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3.24 19:27
수정 : 2015.03.24 19:27
[짬] 키르기스스탄 ‘자비행’ 23년째 법웅 스님
법웅 스님(60)은 겨울과 여름 3개월씩 집중 참선하는 동안거와 하안거에 빠진 적이 없다. 1년 내내 산문을 봉쇄하고 참선 정진만 하는 조계종 유일의 종립선원인 문경 봉암사에서 군기반장 격인 ‘입승’을 수년간 맡을 만큼 그는 선방 내에선 고참에 속한다.
그런데도 그는 집도, 절도 없다. 1978년 송광사 천자암의 활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법랍 40년이 다 되어가지만, 주지 한번 맡아본 적이 없다. 상좌(제자)도 없다. 가진 것도 없다. 근래 몇년 동안은 충남 예산 덕숭산 정혜사 능인선원에서 방장 설정 스님을 모시고 안거를 났지만, 그는 구름처럼 떠도는 운수납자다.
88서울올림픽 계기 조계종 포교 나서
“그러마, 한마디에 코꿰어” 93년 첫발
옛소련 붕괴로 독립한 ‘중앙아’ 빈국
3년뒤 귀국해 무연고 주검 ‘염’ 봉사도
해마다 안거 마치고 두차례 행장 꾸려
“부처도 삶의 현장에서 자비행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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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웅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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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동안거가 끝나면 해마다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으로 떠난다. 1991년 옛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키르기스스탄은 같은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보다도 가난한 나라다. 면적은 한반도만 하지만 인구는 548만명(2010년 기준)에 불과하다. 수도 비슈케크도 60만명이 살아, 우리나라의 중소도시 규모다. 국민의 80% 이상이 무슬림이다.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간 당나라의 삼장법사가 지나갔다는 것 말고는 불교와 인연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그는 어김없이 올해도 동안거가 끝나자마자 짐을 꾸리기 시작했고, 26일 키르기스스탄행 비행기에 오른다. 3개월 동안 정진의 힘 덕분인지, 덕숭산 산정의 서릿발 같은 기상과 봄의 훈풍을 함께 내뿜는 그를 만났다.
법웅 스님이 키르기스스탄에 처음 간 것은 22년 전인 93년이었다. 도반으로 강화도에 국제연등선원을 열었던 원명 스님(1950~2003) 때문이었다. 성철 스님의 상좌였던 원명 스님은 88년 서울올림픽 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알아 올림픽선수촌 불교관을 맡았다. 당시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려인이 불교관에서 성철 스님의 저서인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읽고 불교를 접해 중앙아시아에 포교를 제안했고, 원명 스님은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와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 등에 조그만 선방을 열었다. 그러면서 선승들을 만날 때마다 “중앙아시아에서 참선을 지도해줄 스님이 필요하다”고 사정했다. 그때 지나는 말로 “그러마”고 한마디 했던 것이 빌미가 됐다.
어느 날 법웅 스님을 길거리에서 만난 원명 스님이 “대장부가 한번 약속을 했으면 한 철이라도 지도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말에 그는 영락없이 코가 꿰어 듣도 보도 못한 비슈케크로 향했다.
그가 도착한 비슈케크는 아비규환이었다. 소련이 해체되어 연금이 끊기자 노인들은 길거리 쓰레기통 음식을 뒤져 서로 뺏으려 다투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고픈 배를 안고 참선을 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일요일마다 주머니를 털어 빵 300개씩 노인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렇게 외로운 섬에 홀로 표류하는 신세가 된 그가 선방이 아닌 삶 속에서 도를 닦기 시작한 것이다.
키르기스스탄은 무려 80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다. 그 가운데 0.4%가량인 2만여명이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된 조선인 후세인 ‘고려인’들이다. 한국 동포들을 찾아볼 수 없던 미지의 땅에서 그나마 고려인들이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함께 일을 하는 도반이 되어주었다.
꼬박 3년을 비슈케크에서 보내고 귀국한 그가 간 곳은 선방이 아니라 여수의 한 병원 영안실이었다. “대궐처럼 장엄한 절집 안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실천하지 않는 도는 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영안실로 향한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아무 연고가 없는 주검들의 염을 해주었다. 죽어서도 버림받은 주검들을 정성껏 씻고, 옷을 입히고, 염불을 해주었다. 그렇게 7개월간 700구의 주검이 이승의 몸을 벗고 떠나는 것을 도와주면서, 젊은 시절 괴팍하기 그지없던 그의 성격에서 해탈되기 시작했다.
그는 그 뒤 다시 선승으로 돌아왔지만, 키르기스스탄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매년 동안거가 끝나면 여비조로 선방에서 주는 해제비를 가지고 그곳으로 향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노인들을 모아 경로잔치를 베풀고, 쌀과 밀가루를 나눠주었다.
“뭘 도와줬다고 할 만한 건 없다. 내가 가져가는 몇푼의 돈은 잘사는 나라에서는 도움이 되기 어렵다. 그러나 키르기스스탄에선 1만~2만달러라도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고, 많은 병을 고칠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그 돈을 허비하거나 여행으로 돈을 쓰기보다는 그곳에서 그냥 함께 쓸 뿐이다.”
3년 전부터는 현지 동포인 최광영 케이아이시은행 대표가 도움을 줘 어린이 백혈병 치료 병원에 의약품을 사주고, 병원 시트를 갈아주는 일도 하고 있다.
안거가 끝나고 짐을 꾸릴 때면 인연 있는 도반들도 십시일반 보탠다.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선본사 주지를 하던 정묵 스님과 덕문 스님, 호압사 주지 우송 스님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법웅 스님은 “도예가 신현철씨는 백자를 가져왔고, 이번 안거 때 선방 공양주 보살도 200만원을 보내왔다. 선방 근처 무한종합건설 심상천 대표가 건네준 500만원을 합쳐 이번엔 재활병원에 재활 기기를 사줄 수 있게 됐다”고 감격해했다.
그는 “어찌 부처가 이 땅에 온다면 선방의 상징인 주장자만 들고 있겠느냐”며 “백가지 천가지 모습으로 자기 본성의 모습을 드러내며 삶의 현장에서 부처행을 실천하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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