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미술연구소 이구열 소장. 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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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회고록 낸 한국근대미술연구소 이구열 소장
“거북이처럼 느긋하게 50여년간 미술만 보고 걸어온 삶이었죠. 미술책 읽고, 전시를 기록하고 평하고, 미술인들과 사귀는 것이 좋았습니다. 할 수 있는 재주가 그것밖에 없어서.” 미술판 사람들은 그를 ‘거북씨’ 혹은 ‘거북이 기자’라고 불렀다. 1960~70년대 국내 최초의 일간지 미술전문기자였던 이구열(82·사진·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씨는 “내 이름의 ‘거북 구(龜)’자에 어울리는 삶을 산 것 같다”며 웃었다. 한국 근현대미술사 연구의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받는 이씨가 최근 기자 시절 회고록인 <나의 미술기자 시절-한국 최초의 미술기자 이구열의 취재노트>(돌베개)를 펴냈다. 1959~73년 기자 시절에 접한 격동기 미술계 이면사와 취재기록을 담은 책이다. 그 소회와 뒷이야기를 듣고 싶어 서울 세종문화회관 뒤편 당주동 세종빌딩 6층 연구소로 찾아갔다. 그는 산더미처럼 쌓인 기사 스크랩과 화집, 자료들 속에서 정리에 골몰하고 있었다. 1958년 신조형파 전시평으로 데뷔국내 첫 미술기자로 60~70년대 기록
73년 `‘대한일보’ 폐간뒤 미술사 연구
‘한국문화재 수난사’는 전문 필독서 표현자유도 창작환경도 열악했던 시절
“미술인 삶은 암울했지만 기백은 넘쳐” 황해도 연백 출신의 실향민으로 원래 화가가 꿈이었던 이씨는 군 제대 뒤인 59년 입사한 <민국일보>를 시작으로 <경향신문> <서울신문> <대한일보>에서 미술전문기자로 필명을 날렸다. 73년 대한일보가 폐간되자 언론계를 떠난 뒤 75년 한국근대미술연구소를 세워 20세기 초·중반 근현대 화단 정립기의 주요 흐름과 사건들을 수십종의 학술 논문과 저술로 정리했다. 김은호·이상범·이중섭·박수근·김흥수 등 거장들의 작품 세계를 기획전, 평전 등을 통해 대중에게 알린 주역 또한 그다. ‘느릿느릿’ ‘꾸벅꾸벅’이란 그의 거북이식 표현대로, 도서관의 옛 신문 스크랩 등을 발품 들여 뒤지며 미술인 행적을 찾아 필사하고 정리한 수십년 공덕이 이룬 결실이었다. “일흔을 넘으니 주위에서 회고록으로 60~70년대 미술계 이면사를 쓰는 게 어떠냐고 권하더군요. 그냥 넘겨버렸는데 시간이 남아돌아 컴퓨터 워드로 자판을 치는 연습을 시작했어요. 옛적 내 기사와 그에 대한 회고글들을 독수리타법으로 정리하는 거죠. 기자 시절 체험담을 테마로, 기사 스크랩을 참고하면서 심심파적으로 썼지요. 재미있었어요. 그 시절 삶을 다시 사는 기분이랄까요. 취재 일화, 현장감 같은 게 선명하게 살아나더군요. 1년에 서너 꼭지씩, 10년 지나니 상당한 분량이 쌓였어요. 그게 책이 된 겁니다.” 그의 첫 기사는 민국일보 입사 전인 58년 8월 당시 <한국일보> 임방현 문화부장의 청탁을 받고 쓴 ‘신조형파 3회 회원 작품전’에 대한 단평이었다. “한국전쟁 중 입대해 7년 남짓 군 생활을 끝내고 <세계통신>에서 연감 편찬을 돕고 있었는데, 그 뒤 임 부장이 민국일보로 옮길 때 따라들어가 기자 생활이 시작됐죠.” 이 회고록에서 독자들은 4·19 혁명과 5·16 쿠데타를 겪은 격동기 미술계의 현장들을 두루 조망할 수 있다. 4·19 때 파괴된 서울 탑골공원의 이승만 동상 상반신을 거액에 사들여 집안 뜰에 몰래 숨긴 시민의 이야기를 보도한 사연과 촉망받던 조각가 차근호와 장기은의 잇따른 죽음을 몰고 온 혁명 위령탑 공모전 시비, 한국미술가협회와 대한미술협회의 비루한 암투, 유럽 전시 무대 진출을 위한 한국 작가들의 분투기 같은 비화들이 펼쳐진다. 가장 보람찬 기억으로 손꼽는, 국내 근대 양화의 개척자 김관호의 대표작 ‘해질녘’, 고희동의 ‘자화상’을 일본에서 발굴한 특종 취재담과 지금도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들의 필독서인 <한국문화재수난사>(96년 개정판, 원제는 <한국문화재비화>)를 70년대 초 일간지 연재물을 토대로 출간했던 뒷이야기들도 흥미롭다. “이번에 낸 책 표지가 암청색인데, 그 시절 미술인들은 정말 암울한 암청색 삶을 살았어요. 열악한 창작 환경이나 미술관 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권력에 짓눌려 자유롭게 표현하지도 못하고 내부 다툼으로 허송하는 사례가 많았지요. 눈병을 치료하지 못해 눈에 흰 거즈를 붙이고 반도화랑에 나타나 작품 팔리기만 고대하던 거장 박수근의 얼굴이 기억납니다. 지금 원로작가가 된 박서보씨는 61년 1월 프랑스 파리 국제전 출품 일정이 그해 10월로 연기된 줄도 모르고 현지로 떠났다가 품에 지닌 부인의 금가락지를 팔아 전시 때까지 버텼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작가들은 용기와 기백이 넘쳤어요.” “이제는 기력이 빠져 새 글은 못 쓰고 기존에 썼던 전시평, 칼럼과 75년 연구소 설립 뒤 운영과 활동상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그는 “자료들을 총정리해 ‘근대미술사 사전’을 내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제가 기자로 일할 땐 전시장을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보도할 거리들을 직접 찾았습니다. 지금 기자들 필력은 좋아졌지만, 미술 영역에 대한 자기의식과 사명감은 예전만 못한 것 같습니다. 화랑과 경매사의 홍보 전략에 쉽게 말려들어 왜 썼는지 의문이 드는 기사들도 보이고요. 아트 저널리스트 특유의 정체성과 비판의식을 항상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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