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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03 19:00 수정 : 2015.11.03 19:00

아시아태평양YMCA연맹 새 리더 남부원 사무총장


“한국 시민운동이 위기에 처한 시기에 떠나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한편으론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워낙 격차가 큰 아시아 27개 회원국을 이끌어갈 생각에 어깨가 무겁기도 하고요.”

지난 1일부터 아시아태평양 와이엠시에이(YMCA)연맹 사무총장으로 취임한 남부원(57) 전 ‘한국와이연맹’ 사무총장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1973년 고 이수민 목사 이후 40여년 만에 탄생한 한국인 사무총장이니 ‘영전’이자 ‘경사’가 분명하지만 당면한 과제들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남부원 사무총장
하지만 그는 지난주 홍콩의 ‘아태와이연맹’ 본부로 떠날 준비로 분주한 와중에도 한겨레신문사를 찾아와 앞으로 4년 임기 동안 펼칠 구상과 각오를 직접 전했다.

지난 7월 아태연맹 인사위원회에서 차기 사무총장으로 선임된 그는 이어 9월 대전에서 열린 ‘제19차 아태와이연맹 대회’에서 이미 자신이 이끌어갈 방향을 제시했다. 1903년 출범한 이래 110여년 만에 처음 이 대회를 주최한 한국와이가 명실상부한 아시아 기독교청년운동의 리더로 자리매김된 뜻깊은 자리이기도 했다.

“한국와이는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정체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바로 시민사회운동입니다. 개화기 미국에서 건너온 기독교단체이자 국제기구이지만 일제 식민지배에 맞선 민족운동·독립운동 등으로 초기부터 사회참여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70년대에는 군부독재에 저항하면서 자체 목적문에 ‘역사적 책임의식’을 명시해 놓았지요. 즉, 당대 사회가 고민하는 가장 중요한 대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던 것입니다.”

그는 이런 한국와이 운동의 유산과 경험을 각국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맞게 공유함으로써 전체 아시아와이가 민주적 시민사회 형성이나 강화에 기여하는 매개체나 촉매제가 되도록 만들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한국와이는 전국 60여개 지역에 10만여명의 고정 회원을 거느린 국내 최대 시민단체로서 시민사회운동의 주역으로 인정받고 있다. 90년대 들어 펼친 주민자치운동, 환경운동, 시민권익보호운동, 청소년운동 등을 통해 지역사회의 구심체로 뿌리를 내렸다. 2000년대 이래 ‘참여·정의·평화’로 압축할 수 있는 와이의 활동 반경은 곧 한국 사회의 주요 의제와 일치한다.

그가 스스로 정한 두번째 과제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재정립’이다. “제도적 교회의 틀과 이분법을 넘어 개인 신앙의 성숙과 책임있는 시민으로서의 삶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회적 영성의 개발은 이 시대 아시아는 물론 세계와이 운동의 사상적·운동적 좌표로 제시할 수 있는 중요한 담론들이라고 생각합니다.”

42년 만에 두번째 한국인 아·태 총장
고 이수민 목사 1973년부터 12년 재임
‘한국, 아시아 기독청년운동 리더 부상’

1978년 연세대 입학 기독학생회 활동
서울와이 간사로 시작 30년 ‘와이맨’
‘배려와 화합의 리더십’ 국제사회 인정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그리고 기독교의 복음에 근거한 사랑·평화·생명의 가치를 보편적인 시민운동의 영역에서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가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지닌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절실한 사회적 과제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이는 그가 2014년 ‘생명의 물결, 평화의 바람’을 주제로 한국와이연맹 결성 100돌 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면서 이미 역량을 쌓은 과제이기도 하다. 또 지난해 미국 덴버에서 열린 ‘세계와이연맹 대회 및 총회’에서 채택된 ‘수명 다한 한국의 핵발전소(고리 1호기 및 월성 1호기) 폐쇄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제안한 것도 그였다.

세번째 ‘남북 평화와 통일’은 그가 지난 4년간 한국와이 사무총장으로서 가장 역점을 뒀던 과제이기도 했다. 지난 9월 아태와이연맹 회원국 27개 나라의 평화운동 지도자 390명이 임진각에서 ‘한반도 분단 70돌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평화협정 체결 촉구 결의문’을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결의에 따라 그는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캠페인과 서명운동을 공동으로 전개하는 활동도 맡게 됐다. 이런 활동은 극보수 개신교단체들이 배타적인 기독교 신앙으로 오히려 사회 갈등을 유발하고 있는 최근의 흐름 속에서 한층 자별화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남 총장이 이처럼 종교와 국가의 벽을 넘어 국제적인 기독교 사회운동의 비전을 키워온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 답을 어림잡을 수 있다. 그는 한마디로 ‘정통 와이맨’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그는 중2 때 서울로 유학을 왔다. 방사선 전문의로 안동도립병원장을 지낸 부친은 은퇴 이후에도 동해의 진폐증 전문병원에서 10년간 봉사했다. 하지만 기독교 집안은 전혀 아니었다. 그가 교회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성고 시절 중학 동창생을 따라 은평성결교회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였다. 보수 성향의 교회였기에, 78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할 때까지 그도 복음주의 신앙에 기울어 있었다. 그러다 한 친구의 권유로 독일 진보신학자 본회퍼의 <옥중서간>을 읽고 “세계관이 깨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동기 법대생을 따라 사회과학 학습에 참여하면서 기독학생운동에 발을 디뎠다. 유신독재의 광기가 절정에 이른 70년대 말, 학생운동은 ‘젊음과 목숨까지 건 결단’을 요구했고, 그 짐이 너무 버거워 그는 고향으로 “자진 도피”를 하기도 했다. 그를 설득해 연대 기독학생회 부회장을 맡긴 73학번 선배가 바로 이덕승(녹색소비자연대 상임위원장)이었다. 신군부가 들어선 80년 후반 학내 성명서 배포 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10일 만에 훈방됐지만 그 경험이 사회참여운동에 더 깊이 빠지게 했죠.”

졸업 뒤 85년부터 전국연맹 간사로 와이 활동을 시작한 그는 아태연맹 아시아중견간사학교를 거쳐 87년부터 10년간 서울와이에서 시민논단·시민중계실·한강물되살리기운동·환경운동 등을 담당했다. 카투사에서 군 복무를 한 덕분에 영어 소통이 자유로운 그는 98년부터 4년간 아태연맹 프로그램 국장을 맡으면서 국제적인 연대 활동의 경험을 쌓았다. 다시 서울와이로 복귀해 내부개혁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2003년 전국연맹 정책기획국장, 2007년 광주와이 사무총장을 거쳐 2011년부터 전국연맹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안재웅 전 한국와이연맹 이사장은 90년대 말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부총무로서 홍콩에서부터 남 총장을 지켜봤다. 기독학생운동의 대선배이기도 한 그는 “한마디로 화합과 배려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녀 국제연대 활동의 최적임자”라고 평했다.

“나라 밖에서나마 ‘와이’가 한국 사회의 고민을 풀어나가는 주역으로서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작정입니다.” 남 총장은 2일 본부에 짐을 풀자마자 체코 출장으로 첫 집무를 시작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사진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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