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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1.04 19:16 수정 : 2015.01.11 17:51

녹색병원 기획실장인 박찬호 씨.

[짬]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사 번역 녹색병원 기획실장 박찬호씨

“좋은 의료행위란 싼값에 양질의 의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가는 적자를 면치 못해 문을 닫아야 한다. 녹색병원의 목표가 이익을 내는 게 아니지 않으냐는 문제제기도 있지만, 환자 중심이면서도 노동자와 시민·주민의 재산인 병원을 잘 가꾸고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지속가능한 경영, 맹목적 이윤추구가 아니라 병원 유지·발전을 위해 적절한 이익을 내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게 성가시니까, 좋은 의료만 제공하면 되지 않느냐는 쪽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건 망하는 길이다. 과학적이고 민주적으로 운영해서 잘 살려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녹색병원 기획실장 박찬호(52·사진)씨가 <차별없는 평등의료를 지향하며-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 50년의 역사>(건강미디어협동조합 펴냄)라는 600쪽 넘는 두꺼운 책을 번역해낸 이유다. 그는 이 책에서 그 해법의 실마리를 찾은 듯했다. 그러면서 “한겨레신문사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되물었다.

1953년 출범한 일본 최대 의료조직
회원 350만명 민주진료소 50년 지속
“저비용 고품질 의료-이윤 다 중요”

원진레이온 산재투쟁 산물 녹색병원
93년 재단 창립·99년 개원 때 참여
“폐업 공해설비 중국 거쳐 북송설”

녹색병원과 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민의련)는 2004년 상호 교류지원 협약을 맺었다. “일본 민의련의 전신은 1930년에 시작된 무산자 진료소 운동 조직이다. 당시 수입한 서양의학 수혜자가 주로 중류층 이상이어서 소외당한 노동자·농민·빈민들이 의사와 함께 조합 형태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천황제 아래서 탄압을 받아 일제 패망 직전까지 진료소는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패전 직후엔 미 군정의 ‘레드 퍼지’(좌익 추방)로 양심적인 의료인들도 모조리 축출당했다. 민의련은 거기에 저항하면서 민주 진료소들을 만들어 53년 새로 출범한 조직이다.”

민의련에서 자체 토론을 바탕으로 해서 2012년 출간한 이 책은 그 50년 역사를 자세하게 정리한 것이다. 민의련은 2011년 현재 일본 전역에 147개의 병원과 525개의 진료소, 322개 방문간호 스테이션을 두고 있고 8만여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의료조직으로는 일본 최대 규모다. 주민들이 기금을 모아 필요한 의료장비를 구입하고 병원 운영에도 직접 참여하는 ‘공동조직’이라는 게 있는데, 그 회원이 350만명이나 된다. 우리는 아직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침투해 우리를 갉아먹는 신자유주의 자본의 논리”로부터 민의련 의료기관을 지켜주는 게 주민들이고, “일하는 사람들의 소유, 일하는 사람들에 의한 경영, 일하는 사람을 위한 운영, 3가지 원칙” 아래 그들을 병원 운영에도 참여시키는 게 공동조직이란다. “의료생협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도 민의련 활동 경험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사무국장이라는 직책도 갖고 있다. 직업병 환자의 자활과 산업재해 관련 전문적 예방과 치료, 연구를 위해 1993년에 설립된 재단인데, 창립 회원인 그는 99년 녹색병원 개원 때부터 기획실장과 사무국장을 겸하고 있다. 350여 병상에 32개 진료과목과 전문센터를 보유한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과 100개가 못 되는 병상에 원진노동자건강센터가 있는 구리 원진녹색병원은 그 부설 병원이다.

‘원진’은 악명(?) 높던 바로 그 원진레이온이다. 일제강점기부터 갑부였던 화신그룹 총수 박흥식이 일본 동양레이온(도레이)의 중고기계를 들여와 66년 설립한 한국 유일의 비스코스 인조견사 생산업체였다. 비스코스는 알칼리 섬유소에 이황화탄소를 반응시켜 얻은 끈끈한 크산토젠산염을 물이나 묽은 수산화나트륨에 녹인 화학제품인데, 이를 가늘게 뽑아 합성섬유(인조견사)를 만들었다. 안전설비 미비로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신경독가스 원료로 쓰이는 이황화탄소·황화수소 가스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팔다리 마비와 언어장애, 기억력 감퇴, 정신이상, 성 불능, 콩팥 기능장애 등의 직업병으로 고생했다. 그러다 77년 입사해 7년간 일하고 퇴사한 김봉환씨가 90년 이황화탄소 중독 판정을 받고 산재요양신청을 냈으나 거부당한 뒤 91년 직업병 증세인 정신분열로 숨지면서 사회문제로 드러났다. 원진직업병피해노동자협의회에서 직업병 인정과 업주 처벌을 요구했으나 회사와 노동부가 거부했고, 이에 노동자·시민단체·대학생들까지 가세해 137일간의 처절한 연대투쟁을 벌였다. 마침내 산재 인정을 받아낸 ‘김봉환 사건’ 등을 거쳐 원진레이온은 93년 결국 폐업했다.

“그때 정부가 회사 부지를 건설회사에 팔아 보상비로 360억원을 출연했는데, 그것을 관리하는 게 바로 비영리 공익법인인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이다. 돈은 정부가 냈지만 재단에 정부 쪽 사람은 없다. 보상비 가운데 110억원으로 산재노동자를 위한 녹색병원을 세웠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반병원 의사들은 산재를 꾀병으로 여겼다.”

지금 약 900명의 산재환자들이 녹색병원 ‘특별관리’를 받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두 병원 이용자의 90%는 일반인들”이란다.

한신대 82학번으로 85년 노동부 수원지방사무소 점거 싸움에 참여했다가 1년간 ‘감방살이’도 했던 박씨는 90년에야 대학을 졸업하고 민중교회운동 전도사(안양 박달교회)이자 사당병원 산재상담자로 일했다. 그때 김봉환 사건에 가담하면서 원진과 인연을 맺었다.

그때 폐쇄된 원진레이온의 설비들은 중국으로 팔려갔다. “중국은 한국에서의 전례를 의식했던지 노동자들을 1년에 한 번씩 전원 교체하는 식으로 나름 대책을 강구했다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최근 그 설비가 다시 북한으로 갔다는 얘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글·사진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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