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째 한-쿠바교류협회를 이끌고 있는 김이수 대표가 쿠바 수도 아바나를 방문했을 때 아이들과 함께한 모습.
|
[짬] 한-쿠바 교류협회 대표 김이수 원장
소외 이웃·광주항쟁 알리다 체포도
부산 ‘물만골’ 공동체 해제에 ‘실망’ 99년 쿠바 배낭여행…예방의료 감동
2006년 협회 만들어 민간교류 앞장
“가난해도 공부할 수 있는 의대가 꿈” 성형외과 개업의인 김 대표는 2006년 한-쿠바교류협회를 세운 뒤 쿠바를 이웃처럼 드나들며 도시농업, 의료복지, 문화교류, 한인동포 지원 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의료 학술대회 등을 열어 두 나라의 의료 발전에도 힘쓰고 있다. 그의 노력 덕분에 협회는 2012년 방한한 쿠바 경제사절단의 의전을 맡기도 했다. 그가 쿠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4년 부산대 의대 2학년 때이다. 한 선배가 그에게 “어떤 의사가 좋은 의사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사람답게 사는 것과 어떻게 해야 좋은 의사가 되는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 답을 찾으려고 역사·사회 공부를 하다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으로 쿠바 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체 게바라’를 알게 됐다. “한 명의 의사가 쿠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체 게바라의 정신적 유산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가늠할 수 없어요. 그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때부터 몸만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아픔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김 대표는 부산 지역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또 의대 방송부에 들어가 광주민중항쟁 관련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그는 86년 11월 선배 자취방에 숨어 있다 경찰에 붙잡혔고 곧이어 군대에 쫓기듯 입대했다. “주특기는 ‘일빵빵’(보병)입니다. 군 시절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됐어요.” 그는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영화를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의대로 돌아온 그는 노동자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독립영화를 만들어 학생회실에서 상영했다. 그는 “영화를 만들면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어두운 면을 더 깊이 알게 됐다”고 말했다. 98년 의사고시에 합격한 뒤에도 그는 영화를 만들려고 부산 연제구 연산동의 무허가 판자촌인 ‘물만골 마을’에 갔다. 그곳은 가난한 주민들이 하나로 똘똘 뭉친 공동체였다. 개발 바람을 타고 마을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주민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땅을 사 마을을 지켜냈다. 그는 마을 주민들을 힘껏 도왔다. 하지만 땅에 대한 권리가 생기자 주민들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그는 “모르는 사람한테도 인사를 건네고 따뜻한 밥 한끼를 선뜻 내주던 곳이었다. 나눔과 공유가 일상인 마을이었다. 소유는 소중한 가치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문득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그때 평소 알고 지내던 시민단체 회원 한 분이 쿠바를 소개해줬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99년 배낭 하나만 메고 훌쩍 쿠바로 떠났다. 그곳엔 공동체의 삶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특히 쿠바의 의료체계를 부러워한다. 쿠바 의사들은 병원 건물에서 살고 있다. 병원 문만 두들기면, 언제든 진료를 받을 수 있다. 24시간 응급의료 체계가 따로 필요하지 않다. 또 동네 병원에는 보통 2명의 의사가 있어, 한 명은 환자를 치료하고, 다른 한 명은 사회복지사와 함께 주민들의 집을 방문한다. 왕진 의사는 주민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생활수준, 직업 등 사회적 환경도 고려해 밀착 맞춤형 예방진료를 한다. 치료가 아닌 사회복지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는 “의사고시의 절대 명제엔 ‘의료는 수익창출의 수단이 될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수익만 따지는 우리 의료 현실에 견주면 참 부러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쿠바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에는 가난한 나라의 학생은 누구든 입학할 수 있어요. 이곳에서 배출한 의사들은 전세계 의료 수준이 낮은 곳으로 찾아가 환자를 돌봅니다. 저도 우리나라에 이런 의과대학을 세우고 싶습니다. 꼭 이루고 싶은 제 꿈입니다.” 부산/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