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조소프라노 김청자.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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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아프리카 사랑’ 자전에세이 펴낸 성악가 김청자씨
고아공동체에서 5년째 교육봉사
제자들로 꾸린 밴드와 함께 귀국 공연 간호조무사로 건너간 독일서 꿈 이뤄
70년대 한국인 첫 오페라 가수 활약 지난 22일부터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아프리카 말라위의 ‘루수빌로(희망) 밴드’가 재즈와 클래식, 팝과 춤이 어울린 공연을 펼치고 있다. 11명의 뮤지션은 바로 김씨가 5년 전 말라위에 세운 음악학원에서 악기를 익힌 제자들이다. 2010년 정년퇴임하자마자 살던 집을 팔아 마련한 2억원으로 ‘김청자 아프리카 사랑후원회’를 꾸리고 혈혈단신 말라위로 날아가 고아들을 돌보며 예술을 가르치고 있는 그의 피와 땀, 정성을 한눈에 보여주는 무대인 셈이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저주받았다고 여기며 살았어요. 아무런 희망과 꿈도 없이 에이즈와 가난에 시달리며 내일을 포기했어요.” 말라위는 아프리카 남동부에 위치한, 세계에서 10번째로 가난한 나라다. 한때 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중심지로 인구 1400만명 가운데 100만명이 에이즈 환자일 만큼 ‘버려진 땅’이다. 평균 수명이 40살로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왜 하필 그런 곳에 그는 터를 잡았을까? 김씨의 지난 삶은 화려했다. 고교 졸업 뒤 가난으로 대학을 포기한 그는 독일에 간호조무사로 건너갔다. 어릴 때부터 가슴 깊이 간직했던 성악가의 꿈을 입버릇처럼 얘기했던 그는 돌보던 병원 특실 환자들의 도움으로 기적 같은 기회를 얻었다. 5개월 만에 간호복을 벗고 ‘아우크스부르크 레오폴트 모차르트 음악원’에 입학한 것이다. 그는 졸업 2년 만에 한국인 최초로 유럽 오페라 무대에 섰다. 창(판소리)을 잘 뽑으시던 할아버지의 유전자가 빛을 발한 덕분이었다. 오스트리아 빈 음악대학을 졸업한 뒤 독일 카를스루에 국립오페라단원 생활을 비롯해 스위스·이탈리아·스페인 등에서 16년간 활약했고 뒤셀도르프 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로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1994년 한국 대표 메조소프라노의 명성을 안고 귀국한 김씨는 중앙대·연세대·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꼬박 16년간 후학들을 가르쳤다. 그사이 두번의 국제결혼을 했던 그는 아들 하나를 뒀다. “말라위로 갈 때 컨테이너 가득 드럼과 색소폰 등 각종 악기를 싣고 갔어요. 5월부터 11월까지 건기 때는 섭씨 50도까지 올라가는 무더위에 시달렸어요. 우기에는 엄청난 비가 쏟아져요. 주변에 한국인은 한명도 없어요. 너무도 고독했어요.” 김씨는 낯선 이국땅에서 마주친 ‘인간적인 고독’을 고아들을 돌보는 루수빌로 공동체에서 교육과 봉사로 극복했다.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음악학원을 지었어요. 말라위 최초의 음악학원입니다. 전국에서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찾아와요.” 2012년에는 그의 제자들이 말라위 전국 음악 콩쿠르 대회에 나가 1등을 차지했다. 그래서 이번 한국 공연을 기획했고 마침내 이루었다. 아이들은 모두 김씨를 ‘마마’, ‘마미’라고 부른다. 한국말을 배워 ‘엄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처음에는 지각하기 일쑤였고, 열심히 하지 않는 아이들도 많았어요. 속으로 ‘한국에선 나 같은 대가에게 레슨을 받으려면…’이라는 말이 뱅뱅 돌았지만 참고 참았죠.” 그는 음악뿐 아니라 미술도 가르친다. 주말엔 체육선생을 불러 축구를 가르치기도 한다. 우물을 파는 것도 현지인들에겐 엄청난 도움이다. “땅을 파서 나오는 흙탕물을 식수로 쓰더라고요. 그래서 우물을 파주기 시작했어요. 우물 한개를 파는 데 800만원에서 천만원 정도 들어요. 이미 13개의 우물을 곳곳에 파주었어요.” 김씨는 이번 한국 방문에 맞춰 <김청자의 아프리카 사랑>(바오로딸출판사)이라는 자서전도 내놨다. 11월15일에는 북콘서트도 연다. “사랑을 얻기 위해 달려온 길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완전하고도 영원한 사랑을 만났습니다.” 그가 찾은 영원한 사랑 이야기에 귀가 쏠린다.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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