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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0.05 20:59 수정 : 2015.10.05 22:06

곽정숙 전 의원. 사진 장애인가정상담소 제공

[짬] 첫 개인전 ‘꿈꾸는 강’ 연 곽정숙 전 의원

흰 도화지에 줄을 긋는 것부터 연습했다. 친구를 따라 간 동네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즐거웠다. 곽정숙(55) 전 민주노동당 의원(비례대표)은 2012년 5월 의정 생활을 마친 두달 뒤쯤 붓을 처음 잡았다. 곧 대학 평생교육원 수채화반으로 옮겨 인연을 맺은 스승의 화실에서 개인지도까지 받았다. “재능의 한계 때문에 어렵고 힘들지만, 감동받았던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업 자체가 설레고 즐거워요.”

곽 전 의원은 용기를 내 첫 개인전을 열었다. 지난 2일부터 광주시 치평동 지노갤러리에서 20일까지 작품 20여 점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그림은 마음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떨어지는 용기’ 등 ‘마음’을 그린 그의 작품들 속엔 자주 물이 등장한다. 전시회 제목도 ‘꿈꾸는 강’이다.

어릴 때 결핵성 척추병으로 장애
‘굽은 등’ 보물로 여기며 극복
20대부터 장애인 인권운동 ‘투신’

2008년 비례대표로 ‘약자 권익’ 앞장
간암 전이로 ‘시한부’ 받고 유언장
“괜찮아요,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초대 인사글에서 그는 “(물은) 먼지와 흙탕물로 더렵혀진 이들을 씻어주고, 상처나 아픈 이들을 감싸고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흘러 뭇 생명과 함께 큰 힘으로 노래한다”고 적었다. 장애인 인권활동가로, “꿈을 잃고 절망하는 영혼들을 씻기는” 물로 살아온 그의 삶을 얘기하는 듯 하다.

그는 다섯살 때 결핵성 척추병을 앓고 그 후유증으로 척수장애인이 됐다. 전남 나주 이창동이 고향인 그는 영산포 초등학교와 영산포여중 때까지 우등생이었다. 하지만 건강 상태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기는 힘들었다. 한동안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그를 슬프게 했다.

곽정숙 전 의원의 그림.
교회 주일학교(초등학생 예배) 교사로 봉사하던 어느날 한 아이가 그의 등을 가리키며 ‘무엇이 들어 있어요?’라고 물었다. 그는 단상 뒤로 그 아이를 불러 굽은 등을 보여주며 ‘이게 보물이란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실제로 굽은 등이 내 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 광주로 온 그는 방송통신고를 다니며 사실상 독학을 했다. 이후 만학도로 대학에도 진학해 사회복지학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

“스무살 무렵 예수를 만나면서 영적인 눈이 띄었어요. 문제가 있으면 힘을 모아 개선하고 바꿔야겠다는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는 20대 후반 한국실로암선교회에서 설립한 장애인 인권단체인 ‘실로암사람들’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인권운동가의 길에 들어섰다. 한국여성장애인연합 공동대표, 실로암선교회 회장,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상임공동대표 등을 지냈다. 2008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18대 국회에 들어가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법률 4건을 발의해 제정했고, 집회장과 농성장 등 소외된 이들의 아픔이 있는 현장을 부지런히 찾아 다녔다.

그렇게 국회 의정활동을 끝내고 광주로 돌아와 장애인 인권운동 현장에 관심을 쏟고 있던 그에게 또 한번의 시련이 닥쳤다. 2013년 2월 간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수술을 받고 완치된 듯 했지만, 다른 장기로 전이돼 지난해 연말 ‘의학적 치료가 무의미하다’는 시한부 통고를 받았다.

그는 “눈앞이 캄캄하고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기도하며 안정을 찾았다. 육체적인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 덕분에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나, 괜찮아요.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라며 유언장도 미리 써두었단다. 그 사이에 재미를 붙인 그림도 마음을 다잡는 데 큰 힘이 됐다. “요즘 아침에 눈을 뜨면 ‘아, 오늘도 살아있구나’ 하며 감사해요.”

곽 전 의원은 “주변의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시간을 조금 더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장애인들이 스스로 사장이 돼 일하는 행복한 일터를 만드는 꿈”을 현실로 이루고 싶기 때문이다. “1급 장애인 여성이 휴식없이 12시간동안 일해 전자부품 2상자를 조립해서 버는 돈이 1만2000원이다.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을 받으면서도 늦둥이 딸의 미래를 위해 참고 일을 한다는 얘기에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그는 “협동조합 형태로 장애인 공방 사업장을 만들려고 한다. 장애인들이 스스로 사장이 되는 일터를 만들려고 진행중이다. 장애인들이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핸드 페인팅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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