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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27 19:08 수정 : 2015.01.15 14:20

‘한일관계 50년…’ 책 펴낸 조세영 교수

[짬] ‘한일관계 50년…’ 책 펴낸 조세영 교수

“한마디로 ‘태산명동에 서일필’이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는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식 조처다.”(<한겨레> 2012년 7월7일치 사설)

그해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문은 외교부(당시 외교통상부) 실무 국장의 책임을 물어 자리에서 내려오도록 만들었다. 여론은 ‘꼬리 자르기’라며 청와대와 정부를 비판했다. 그 국장은 1년 남짓 무보직 생활 끝에 지난해 9월 공직 생활 30년을 매듭짓고 옷을 벗었다. 그리고 다시 1년,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라는 책을 완성해 세상에 인사를 건넸다. 외교부 동북아국장으로 파문의 한가운데를 지나온 조세영(53·사진) 동서대 특임교수를 지난주 만났다.

“내년이 한-일 국교정상화 50돌입니다. 그 50년을 짚어본다 해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멀지 않은 과거사 문제가 여전히 논의중이라 학문적으로는 아직 시기가 이를 수도 있어요. 다만 실무를 했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있겠죠.”

2012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파문
동북아국장 자리 물러난 30년 외교통
“소신껏 반대하고 책임도 져야 맞다”

내년 한일 국교정상화 50돌 맞아
한일 회담 통역 등 “증인으로서 기록”
“쟁취한 민주화 자부심 지켰으면”

외교관은 대외관계사의 산증인이다.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각종 협상과 회의, 발표의 현장이 활동 무대이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옛이야기를 할 때면 무심결에 “제가 증인이니까”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그의 기록은 더욱 소중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일본 한편에선 한국 쪽의 과거사 사과 요구에 대해,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세기 유산을 청산하자고 하지 않았느냐’는 반발이 나온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의 통역을 맡은 조 교수의 기록을 보면, 그런 얘기를 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거기에 덧붙여 “양국 지도자의 성의있는 뒷받침”이 강조됐다. 한국에 돌아온 김 전 대통령은 일본 지도층의 ‘과거사 망언’ 등에 대해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일본 쪽도 “역사에 관한 잘못된 발언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 뒤 어느 쪽이 약속을 먼저 어겼는지는 분명하다.

국교정상화 이후 한-일 관계 50년을 정리하면서 그는 현 시기의 특징을 두 가지로 묘사했다. 첫째는 한-미-일 동맹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태도 변화다. “1960~70년대 한국은 분단 탓에 미국과 굳게 손을 잡고 냉전의 최전선에 있었고, 일본에 대해 ‘좀 제대로 하라’고 다그치는 위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일본은 후방에 있다 보니 한-미-일이 ‘스크럼’을 짜야 하는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낮았어요.” 오늘날 한-미-일 공조에 대해 한국이 일본보다 덜 집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국은 냉전 이후 특히 중국과 관계가 밀접해져 한-미뿐 아니라 한-중 관계도 신경쓸 수밖에 없게 됐지만, 일본은 중국을 더욱 견제하고 있다.

둘째는 출범 때부터 일본에 대해 ‘냉각 일로’를 걷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태도다. 조 교수는 민주화 이후 역대 정부의 대일본 정책이 “임기 초반 ‘허니문’에서 임기 후반 ‘냉탕’이 되는 일의 반복”이었다고 묘사했다. 예컨대, 초기엔 ‘황금기’를 구가하던 김대중 정부 때는 임기 중반 불거진 교과서 문제로 냉랭해졌고, ‘실용 외교’라며 격식도 따지지 않던 이명박 정부도 임기말 독도 방문으로 일본의 거센 반발을 샀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2년 동안 한-일 정상회담도, 외교 장관 상호 방문도 하지 않을 정도로 싸늘하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한-일 관계의 새로운 현상”이라고 조 교수는 평가했다.

최근 관계 악화의 한 단면인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 기소에 대해, 그는 “자존심 상하고 안타깝다”고 했다. “일본 사람들에게, 당신들과는 달리 우리는 시민의 손으로 민주화를 쟁취했다는 걸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었어요. 친구들이 한창 시위를 하던 84년에 외교관이 되어 ‘체제’ 속으로 들어왔을 때, 저도 고민과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외교는 돌아가야 한다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정당화했어요. 그 모든 게 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깨끗이 사라졌어요. 굉장히 뿌듯했죠.” 그는 “산케이 지국장 기소 같은 일이 일선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부담이 돼선 안 된다”며 “어렵게 이룬 성과는 소중히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교부 안팎에선 현장을 떠난 그를 아쉬워하는 목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꼬리 자르기’에 대한 원망은 없는지 물었지만, 그는 단호했다.

“제가 누구한테 떠밀려 책임진 것도 아니고…. 중앙부처 국장이면 어떤 정책이건 소신을 가지고 해야 돼요. 소신에 안 맞으면 반대해야 하고, 또 잘 안되면 상응하는 책임도 지는 게 맞다고 봅니다.”

조 교수는 지난 1년 동서대 강의와 더불어 각종 언론의 인터뷰 및 기고 등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프리 앤드 인디펜던트”를 지향했다고 했다. 누구에 대해서도 자유롭고 독립적인 위치에서 평가하고 비판하겠다는 뜻이었다. “다만 저를 키워준 직장(외교부)엔 애정이 있고 동료·후배들의 애로사항도 너무 잘 알기에 무책임한 비판을 하진 않겠지만, 프리 앤드 인디펜던트는 관철시킬 겁니다.”

턱수염이 채 가리지 못한 소년 같은 발그레함과 맑은 눈이 돋보이는 그는, 가슴 뛰는 일을 만난 양 활기가 넘쳐 보였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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