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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11 21:09 수정 : 2015.11.12 01:20

최정순 우석대 초빙교수.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짬] ‘박순천 연구’ 출간 최정순 교수

최정순 우석대 초빙교수는 출판사에 다니던 2003년 국민대 정치학과 대학원 야간과정에 입학했다. 한국 야당사의 큰 여성 정치인 박순천 연구 논문으로 200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을 보완해 최근 <박순천 연구>(백산서당)를 펴냈다. 그는 공부를 결심했을 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죽을 것 같았어요. 여생에 무언가 한가지는 하고 싶었지요. 살아남기 위해,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해…, 그게 공부였죠.”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지난 7일 전북 부안에서 회장을 맡고 있는 이화민주동우회 일로 서울 나들이를 한 그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1978년·80년 투옥…이대 운동권 ‘전설’
83년 ‘민청련 이론가’ 이을호씨와 결혼
‘고문으로 정신착란’ 남편 25년간 고통

‘웅진’ 등 출판계 30년 ‘첫 여성임원’ 기록
2003년 야간대학원…정치학 박사로
“여성·헌신·통합 ‘박순천의 가치’ 절실”

진해여고 시절부터 그의 꿈은 정치가였다. 선생님들은 그에게 자꾸 “박순천 같은 정치인이 되라”고 이야기했다. 1975년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은 사회정의와 거리가 멀었다. 가만있기 힘들었다. 78년 이대 대강당에서 열린 채플 시간이었다. 그는 4천명 학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단에 올라 ‘8천 이화인이여’라는 격문을 읽었다. 유신헌법 철폐를 외쳤다. 구속돼 11개월 갇혔다. 80년 5·18 때는 복학생 신분으로 후배들을 이끌었다. 전두환 퇴진을 외치며 이대 구내식당에서 밤샘농성을 할 때다. 그가 부른 ‘백치 아다다’가 4천명 농성 학우들 앞에서 울려 퍼졌다. 다시 구속돼 1년2개월 복역했다.

그는 83년 8월15일 경기 가평의 동막이란 곳에서 운명처럼 남편을 만난다. 그해 9월 결성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의 준비 모임이었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인 남편 이씨는 민청련 이론담당이었다. 군사정권에 맞서 이길 수 있는 과학적 운동방법론 제시가 그의 몫이었다. 민청련을 합법(오픈)과 비합법(언더) 조직으로 이원화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때 남편의 탁월한 설명에 감복했지요.” 그렇게 ‘민청련 1호 부부’가 됐다.

85년 9월2일, 남편은 민청련 의장 김근태보다 이틀 앞서 체포됐다. 첫아이 백일 무렵이었다. 둘째는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김근태를 죽이는 근거’를 찾기 위한 고문이 그의 육체와 정신을 파괴했다. 운동권에서 손꼽히던 ‘수재 청년’ 이씨는 결국 남영동에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인다. 최 교수는 86년 4월 만삭의 몸으로 김수환 추기경의 방을 찾았다. 손에는 흰 현수막이 들려 있었다. “‘남편이 석방되지 않으면 여기서 죽겠다’고 했죠. ‘아비 없는 아이를 낳을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소파에 드러누웠죠. 6시간 뒤 추기경께서 어딘가 전화를 걸어 호통을 치더군요. 풀려날 것이라는 추기경의 말을 믿고 농성을 풀었어요.”

 결국 둘째가 태어난 날,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남편은) 그런데 아이를 보고도 반가워할 줄 모르더군요.” 그는 그때부터 남편의 고문 후유증과 맞서야 했다. 힘든 싸움이었다. “남편은 2011년까지 25년간 1년에 3개월 정도는 정신이상 증세로 입원을 했어요. ‘살아남아 증언해야 한다’는 생각이 고통 속에서도 견디게 한 에너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집 밖에서 그를 지켜본 이들은 유능한 커리어우먼으로 기억한다. 83년 시인 하종오의 주선으로 윤구병씨가 편집주간으로 있던 웅진출판에 입사했다. 국내 중견 이상 기업에서, 오너 일가를 빼면 첫 여성 임원이 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한솔교육 상무로 스카우트돼 2년6개월 일하다 다시 웅진으로 돌아와 2012년 퇴직했다. 최종 직위는 전무였다.

퇴직 뒤 그는 ‘인생을 확 바꾸자’는 생각으로 남편 고향인 전북 부안으로 귀농했다. “고향에 온 뒤부터 남편은 입원을 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정신적으로 괜찮아요. 기적 같은 일이죠. 남편은 주역이나 성경 같은 근본이 되는 공부를 하고 있지요.”

최씨는 “박순천의 삶이 저와 닮은 데가 많죠”라고 했다. 박순천(1898~1983)은 누구인가? 정부 수립 이후 7대 국회 때까지 5선을 했다. 여성 정치인으로서 독보적인 성공이다. 65년 통합야당 민중당 당수를 비롯해 야당 총재를 두번이나 지냈다. 이승만의 부정부패와 독재에 강력 저항했고, 간통죄 남녀 쌍벌 적용, 생리휴가 도입과 같은 여성의 권리 확보를 위해 지도력을 발휘했다.

‘지금 왜 박순천을 기억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는 행동양식에서 민주주의자였지요. 상향식 공천, 투명한 정치자금을 주장했죠. 이승만과는 친했지만 그의 독재엔 항의하고 싸웠어요. 권모술수와 같은 정치의 악마성에 저항했어요.” 그는 박순천이 매우 현실적이고 쉬운 언어로 대중에게 다가섰다고 했다. “연설을 너무 잘해 항상 마지막 연사였죠. 박순천의 연설이 끝나면 청중들이 다 가버리니까요.”

정치인으로서 박순천의 성공 요인은 뭘까. “3·1 운동에 참여해 1년6개월 옥고를 치렀지요. 이게 밑천이었습니다. 통일이나 독립에 대한 열망이 매우 강했어요. 여성 조직 기반도 도움이 되었지요.” 그는 박순천이 대통령 출마에 소극적이었던 게 못내 아쉽다. “2공 때 박순천은 실세였어요. 민정이양 때 윤보선 대신 출마했다면 민주주의 가치가 더 진전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의 한국 여성 정치는? “여성 의원 10%는 구색일 뿐, 30%는 넘어야죠. 그래야 패러다임이 바뀝니다. 박순천처럼 민주주의 가치를 지닌 최고 지도자도 많아야 합니다.” 한국도 여성 대통령, 여성 총리를 배출하지 않았나? “대통령이 여성이면, 장관의 반은 여성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성 정치가 제대로 이뤄집니다. 현 정부에 여성 장관이 몇명이나 되나요?”

첫 여성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박순천이 지녔던 여성주의나 민주주의 가치, 헌신성 그리고 공적까지, 그 무엇도 지금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찾을 수 없습니다.” 박순천은 정계를 떠난 뒤 유신시절 ‘육영수여사 추모사업회’ 이사장을 맡아 논란에 휩싸인다. “당시 박순천의 행보에 유신 반대자들이 절망했죠. 그가 잊혀진 이유이기도 해요. 여성 운동가들도 박순천을 연구하지 않았으니까요.”

 과거 정치권 입문 권유도 받았다는 그에게 이 시대 여성 리더십에 대해 물었다. “한국 사회의 남남 또는 남북 갈등은 대결구도로 풀 수 없어요. 상호 존중, 상호 의존이 필요하지요.” 통합이 요구되는 시대에 여성 리더십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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