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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25 20:49 수정 : 2015.01.09 14:34

서울 방배동 이타미 준 건축자료관의 2층, 도쿄의 아틀리에에서 그대로 옮겨와 재현해놓은 부친의 책상 앞에 앉아있는 딸 유이화씨. 사진 김경애 기자

[짬] ITM유이화건축사무소 대표 유이화씨

그들 부녀는 참 특별한 사이였다. 재일 한국인이었던 건축가 아버지는 38살 늦은 나이에 고국에서 얻은 첫딸을 어디든 데리고 다니길 좋아했다. 건축 현장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아름다운 것, 맛있는 것, 멋있는 것을 두루 보여주고자 애썼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건축과 예술 세계를 들려줬다. 둘은 단짝 친구이자 말동무였다. 그런데 정작 딸이 대학을 졸업한 뒤 건축 유학을 가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가출하다시피 뉴욕으로 떠난 딸은 끝내 건축가로 성공해 돌아왔다. 그렇게 부녀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같은 길을 걷는 동반자가 됐다. 그러다 3년 전 아버지는 홀연히 세상을 떠났고 홀로 남은 딸은 후계자로서 생전의 유지를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고 있다.

‘한국의 혼을 지닌 일본 건축가’, ‘미술과 건축의 경계를 허문 예술가’, ‘현대와 동양 전통을 아우른 건축가’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던 재일동포 2세 유동룡(이타미 준·1937~2011)의 딸 유이화(41·아이티엠유이화건축사무소 대표)씨의 이야기다.

세계적 건축가 이타미 준의 맏딸
2010년 일본 최고 건축상 받은 부친
3주기 맞아 자료관·작품집 발간

어릴 때부터 따라다니며 ‘건축수업’
‘건축 유학’ 반대했지만 파트너 대접
‘제2고향’ 제주도에 기념관 지었으면

2010년 5월 외국인으로는 처음 일본 최고 권위의 ‘무라노 도고 상’을 받은 이타미 준은 ‘조센진 차별의 벽’을 무너뜨린 감격 속에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우다 쓰러져 이듬해 6월말 74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씨는 3주기를 맞은 최근 일본에 있던 선친의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와 ‘이타미 준 건축기념관’을 연 데 이어 40년 건축인생의 사상과 작품을 한데 모은 <돌과 바람의 조형 이타미 준-손의 흔적>(미세움 펴냄)을 엮어냈다. 워낙 화가의 재능도 뛰어나 그 자체로 작품인 이타미 준의 드로잉과 스케치를 비롯해 설계 구상이 담긴 메모, 건축과 예술에 대한 철학을 밝힌 에세이를 모은 것이다.

“제 이름을 ‘이화’로 지은 아버지 바람대로 92년 이화여대에 합격했을 때 누구보다 좋아하셨죠. 그땐 건축과가 없어서 실내환경디자인을 전공했어요. 그런데 막상 건축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는 반대가 심했어요. 혹독한 차별과 경쟁의 경험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하시면서요. 하지만 2001년 뉴욕에서 유학을 마치자 돌아와 자신의 일을 도우라고 부르셨어요. 그때 자못 비장했던 아버지의 전화 목소리는 지금도 제 가슴에 울리는 듯해요.”

지난 88년 한국에 이타미 준의 이름을 알린 서울 방배동의 아틀리에 ‘각인의 탑’을 아이티엠(ITM)유이화건축사무소로 바꾸고 부녀는 2002년부터 서울과 도쿄에서 파트너로서 수많은 작품을 함께 하며 꿈을 이뤄냈다. 2003년 프랑스 파리의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에서 개관 104년 만에 첫 개인 초청전으로 ‘이타미 준, 일본의 한국 건축가’ 전시회가 열렸을 때도, 2005년 부친이 프랑스 정부 예술훈장 슈발리에를 받는 영광의 순간도 지켜봤다.

“작품집의 제목 ‘손의 흔적’은 평소 아버지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던 건축철학이에요. 2004년에 나온 자전 에세이 <돌과 바람의 소리>에도 나와 있지만, ‘컴퓨터로 사유하는 오늘날 모든 게 오브제로 복제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럴수록 손으로 만드는 감각은 못 따라온다. 야성미·온기·감성 등등 건축은 새로운 세계의 창조 작업이니만큼 자연과 대립하면서도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요즘 대학에서 모형 제작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젊은 건축가들이 많아 우려스럽다는 그는 “건축은 기능이 아니라 손으로 흙에 생각과 감성을 불어넣어 빚는 달항아리처럼, 사람과 자연을 잇는 예술”이라 했던 부친의 말씀이 새삼 다가온다고 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타미 준의 대표작은 무라노 도고 상 수상작이기도 한 제주도 서귀포시 핀크스 비오토피아(현 에스케이핀크스)의 두손 미술관과 수·풍·석 미술관이다. 각각 물과 바람과 돌을 주제로 한 작은 체험형 미술관인 이곳은 제주 포도호텔과 더불어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명소로 꼽힌다. 주택단지 안에 있는 사설 공간이지만 날로 인기가 높아져 조만간 입장료를 받고 대중에게 제한적이나마 개방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포도호텔은 제주의 오름과 전통 초가의 모양새가 잘 녹아든 건물로 그가 가장 애착을 보인 곳이기도 하다.

건축사무소로 써온 각인의 탑 1·2층을 비워 마련한 이타미 준 건축자료관은 앞서 지난 1~7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 회고전을 통해 먼저 일반에 공개된 뒤 옮겨온 것이다. 도쿄 사무소와 하네기뮤지엄에 있던 그의 아카이브와 회화·서예·소품 등 500여점을 총망라한 회고전은 안팎의 호평 속에 세계 3대 디자인 상 중 하나인 독일의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2014’를 수상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쓰러지시기 전 <한겨레>(2010년 10월26일치)와 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밝히신 소원 가운데 몇가지를 올해 이룬 셈이네요. ‘진짜 개인전은 한국의 국립미술관에서 열고 싶다’고 하셨고, 한국 후배들을 위해 전시관을 만들어 평생 모아둔 자료를 보여주고자 했으니까요. 남은 하나는 ‘제2 고향’으로 여기셨던 제주도에 ‘이타미 준 미술관’을 여는 거예요.”

50여점의 조선 달항아리를 비롯해 소문난 한국 전통 민화와 도자기 수집가였던 이타미 준의 컬렉션은 아직 일본에 남아 있다. 유씨는 “건축이 무엇인지 60이 넘어서야 조금 알 것 같고 70 넘으니 나만의 독창성을 알 것 같다. 모든 디자인은 몸에서 우러나오고 그 몸은 환경의 지배를 받기에 건축가는 아름답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던 아버지 말씀 따라 조급해하지 않고 하나둘 유지를 이룰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다짐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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