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07.02 19:04 수정 : 2015.07.02 20:59

김민석 대표. 사진 임종업 기자

[짬] 아트팩토리 삼탄아트마인 대표 김민석 씨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에서 38번 국도를 따라 태백시로 가다가 상갈래 삼거리에서 414번 지방도로 1.7km쯤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번지 점프대처럼 삐죽 튀어나온 구조물이 보인다. 탄광에서 쓰던 53m 높이의 권양기다. 지장천을 건너 600m를 올라가면 얼핏 보였던 권양기를 비롯해, 본관동·공장동·중앙압축기실·보일러실 등 옛 삼척탄좌의 전모가 눈 앞에 펼쳐진다. 석탄산업 정리정책에 따라 2001년 폐광된 곳이니, 폐허일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2012년 아트팩토리로 탈바꿈시킨 ‘삼탄아트마인’이 자리잡고 있다. 지하갱도에서 탄을 캐던 광부들, 탄을 끌어올리고 이를 선별하던 선탄부들이 북적거리던 5만㎡ 산업현장을 미술관·박물관·레지던시·레스토랑으로 바꾼 것이다. 버려진 산업유산을 아름다운 예술공간으로 바꾼 작업은 2013년 대한민국 공공 디자인 대상을 받았고, 올해는 한국관광공사 선정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곳 100선’에 선정됐다. 덕분에 올들어 방문객 입장료만으로 수지를 맞출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개조작업은 계속되어 중앙압축기실을 원시미술박물관으로 바꾸는 중이다.

‘흰눈 검은 탄’ 방치된 삼척탄좌 매료
광원 월급명세표까지 챙겨 ‘재생’
공공디자인 대상·관광명소로 ‘흑자’

25살 미국 떠나 35년간 150개국 ‘방랑’
현지 미술품 모으다 컬렉터로 변신
“미친놈이라 해도 착한 수장가 되고파”

이처럼 삼탄아트마인이 지역의 관광 랜드마크가 되고 흑자경영까지 바라보게 된 데는 김민석(61) 대표가 있다. 시작할 무렵 ‘미친 놈’ 소리를 들었고 지금도 역시 그런 소리를 듣는다는 그를 최근 현장에서 만났다.

“독일 에센주 졸페라인 미술·박물관과 체코 국립현대미술관을 벤치마킹했어요. 전자는 폐광을 복합문화단지로 바꾼 곳이고, 후자는 현대작가의 작품으로 수장고가 그득한 곳입니다.”

김 대표의 눈에 삼척탄좌가 들어온 것은 2011년 폐교한 정선 폴리텍대를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검은 탄과 흰 눈의 뚜렷한 대비 속의 녹슬어가는 폐시설을 목격한 순간 아찔해져 “세상에~ 세상에~”를 반복했다고 했다. 150개 나라를 돌면서 갈고 닦은 감성이 독일과 체코 두 곳의 문화시설을 합친 공간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5년 무상임대 운영권을 갖는 조건으로 설계입찰에 뽑혀 리뉴얼 작업에 들어갔다. 그동안 수집한 3만점의 콜렉션을 담보로 빌린 30억원에 사재 20억원을 합쳐 50억원의 개인자본이 들어갔고, 문화관광체육부 등 공공자금 115억원이 투입됐다.

“겉보기와 다르더군요. 11년간 방치된 시설은 황폐해졌고, 돈이 되거나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모두 없어졌어요. 남은 것은 쉽게 가져갈 수 없는 대형기계와 고물로도 안 가져가는 서류뭉치 따위였어요. 쓰레기를 치우고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했지요. 감시를 소홀히 하면 밤에 트럭을 대고 쇳덩이를 실어가더라구요. 눈 속을 헤치며 버려진 광부의 장화까지 하나하나 챙겼어요.” 그렇게 살려낸 광산유적은 4개의 마인갤러리를 채우고, 광부의 월급명세표 등 문서자료 역시 한 개의 방을 가득 메우고 있다. 수장고 3곳에는 자신의 콜렉션이 빼곡하게 들어있다.

“세 차례 겨울을 나면서 외롭고 힘들어 여러 번 죽음을 생각했어요. 피를 나누자던 식구들이 멱살잡이를 하고 떠나고, 며칠 월급을 미뤘다고 노동청에 고발당하고…고비의 연속이었죠. 그때마다 죽을 힘이면 그 힘으로 살자,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것을 만들자고 다짐했어요.” 그는 2012년 개관 이래 다녀간 관람객 가운데 단 한사람도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했다.

아트마인의 기초는 그의 방랑 35년과 콜렉션이다. 1979년 25살 나이에 20달러를 갖고 미국으로 간 것이 방랑의 시작이었다. 주유소, 중국집 알바를 하다가 디즈니랜드 퍼레이드를 보고 종합예술 세계에 눈을 떴다. 사우디아라비아 식품회사에서 일할 때는 장미석에 반해 수집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타이의 스푼을 미국으로 넘기고, 뉴욕의 청바지를 탄자니아로 넘기면서 돈을 모았고, 또다시 현지 미술품으로 교환됐다. 한국으로 보내니 대학교수들이 어디서 이런 걸 구했느냐며 비싼 값으로 사갔다. 피카소, 자코메티의 작품이 자신의 콜렉션과 흡사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콜렉션을 기반으로 시작한 대형 백화점의 전시는 여러 비엔날레의 전시기획으로 이어졌다.

첩첩산골 구석에서 입장객만으로 버텨나갈 수 있을까. “당장은 고전하겠지만 장담할 수 있어요. 개원할 때만 해도 2시간 거리였던 춘천 남이섬이 1시간대 수도권으로 편입되지 않았습니까? 이곳 역시 10년 안에 서울의 관객들이 쉽게 오갈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는 수박 싸들고 가서 돼지고기 구워 먹는 식의 휴가문화가 이제 바뀌고 있다고 본다. 고급 숙박시설에서 품위있게 자고 먹으며 문화를 즐기는 여행으로. 그에 맞춰 강원랜드나 알펜시아 등 숙박시설 방마다 작품을 걸고, 일부는 작가의 방으로 꾸며 숙박과 예술체험을 겸하게 하는 꿈도 꾼다. 이를 위해 아트마인 앞쪽 2분거리의 넓은 저탄장에 초대형 수장고를 짓고자 한다. 작가들의 작품을 관리해주고 임대수입을 함께 나누는 방식의 비즈니스를 할 작정이다.

“작품은 두 번 탄생합니다. 한번은 작가에 의해, 두번째는 수장가에 의해. 나쁜 수장가는 작품을 환전품으로 취급하고 혼자 즐기지요. 저는 착한 수장가가 되고 싶어요.”

그는 자가용 차도 없다. 전시를 위해 작품을 들일 때도 직접 나른다. 전시회 오픈하는 날 자신이 대표라고 소개하면 깜짝 놀란다고 한다. 운전사인 줄 알았다면서.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