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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1.20 19:17 수정 : 2015.01.11 17:46

박경서·오영옥씨 부부.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짬] 독일 통일 관련 번역서 펴낸 박경서·오영옥씨 부부

‘동방정책’으로 독일 통일의 초석을 쌓은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1913~92)는 임종 순간 아들이 “아버지의 친구는 누구였습니까?”라고 묻자 “에곤”이라고 답했다. 브란트의 최측근 보좌관으로 ‘접근을 통한 변화’를 모토로 한 동방정책을 함께 입안하고 실행에 옮겼던 ‘친구’ 에곤 바(82)가 지난해에 출간한 <독일 통일의 주역,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다>(북로그컴퍼니 펴냄)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초대 인권대사를 지낸 사회학자 박경서(75) 박사와 독일근대사 전문인 오영옥(69) 전 교수 부부가 최근 이 책을 함께 번역해 냈다.

19일 <한겨레>를 찾아온 박 박사는 1993년 서울에서 에곤 바를 처음 만난 적이 있다며 그때 “통일은 초당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했던 그의 말을 떠올렸다. “남북통일만은 여야를 떠나 추진해야 한다. 임기 5년밖에 안 되는 대통령제하의 정권이 70년이나 된 분단과 통일 문제를 단독으로 정치적 이해를 앞세워 풀어갈 수 있겠는가.” 82~99년 18년간 제네바 주재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국장으로 일했던 박 박사는 당시 강원룡 목사의 크리스찬아카데미가 주최한 ‘독일 분단 극복의 교훈’ 주제의 학술회의에서 에곤 바를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눴다.

빌리 브란트 총리의 ‘절친’ 에곤 바
비서실장이자 동방정책 설계자 활약
브란트·슈미트·콜 등 정파 초월 기용

독일 장학금으로 부부 나란히 유학
18년간 세계교회협의회 아시아국장
남편 박 박사 초대 인권대사로 활동

“브란트가 퇴진한 뒤 나(에곤 바)는 총리가 된 헬무트 슈미트에게 크렘린(크레믈)과 채널을 갖고 있다는 것과 그 성격에 대한 정보를 알렸다. 슈미트는 내게 자신을 위해 임무를 맡아주고 베를린에서도 특사 노릇을 계속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뒤 나는 슈미트나 브란트에게 묻지 않고 후임자 헬무트 콜에게도 채널의 존재를 알렸다. 하룻밤을 생각한 뒤 콜은 내게 전화로 계속 일을 하라고 허가했다.”

사민당의 브란트가 74년 집권 5년 만에 물러났을 때 그의 뒤를 이은 같은 당의 슈미트는 물론 통독 당시 기민당의 콜 총리도 사민당 동방정책 핵심인물인 에곤 바를 계속 통독 관련 요직에 기용했다. 박 박사는 “바로 그런 점이 우리와 다른 정치문화”라며, 강대국에 의해 분단을 당한 독일이 45년 만에 독자적으로 재결합을 이룬 힘이자, 한반도는 냉전이 사라졌는데도 여전히 갈라진 채로 남아 있는 이유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브란트는 폴란드 유대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2차 대전 패전 뒤 폴란드에 강제할양된 땅에 대한 ‘수복 포기’(오데르-나이세강 국경선 인정)도 선언했다. 이 때문에 브란트가 의회의 불신임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한 것은 당명을 거역하고 브란트 통일정책을 지지한 야당 기민당 소속 젊은 의원 12명이었다. 박 박사는 “그 12명 중에 훗날 대통령이 되는 바이츠제커와 콜 총리도 들어 있었다. 그 덕분에 17살이던 30년 사민당에 입당해 나치 히틀러에 저항하다 노르웨이로 망명했던 브란트는 말하자면 ‘좌파 운동권’ 출신이었고, 신통찮은 학벌에 사생아 출신이라는 ‘약점’이 많았으나 독일 통일의 실질적 주역이 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에곤 바는 책에서 이런 얘기도 했다. “나는 미하엘 콜(에곤 바의 동독 쪽 협상 상대)과 함께 독일 연방군과 동독 군대 간의 냉전을 중지하자는 데도 합의했다. 72년 7월1일 이후로는 국경에 세운 확성기로 내보내는 군대 방송, 전단을 넣은 풍선기구는 -어떠한 문서상의 합의 없이도- 더는 없었다. 동서독 양쪽은 신뢰를 지켰다.” 71년 동·서독은 자유통행 협정을 맺었고 이듬해에는 교통왕래조약을 맺었다. 이것이 “전후 독일 역사에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그는 썼다. 지금 우리가 헤매고 있는 상호비방·전단살포 문제를 동·서독은 이미 40년 전에 해결한 것이다.

박 박사는 ‘남북 상호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꼽았다. “우리도 7·4 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 9·19와 2·13 합의, 6·15 공동선언, 10·4 합의 등 전환점이 될 만한 중요한 합의들을 했다. 문제는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북 쌍방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바이츠제커의 장학금 주선으로 동방정책 추진 당시 아내와 함께 독일에서 유학했던 박 박사는 그 뒤 서울대 교수, 크리스찬아카데미 부원장 등을 지냈고, 국가인권위원회 창설 멤버이자 상임위원으로도 일했다. 2년 전 이화여대 석과교수에서 물러난 그는 평화학연구소에서 남북통일에 관한 저술과 자문을 하면서 유엔 세계인권도시추진위원장 등도 맡고 있다.

“이번 번역 작업은 아내가 초역을 한 뒤 의문점들에 대해서 둘이 상의하고 토론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아내는 원래 유럽문화사 관련 번역을 많이 해왔는데, 둘이 함께 하기는 처음이다.” 유럽 근현대사와 문화 등을 강의해온 오 교수는 부록의 ‘빌리 브란트 약전’을 직접 쓰기도 했다.

“61년 베를린 장벽이 만들어진 뒤 83년까지 20여년간 서독은 동독인 3만3750명을 돈을 주고 데려왔다. 동독 쪽에 한 사람당 4만마르크도 주고 10만마르크도 주면서. 통행협정 체결 때도 서독은 동독에 ‘통과요금’ 명목으로 수억마르크 이상을 건네주었다. 이런 동서독 간 밀거래를 언론은 폭로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주었다. 만일 언론이 이를 까발렸다면 동방정책은 파탄났을 것이다.”

스페인 내전을 취재한 경험이 있는 브란트도 기자 출신이고 에곤 바도 베를린시장 시절 브란트의 비서를 맡기 전까지 기자로 일했다. 박 박사는 ‘북한 퍼주기’ 논란을 부추겼던 한국 언론들과는 차원이 달랐던 독일 언론인들의 성숙성을 높이 평가했다. 물밑거래를 주선하고 동독인 목회자들 월급까지 챙겨준 서독 개신교도 큰 기여를 했는데 지금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부친도 그런 목사의 한 명이었다. “예수도 ‘너희는 화해의 사도가 되어라’라고 했는데, 우리 교회는 거꾸로 간다. 참 슬픈 얘기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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