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이 마사노리 전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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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전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 토미이 마사노리 씨
일제 때 일본인 주거지 ‘연구테마’로
40년대 영단주택 조사해 박사학위도
10년 전 서울 이주·‘1930년 경성’ 전시 2년 전 퇴임 뒤 목수로 ‘제2 인생’
이우학교 공동주택단지 설계맡아 “건축주들이 공동체 마을과 자연 친화를 목표로 마을회관까지 구상하고 있더군요. 경사지를 살리고 목조주택을 위주로 하자고 결정되면서 저와 인연이 된 거죠.” 10년 전 한양대 교수로 옮겨오기 전 일본에서 가나가와대 건축과 교수 겸 건축가로 있으면서 100여채의 목조주택을 지은 바 있는데다 경사를 살린다는 취지가 그의 도전 욕구를 자극했다. 그와 함께, 일차로 완성된 집에 들어가 보니 일반주택에 익숙한 눈에 정말 이상하게 보였다. 평평한 바닥에 칸막이벽을 쌓고 문을 달아 방을 들이는 집장사형 집은 어떤 가구를 들이고 누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용도가 정해진다. 도미이의 집은 정반대로 애초에 집주인의 요구를 반영하여 공간을 구성하고 개별 방들 역시 쓰임새를 미리 정해 위치를 정하고 모양을 냈다. 이상하다는 느낌은 아주 사적인 맞춤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특이하게도 전층이 아래위로 통하고, 화장실 등 특별한 경우를 빼면 방마다 문이 없다. 게다가 계단 앞뒤로 지그재그로 배치되어 아래층에서 위층의 동태가 보이고 “○○야 밥 먹어” 하고 부르는 소리가 그대로 들린다. 벽을 꺾어 몸을 숙이면 프라이버시가 유지되도록 했다. “한국 시골집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방보다 낮게 부엌을 들이면서 집의 구조가 아주 다양해집니다. 부엌에서 한두 개의 턱을 넘어 대청 또는 방으로 연결되고 두 공간의 사람들은 약간 다른 눈높이로 만나게 되죠. 부뚜막 위쪽 공간은 안방에서 연장된 다락이 되고요.” 그가 한국 주택구조와 그 의미를 토종보다 더 깊이 아는 데는 개인사가 얽혀 있다. 1972년 가나가와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에 조교로 남았다. 그리스의 중정형 마을을 연구하는 지도교수를 따라 현지조사를 갔다. 하지만 지중해의 주택구조는 일본 도시주택과 달라 흥미가 없었다. 그 무렵 고려대 주남철 교수의 <한국의 전통적 주거>라는 논문을 보고 한국에도 중정형 주택이 있음을 알았다. 1983년 35살 봄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방학 때마다 한국을 방문했다. 어느 날 서울 코리아하우스 근처를 걸을 때 도쿄 뒷골목에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둘러보니 일본식 주택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일본인 주거지였다. 연구 테마를 찾은 순간이었다. 이후 김사량의 <천마>,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경성 쇼와 11년> 등 강점기 경성을 무대로 한 소설을 찾아보았다. <경성 쇼와 11년>에서 묘사한 혼마치(명동·을지로), 종로 일대의 모습을 보고 당시 지도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스스로 지도를 만들기로 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지적도와 해마다 발행된 전화번호부를 구해, 전화번호부에 등재된 상호와 주소를 지적도에 표시하는 방식이었다. 혼마치에는 소학교 두개가 있었는데, 매년 열리는 동창회를 찾아가 참석한 노인들한테 자신의 미완성 지도를 보여주면서 빈칸을 메웠다. 이상이 운영했다는 제비다방 위치도 그렇게 찾아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도미이의 작업을 기초로 2012년 ‘1930년 경성’이란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강점기 주택에 대한 관심은 1940년대 초에 설립된 영단주택으로 옮겨갔다. 영단은 현재 토지주택공사(LH)의 반쪽인 옛 주택공사의 전신으로 당시 일본, 조선, 대만, 중국 랴오둥(요동)반도 등지에 대규모 단지주택을 지었다. 지역에 따른 양식의 차이나 종전 뒤의 사용법 등까지 알아보았다. 연구 결과 조선 주택영단은 일본식 주택문화나 생활양식을 보급하여 조선을 일본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게 그의 도쿄대 박사학위논문이다. “교수일 때는 강의·연구와 연구실을 찾아오는 사람이 다였어요.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정말 재밌어요.” 목수로서 첫 작업은 경주의 가난한 일본인 유학생을 위한 한옥이었다. 살림집 겸 음식점으로 1억원에 16평 본채와 5평 별채를 지었다. 서양식 목조주택의 뼈대에 한옥 서까래를 얹는 방식으로 보를 생략함으로써 자재비와 노임을 최소화했다. 아이디어는 보와 기둥이 없이 짜인 석굴암의 돔 천장에서 얻었다. 그는 조선시대 한옥이 한옥의 전부라고 여기지만 신라나 고려 때는 여러 스타일이 공존했다며 석굴암의 구조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업체가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아파트 시대가 기울고 건축주의 개성이 반영되는 단독주택 시대가 열리는 만큼 주택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져야 해요.” 건축 현장을 다니느라 햇볕에 그을어 웃을 때 드러나는 흰 이가 더 하얗게 보였다. 글·사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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