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2.28 19:22
수정 : 2015.01.0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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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역 입구에서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는 류상준·상남 씨.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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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수색역 입구 ‘형제대장간’ 류상준·상남씨
2000도가 넘는 화력이다. 동생은 무섭게 타오르는 화덕의 화염을 뒤적이며 붉게 달군 직사각형의 스프링강을 집게로 들어 올렸다. 막 녹기 직전의 무쇠다. 옆의 스프링 해머 앞에 앉아 있던 형은 그 무쇠를 집게로 받아 주무르기 시작한다. 옛날엔 망치로 두들겼지만 지금은 위아래로 왕복운동 하는 스프링 해머의 위력을 이용한다. 둔탁한 소리를 내는 해머 사이를 오가던 붉은 무쇠는 순식간에 길쭉한 칼로 변한다. ‘쇠를 떡 주무르듯’ 하는 형의 손길은 벌써 47년째다. 캠핑을 취미로 하는 한 단골이 며칠 전 야전에서 쓸 수 있는 칼을 부탁해서, 만드는 김에 여러 개 만든다. 한 개에 8만원. 형제가 쇠를 주물러 만든 제품의 종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서울 도심의 대로변에 있는 10평 남짓한 좁은 대장간인데, 간판이 ‘형제대장간’이다. 무뚝뚝한 형제지만 손발은 찰떡궁합이다. 한순간의 방심은 큰 부상으로 이어진다.
형은 47년째 동생은 20년째
10평 공간서 ‘쇠를 떡 주무르듯’
횟집·방송국·문화재청 등이 단골
회칼·문고리·돌쩌귀 ‘척척’
“초등교만 나와 대학서 가르쳐
어느 정도 인생 목표 이뤘다”
도로에 차를 세운 택시기사가 창문을 연 채 소리 지른다. “부탁한 해머 만들어 놨어요?” 대장간이 길거리에 있어서 단골들은 굳이 차에 내리지 않고 물건을 주문한다. 조금 있으니 트럭이 선다. 역시 창문을 열고 외친다. “며칠 전 주문한 호미 줘요.”
수색역 입구에 있는 형제대장간의 주인장인 형 류상준(60·사진 오른쪽)씨가 이곳에 문을 연 지 17년이 됐으니 전국에 단골이 많다. 제주도에서 큰 횟집을 운영하는 단골은 1년에 한번씩 비행기를 타고 와서 15만원짜리 회칼을 직접 주문해 받아 간다. 주말농장을 하는 도심의 직장인들도 단골이다. 아파트 인테리어를 독특하게 하는 주부들도 단골이다. 사극을 제작하는 방송국에서도 자주 찾아온다. 드라마에 사용할 병장기를 주로 주문한다. 몇년 전엔 드라마 <식객>에서 사용된 ‘서울식 전통 칼’도 제작했다. 문화재청도 단골이다. 창경궁, 경복궁, 숭례문 등 고적을 수리할 때마다 필요한 문고리나 돌쩌귀 같은 용품도 척척 만들어낸다.
상준씨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곧바로 대장장이 길로 들어섰다. 마침 동네(서울 모래내)에 전국적으로 이름이 난 대장장이 박용신씨가 살았다. 풀무질부터 차근차근 배웠다. 성격이 꼼꼼하고 인내력이 강해 나이는 어렸지만 스승에게 인정을 받았다. 주문한 물건을 만들어 조그마한 흠이라도 생기면 다시 만들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하니 단골이 많이 생겼다. 10년 동안 모래내에서 대장장이 기술을 익힌 뒤 1976년 서울 암사동에서 독립해 처음 대장간을 차렸다. 그 뒤 모래내로 옮겼다가 1997년부터 수색에 자리잡았다.
동생 상남(57·왼쪽)씨는 일찍부터 장사를 했다. 떡집과 야채장사, 옷장사…. 장사 수완이 좋아 돈을 벌다가 빚보증을 잘못 서 망했다. 20년 전부터 형의 대장간에 와서 대장장이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빚도 다 갚고, 집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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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역 입구에서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는 류상준·상남 씨.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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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아버지는 소 발굽에 다는 편자를 만들고 신기는 데 달인이었다. 당시 소 한 마리에 편자를 달아주면 쌀 한 말을 받았는데, 워낙 손이 빠르고 솜씨가 좋아 하루 20마리의 소 발에 편자를 달아주었다. 하루에 쌀 두 가마를 너끈히 벌어들인 셈이다.
“도시에서 대장간을 하는데 돈벌이가 되나요?” 형이 웃으며 답한다. “한 해 1억원 정도는 저축을 할 수 있어요.”
화덕 주변엔 쇠로 만든 물건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낫, 도끼, 곡괭이, 호미 등 눈에 익숙한 생활도구에서부터 전문가들이 주문한 쇠 장식물까지 모두 형제의 손길을 거친 물건들이다.
쇳가루와 먼지가 범벅이 된 작업복을 입은 상준씨는 “어느 정도 인생의 목표를 이뤘다”고 한다. 올해 3월부터 대학에서 학생들과 만나게 된 것이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제가 대학생을 가르치고 있어요. 학생들을 가르치니 너무 좋아요. 평생 외길로 살아온 보람을 느낍니다.”
충남 부여의 한국전통문화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 것이다. 대장장이 일에 관심을 갖는 젊은이들이 없진 않다고 한다.
형제의 꿈은 대장간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이제는 사라지는 우리 것을 지키고 싶다. 이미 쇠로 만든 생활용품에도 중국 제품이 많이 들어와 있다. 가격 경쟁력이 없으니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하는 곳은 거의 없다. “우리가 만드는 제품의 수명은 수십년이 됩니다. 중국산보다 가격이 서너 배 비싸긴 하지만 손에 감기는 편안함이나 쇠의 강도는 비교할 수 없어요”라고 동생 상남씨가 말한다.
형이 화덕에서 붉게 달군 무쇠 조각을 집게로 들어 올리자, 동생이 윗도리를 벗고 해머를 잡아 든다. 형제가 번갈아 내리치자 불꽃이 사방으로 튄다. 노동의 생생함도 덩달아 튄다. 추위가 화들짝 달아난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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