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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1.18 19:00 수정 : 2015.01.18 20:24

[짬] 노숙인 자활 잡지 ‘빅 이슈’ 판매원 김형철씨

“홈리스가 거리에서 직접 판매하는 자활 잡지 <빅 이슈>입니다. 99호가 나왔습니다. 다음주엔 100호가 나옵니다!”

지난 15일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9번 출구. 빨간 조끼를 입은 한 남성의 목소리가 우직하다. 그는 20대 여성이 다가와 인사를 하자 5천원짜리 지폐를 받고 잡지를 건넨다. ‘빅 이슈 판매원’(빅판) 김형철(60·사진)씨다.

“빅판으로서 지켜야할 여러가지 수칙이 있어요. 그 중에 ‘미소를 지으며 당당히 판매한다’는 항목이 있는데, 이 말을 가장 좋아합니다. 저는 지금 당당히 일하는 중입니다.”

건설회사 설계 기술자였던 40대
외환위기로 실직한 뒤 거리 전전
행불자 처리돼 주민등록도 말소

2010년 ‘빅이슈’ 창간에 ‘희망’
한때 청소원 일하다 다쳐 복귀
임대주택 입주해 가족재회 준비

<빅이슈 코리아>에서 ‘빅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형철 씨.
김씨가 ‘빅이슈’와 인연을 맺은 건 노숙생활 12년째이던 2010년 초여름이다. 서울 성북구 영암교회가 운영하는 무료급식소에서 허기를 채우던 중이었다. 빅판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듣고 ‘희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처음에 판매할 수 있는 잡지 10권을 무료로 준다고 하니 밑천이 필요하지 않았죠. 또 판매 금액 절반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까 한 번 해볼 수 있겠다 싶었죠. 다음날 바로 빅이슈 사무실로 찾아 갔어요”

그해 7월 <빅이슈 코리아> 창간과 동시에 김씨는 빅판으로 합류했다. 지하철 3호선 고속터미널역 8번 출구에서 잡지를 팔던 첫 날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독자를 만나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부터 고민이었다. 인사 멘트도 연습하고 복장도 단정하게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노숙을 했던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그런 마음을 다잡게 한 것은 독자들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어요. 밥을 못 먹었을까봐 요기거리를 챙겨준 분도 있고 직접 김밥을 말아 오신 분도 있었어요.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악수 한 번 하자는 분도 계셨죠. 만날 때마다 잡지를 사겠다는 분도 있어서 목이 멜 정도였어요. 판매량도 점점 늘어났죠.”

그는 빅판을 시작한 지 한달 만에 1000권을 팔아 ‘판매왕’이 됐다. 판매 금액의 절반을 받아 저축도 늘었다. 생활이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면서 자신감을 찾았다. 2012년 초에는 빅판 생활을 정리하고 취업에 도전할 만큼 자립 의지도 강해졌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취업해 청소 일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마음 한 편의 불안감은 여전했죠.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에 실직하고 그 뒤로 십여 년 동안 무너지고 일어섰던 기억이 자주 떠올랐어요.”

실패의 기억은 반복해서 그를 괴롭혔다. 체격 좋고 성실했던 김씨는 건설 용역회사에서 설계를 담당하는 기술자였다. 느닷없이 찾아온 외환위기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빚을 가족에게 떠넘기고 싶지 않았던 그는 아내에게 아파트 명의를 넘겨주고 1998년 집을 떠났다.

“아내가 행불자 신고를 했어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주민등록이 말소됐구요. 아이들 보기에도 부끄럽고 미안해서 그냥 실종자 상태로 지냈죠. 주민등록번호가 없어서 신분 확인이 잘 안 되니까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서울 시내를 떠돌았다. 할 수 있는 일은 건설현장에서 할 수 있는 막노동뿐이었다. 노숙인 쉼터에서 나오면 하루씩 방 값을 내는 ‘일방’에서 지냈다.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때는 거리에서 먹고 잤다. 그런 생활 탓에 건강도 망가졌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청소일을 하다 그만 허리를 다쳤다. 6개월 만에 다시 거리로 나와야 했다. 이번엔 좌판을 펼쳤다. 여름에는 아이스크림, 겨울에는 내복과 장갑 등 여러가지 물건을 팔았다. 하지만 단속에 쫓겨 안정된 수입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구청 주변을 청소하는 공공근로도 했다. 하지만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생활이 반복됐다. 술 없이 버티기가 힘들었다. 결국 3년 만에 다시 빅판으로 돌아왔다.

“빅이슈 판매는 노점 형태이긴 하지만 관계기관의 협조를 받아서 단속 대상은 아니에요. 더 중요한 건 빅판들의 안정된 자립을 위해서 임대주택에 입주할 수 있게 기회를 주고 또 문화나 정서 지원도 해주니까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돼요.”

김씨는 현재 서울역 인근 27만원짜리 월세방에서 산다. 매일 오후 2시~8시 잡지를 판다. 삶의 목표도 생겼다. “지난해 10월을 기준으로 15개월 안에 잡지 1만부를 판매하는 게 목표예요. 쉼터나 노숙 생활을 하는 사람들한테도 빅판을 하라고 권할 거예요. 인생이 바뀐다고.”

그의 목표는 이것만이 아니다. “아이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 오랫동안 아이들 앞에 서지 못했어요. 그런데 언젠가는 아이들 얼굴을 봐야하니까요.”

‘빅이슈’는 91년 영국에서 창간된 대중문화잡지다. 한국판은 홈리스 자활을 지원해온 비영리 민간단체 ‘거리의 천사들’ 주도로 2010년 창간됐다. 격주로 발행되는 이 잡지는 한 호당 1만2천부를 인쇄해 서울 지하철역사와 수원역 등 60곳에서 판매한다. 한국판 100호 표지 모델은 세계적인 배우 키아누 리브스다. 그도 한때 노숙인 생활을 했다. 빅판이 6개월 이상 꾸준히 저축을 하면 임대주택 입주 자격이 주어진다. 창간 이후 지금까지 70여 명이 임대주택에 입주했고, 20명의 빅판은 재취업에 성공해 사회로 복귀했다.

글·사진 박수진 기자 jjin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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