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갑주씨.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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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근대 생활용품 수집가 전갑주씨
조선총독부가 1922년 만든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1권의 첫번째 장의 내용. 소 한마리가 그려져 있고 ‘소’라는 한 글자만 써 있다.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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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조선어독본’ 첫장에 ‘소’ 그림
“소처럼 순종하는 노예교육 의도” 개화기 잡지·공습 사이렌·쥐덫 등등
30여년간 ‘기억의 편린’ 20만여점
“남들은 쓰레기라지만 내겐 보물” 전씨가 보관하고 있는 한글로 된 첫번째 교과서는 1895년 발간된 <국민소학독본>이다. 목판활자로 인쇄한 이 책엔 처음으로 ‘세종대왕’과 ‘을지문덕’ 등 한민족의 영웅을 소개하는 글이 등장한다. 제5과에 “우리나라 세종대왕께서는 인민의 농사를 위해 농사집설이라는 책을 지어…”라고 소개했다. 그는 14년 전 500만원을 주고 구입했다. “지금 돈으로 치면 3천만원 정도일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1896년엔 학부 편집국에서 <신정 심상소학(尋常小學)>을 발간했다. 각급 학교를 설립한 뒤였다. “이 책의 1과에선 학교에 대한 정의가 나옵니다. ‘학교는 사람을 교육하여 성취하는 데이니, 특히 각종 모종을 기르는 모판이라 할 수 있다. 또 학교는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게 한다’로 했어요. 그리고 처음으로 ‘김지학’과 ‘박정복’이라는 학생이 등장합니다. 두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며, 배가 고파도 남의 밭에 있는 배를 따먹지 않고 올바르게 사는 이상적인 아이입니다.” 전씨는 해방 뒤 1948년 문교부가 발간한 국어 교과서 <바둑이와 철수> 4종 모두를 수집했다. “얼마나 친근합니까. 국어 교과서 제목이 ‘바둑이와 철수’입니다. 영희와 순이도 등장합니다. 아이들이 서로 이야기를 하며 가족과 사회를 보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만든 첫 교과서인 셈이죠.” 수집품 중에는 한국전쟁 때 발간한 ‘전시(戰時) 똥지 교과서’도 있다. 거무튀튀한 재질에 제본도 안 된 책이다. 제목도 <탕크> <비행기> <군함>이다. 전쟁통에 질이 나쁜 인쇄용지를 부르는 속어인 ‘똥지’를 사용해서 붙인 이름이다. 맨 뒤엔 “이 책은 전시판이므로 제본이 돼 있지 않으니 교사나 부형이 바늘로 가운데를 꼬메 학생들에게 나눠주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샌프란시스코 시민 성금으로 만든 교과서들입니다.” 그는 문교부가 51년에 발행한 전시교과서 12종을 30년에 걸쳐 수집했다. 전씨가 굳이 교과서를 수집한 이유는 첫 직장으로 당시 문교부 산하의 국정교과서에 입사한 것이 계기가 됐다. “교육의 시작인 교과서를 누구도 관리 보존하려고 애쓰지 않았어요. 비록 촌스런 표지였지만 저에겐 꼬까옷을 입은 소장가치가 높은 책이었어요.” 그는 개화기 이래 각종 잡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읽을 수 있는 각종 교육자료, 생활사 물품도 모았다.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과 학도병들에게 지급된 목총, 전쟁통에 사용된 이동용 책상 등 다양하다. 새마을운동과 혼분식 장려 관련 포스터에 쥐잡기 운동에 동원된 쥐덫도 있다. 가족계획 관련 포스터는 시대별로 다르다. ‘알맞게 낳아 잘 기르자’(1960년대 초중반) - ‘세살 터울로 세자녀만 35세 이전에 낳자’ -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1980년대 초반) - ‘사랑으로 낳은 자식 아들딸로 판단 말자’ 등의 표어가 새삼스럽다. “모두 20만여점 됩니다. 수집은 무수히 흩어진 기억의 편린을 모으는 재미입니다. 수집품들은 삶의 곡절마다 나를 지탱해준 버팀목이었고, 깊고 마르지 않는 삶의 이야기입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해서 성공한 것이 계속 수집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최근 자신의 수집 인생을 담은 <진품 명품 수집 이야기>(한국교과서)를 출판한 전씨는 갖가지 애환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한동안 아내 몰래 수집을 하느라 수집품은 회사에 보관했다. 직장에서 인사 이동이 있을 때마다 캐비닛 4개를 옮겨야 했다. 나중에는 폐교와 지역의 교과서 창고에 보관하기도 했다. 전씨는 앞으로 수집품으로 하고픈 일이 많다. “압축성장을 이룬 60~70년대의 마을을 복원하고, 비무장지대에 한국전쟁 기념 통일문화공간을 만들고 싶고요.” “남들은 쓰레기로 여기지만 내 눈엔 추억이고 보물입니다. 수집가에겐 돈과 열정과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세가지보다 중요한 것은 인내심입니다. 최소한 10년은 인내해야 수집가라고 할 수 있어요. 앞으론 꿈과 감성과 이야기를 파는 시대가 옵니다.” 그는 옛 국민학교에서 쓰던 낮은 나무책상 위에 놓인 낡은 교과서를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어루만졌다.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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