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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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조태일시인기념사업회 출범 박석무 초대 이사장
99년 ‘태일’ 떠날 때까지 ‘틈없이’ 교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도 출간시켜 23일 광주서 후배·제자들과 출범식
고향 곡성 시문학기념관 활용할 계획
문학축전·문학상·생가복원 등 추진 59년 광주고 1학년 5반. 키가 컸던 조태일은 등교 첫날 임시 반장을 맡아 반을 통솔했다. 그러나 ‘권력’은 하루뿐이었다. 첫날 사정이 있어 등교하지 못했던 박석무가 나오자 이튿날 바로 담임은 입학성적 1등인 그를 정식 반장으로 임명했다. 그렇게 하루짜리 ‘임시 반장’과 ‘진짜 반장’으로 처음 마주친 두 사람이 그 뒤 40년 동안 죽마고우로 어울리게 될 줄은 서로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당시는 추석이나 설 명절이라도 평일이면 학교에 가야 했어요. 태일이는 시골(무안) 집에 가지 못하는 나를 기어코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송편이며 떡국을 먹이곤 했어요. 군에서 제대한 뒤 ‘신춘시’ 동인을 할 때에도 동인지가 나오면 꼬박꼬박 보내주었죠. 70년대 초 제가 광주에서 옥살이 할 때에도 아내가 면회하는 편에 따라와서는 뒤에서 손을 흔들고 가고는 했고요. 가족이 아니면 면회가 안 되니까 그렇게라도 와서 얼굴 한번 보고 가는 거예요.” 다산 전문가로서 박 이사장의 이름을 널리 알린 책이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를 번역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다. 이 책에 대해 박 이사장은 “이 자식(조태일)의 강제로 책을 내게 된 것”이라고 소개했다. “옥살이를 마치고 광주에서 교직에 있을 때였어요. 태일이가 어느날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너, 교사로 그냥 늙어 죽을래?’ 책이라도 하나 내야 하지 않겠냐는 거죠. 저는 그때 하루 대여섯시간씩 수업을 할 때여서 도저히 책을 쓸 형편이 아니었거든요. 그래도 밥을 먹으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다산의 편지 얘기를 했더니 며칠 뒤 돈 10만원을 보내오더군요. 말하자면 입도선매였죠. 저는 그 돈을 친구들하고 술 마시는 데 다 써버렸는데, 그 뒤로 일주일이면 두세번은 새벽에 전화해서 번역 얼마나 했느냐고 다그치는 거예요. 시달리다 못해 여름방학에 짐 싸서 무등산 아래 절에 들어가 번역을 시작했죠.” 1979년 조태일이 운영하던 시인사에서 초판이 나온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몇차례 표지를 바꿔 가면서 1989년까지 나오다가 조태일 시인이 1989년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창비로 판권이 넘어가 ‘창비교양문고’로 1991년부터 2001년까지 나왔고 2001년 양장본으로 판형이 바뀌었다. 지금도 1년이면 1만부 넘게 팔리는 스테디셀러다. “1980년대 시인사 사무실에는 ‘불애군우국비시야’(不愛君憂國非詩也)라는 휘호가 걸려 있었어요. 다산이 아들한테 보낸 편지 구절이죠. 임금을 사랑하지 않고 나라를 염려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라는 뜻인데, 문학이 사회에 관심을 지니고 참여해야 한다는 취지를 담은 거잖아요? 조태일이도 바로 그런 다산의 정신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고, 당시 시인사에 출입하던 동료·후배 시인들도 그 구절 보고 영향을 받았다고 봅니다.” 박석무 이사장에게 친구의 시 중에서 좋아하는 작품을 꼽아 달라고 했다. 초기시 ‘참외’와 ‘식칼론’ ‘국토 서시’와 말년작 ‘풀씨’ 등을 들었다. 시집 <식칼론>과 <국토>로 대표되는 초기시가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 의지를 남성적 어투에 담았다면 말년작은 한결 단아하고 절제된 서정미를 보인다.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추는 곳/ 그곳이 나의 고향,/ 그곳에 묻히리.//(…)//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출 곳 없어 언제까지나 떠다니는 길목,/ 그곳이면 어떠리./ 그곳이 나의 고향,/ 그곳에 묻히리”(‘풀씨’ 부분) 2001년 광주 너릿재 시비공원에 ‘풀씨’ 시비가 세워진 데 이어 2003년 9월에는 고향인 전남 곡성군 태안사 입구에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이 들어섰다. 10주기였던 2009년에는 시와 시론 및 산문을 망라한 ‘조태일전집’(전4권)도 나왔다. 기념사업회가 설립되면 어떤 일을 하게 될까? “다행히 기념관이라는 근거지가 있으니까 그 공간을 활성화해서 조태일의 문학정신을 함양하고 그 친구가 추구했던 민주와 자유를 문학운동으로 이어나가야겠죠. 기일에 맞춰 기념관에서 문학축전을 열 계획이고, 문학상 신설이며 생가 복원 같은 사업도 생각하고 있어요. 문단 후배들도 있고 광주대 제자들도 있고 하니까 구체적인 사업은 그 사람들하고 상의해서 할 겁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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