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9.22 19:02
수정 : 2015.09.23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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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헌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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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한국등산문화연구소 소장 박정헌 씨
주황색 카약이 백사장 코앞까지 다가왔다. 박정헌(44·사진) 한국등산문화연구소 소장은 노를 든 채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지난 20일 오후 4시께 제주시 조천읍 함덕 서우봉해변. 마침내 카약을 타고 제주도 일주를 마치는 순간이었다. 지난 7월19일 이후 주말마다 틈틈이 내려와 카약을 탄 날을 꼽으면 열흘 만의 완주다. 우도, 가파도, 차귀도, 비양도 등 주변 섬을 먼저 돈 뒤 함덕에서 출발해 본섬을 돌았다. 230㎞의 거리다. 천생 산악인이었던 그는 왜 바다를 떠다닌 걸까?
박 소장은 히말라야 거벽 등반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정상 정복 자체를 목표로 삼는 등정주의 대신 올라가는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등로주의의 길을 걸었다. 난벽으로 악명 높은 안나푸르나 남벽(1994)과 에베레스트 남서벽(1995)을 한국인 최초로 올랐고, 2000년에는 케이투(K2) 남남동릉을 무산소로 등정했다. 2002년 시샤팡마 남서벽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고, 2005년 촐라체 북벽 등정까지 이뤄냈다. 하지만 승승 가도는 거기까지였다. 당시 후배 최강식씨와 단둘이서 촐라체에서 내려오다 사고를 당한 것이다.
히말라야 거벽 등반가로 맹활약
2005년 촐라체 하산길 조난사고
동상으로 손·발가락 몇개씩 잘라
“내 나라 자연의 아름다움 재발견”
20일 카약으로 제주도 일주 성공
내년 서해안·동해안·독도까지 목표
발을 헛디뎌 커다란 얼음 틈 사이로 빠진 최씨와 위에 있던 박 소장은 줄로 연결돼 있었다. 산악 논픽션 문학의 대표작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에서 위에 있던 산악인은 크레바스에 빠진 동료를 포기하고 줄을 끊었지만, 박 소장은 갈비뼈가 부러지고도 줄을 끊지 않고 버텼다. 다리가 부러진 최씨는 2시간여의 사투 끝에 크레바스에서 빠져나왔고, 둘은 만신창이가 된 채 기적처럼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사고 후유증은 혹독했다. 박 소장은 동상에 걸린 손가락 8개와 발가락 일부를 잘라야 했다. 이후 거벽 등반은 불가능해졌다.
산밖에 모르던 그는 고심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그래도 돌아갈 곳은 산밖에 없다”였다. 대신 방법을 바꿨다. 패러글라이딩, 산악스키, 산악자전거, 카약 등으로 히말라야 곳곳을 누볐다. “하늘을 날면 산 전체를 보게 되고, 카약을 타면 산에 있는 물줄기들을 읽게 돼요. 예전에 정상에만 오를 땐 못 보던 것들이죠. 그때 정상에 서면 다음에 오를 또 다른 정상만을 바라봤어요. 그 사고로 멈추지 못했다면 아마도 히말라야의 어느 벽에서 떨어져 죽었을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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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표는 동상에 걸린 손가락 8개와 발가락 일부를 잘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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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전체를 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주로 외국에서 탐험을 즐기던 그에게 언젠가부터 내 나라 땅에 대한 애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카약 일주를 계획했다. 땅은 바다에서 볼 때 가장 아름답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루 6~8시간 노를 저어 30~40㎞를 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짧은 손가락으로 노를 제대로 쥘 수 없어 계속 움직여야 하는 왼손은 온통 물집투성이였다. 3m 넘는 너울에 카약이 요동치거나 강한 바람에 1m 전진조차 버거울 때도 많았다. 동료 하나 없이 오롯이 혼자 파도와 바람과 힘겹게 싸우다 보면 멀리서 육지가 유혹해 왔다. “그만두고 육지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돌아가려 해도 한참이에요. 너무 힘들어서 엄두가 안 나요. 그러면 ‘에이, 그냥 계속 가자’ 하는 거죠. 하하하~.”
힘들 때마다 위안이 된 건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보고 있으면 힘든 것도 싹 잊게 되죠.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앞으로 안 가고 그냥 머물러 있어요. 그 순간의 기분은 말로 표현 못해요.” 그는 제주도에서 꼭 봐야 하는 아름다운 곳으로 차귀도와 서귀포 앞바다의 범섬을 꼽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배를 타면 식사와 화장실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까? “물을 3리터나 마시는데 화장실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안 들어요. 땀으로 다 배출되거든요. 뭘 먹고 싶은 생각도 안 들어요. 에너지바 2개가 식사의 전부죠.” 제주 일주를 하는 내내 그의 안전을 걱정하는 해경에서 많게는 하루 10차례까지 전화를 걸어왔다고 한다. “나중엔 해경이랑 친해질 지경이었다니까요.”
제주도 일주를 끝낸 소감을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끝이라니요. 이제 시작인데요. 앞으로 1286㎞ 남았습니다.” 내년 봄부터 1년에 걸쳐 서해에서 동해까지 한반도 남쪽을 카약으로 돌 계획이란다. 외국 카약 선수들이 제주도를 빼고 그렇게 한 적은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아직 없다. 제주도를 포함해 전체를 도는 도전은 박 소장이 처음이다.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독도에 가본 사람은 얼마 없어요. 그래서 마지막 일정 86㎞를 울릉도와 독도로 잡았어요. 자꾸 가야지 자신있게 우리 땅이라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마지막으로 10년 전 그 일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줄을 끊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느냐고. “왜 안 들었겠어요? 그 얘기라면 종일 해도 모자라요. 그땐 죽음보다 삶이 더 힘들었어요. 그냥 편히 자면 죽는 건데, 살려는 의지가 더 힘든 거예요. 인간에게는 마이너스 100% 에너지가 존재한다고 해요. 에너지를 100% 다 쓰고도 그만큼의 마이너스 에너지를 더 쓸 수 있다는 거죠. 그걸 잘 쓰는 사람이 세상을, 아니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겁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죠.”
문득 그는 마이너스 300%쯤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글·사진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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