망적이다. 몹시 걱정스럽다. 민심이 다 죽어 있는 것 같지만 민심이란 한번 요동치면 순식간에 바뀐다. 밟히고 시들어가다 비 한번 오면 벌떡 일어서는 잡초와 같다. 민심은 거짓에 얼마 동안은 속지만 절대 끝까지 속진 않는다. 지금 상황은 8·15, 6·25 때로 되돌아간 것 같다. 그때는 공산당(빨갱이)으로 몰리면 끝장이었는데, 요즘도 종북으로 몰고 있지 않느냐. 게다가 세월호 농성장인 광화문 한복판에 서북청년단이라니,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고나 하는 짓인가.” 은퇴 뒤에도 그는 일손을 놓지 못했다. 2008년까지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일을 했고, 지금도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와 청암(송건호)언론문화재단, 김대중의 정신과 철학을 기리는 ‘행동하는 양심’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승동 선임기자 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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