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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18 20:18 수정 : 2015.11.18 22:23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동문 모임인 문화구름의 이용배(왼쪽 둘째) 대표와 회원들이 13일 ‘문화’ 관련 자료로 가득 찬 이종인(맨 오른쪽) 선생의 서울 안암동 옥탑방에서 함께했다. 사진 김경애 기자

[짬]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동문 모임 문화구름

2013년 8월 어느 날 서울 대학로 한구석에서 ‘뜬구름 잡는 사람들’이 모였다. 고 강준혁 성공회대 문화대학원장의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만난 동문들이었다. 이들은 강 원장이 이날 ‘스승’으로 소개한 ‘대한민국 1호 문화정책가’ 이종인(81) 선생을 모시고 매달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문화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서 시작하지만 그 상상력을 모아 문화정책을 만들었다”는 첫 말씀을 따라 모임의 이름도 만들었다. ‘문화구름’, 마침 이 선생과 동문 8명으로 모두 9명이 모였다는 의미도 담았다.

그때부터 매달 한차례씩 문화구름은 ‘이종인 선생과의 대화─한국의 문화정책과 행정, 그 역사의 울림과 현장의 교훈 그리고…’라는 제목으로 다섯차례 이야기방을 열었다. 그뒤로 꼬박 2년간 구술한 내용에서 알갱이를 뽑아 회고록 <이종인의 처음문화정책>(다랑어스토리 펴냄)을 펴냈다. 문화구름은 19일 오후 8~10시 성공회대 미가엘관 칸투치오에서 출간기념회를 연다.

‘1호 문화정책가’ 이종인 선생 만나
2013년부터 2년간 매월 구술 채록
처음문화정책 펴내 19일 기념특강

이 선생 ‘사상계’ 5년 거쳐 공직 입문
1974년 문예진흥원 개원때부터 30년
문화정책·행정 기반 다진 ‘산 증인’

이종인 선생은 충북 청원군(현 청주시)에서 태어나 청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7남1녀의 3남으로 넉넉지 않은 형편이어서 1954년 육사에 먼저 합격했으나 고교 선생님들이 대신 입학지원서를 내준 덕분에 서울대 사회학과를 다녔다. 1959년 <사상계>에 입사해 65년까지 편집부장 겸 영업 담당으로 일했다. “국방연구원 소속 번역병이어서 출퇴근 복무를 했는데, 제대하면 다니던 성당의 신부님 주선으로 <경향신문>에 기자로 입사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말년 3개월 동안 장준하·김준엽 선생이 거의 매일같이 버스정류장에서 납치하듯 끌고 가서는 꼬시는 거예요. ‘막걸리 초려’라고나 할까.(웃음)”

그는 72년 문화공보부 홍보조사연구소 전문위원으로 공직에 첫발을 디뎠다. “장 선생의 정계 진출을 계기로 <사상계>를 그만뒀어요. 그 뒤 유한양행·여원사·삼화인쇄소 등에서 광고기획 겸 카피라이터로 일했는데, 그 경력 덕분에 공무원이 된 거예요.”

마흔살이던 74년 신설된 문예진흥원으로 옮긴 그는 20여년간 한국 문화행정과 정책의 기반을 닦았다. 86년까지 지원국장·기획실장을 맡아 문화예술통계조사, 공모심사제, 문예진흥기금 적립제를 도입했다. <문예진흥>과 <문예연감>도 창간했다. 94년까지 8년간은 국내 첫 문화정책 연구기관인 문화발전연구소 초대 소장 겸 문예진흥원 상임이사로 일했다.

특히 89년 연구소의 연수관에서 개설한 ‘공연예술아카데미’는 문화교육 강좌의 시초였다. 강사진은 이상일(이론), 문호근(연기 및 연출), 양혜숙(극작 및 평론), 신선희(무대미술) 교수 등 당대 최고 전문가였다. 공간사랑 기획자로 명성을 날렸던 강 원장도 강사로 합류하며 그와 첫 인연을 맺었다. 연수관에서 진행한 프로그램들은 훗날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모태가 됐다.

대학 시절 친구였던 이어령 교수는 90년 초대 문화부 장관이 되면서 그가 입안한 ‘문화발전 10개년 계획’을 전격 시행했다. 91~2001년 해마다 분야별로 지정했던 ‘문화·예술의 해’도 그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전국적으로 ‘문화학교’도 만들어 나란히 초대 교장과 사무총장을 맡았다. ‘문화예술예산 1% 확보’ 등을 통해 우리 문화정책사에 획을 그은 ‘전성기’였다. “그때 문화발전연구소 사무실이 국립현대미술관 자리였던 덕수궁 안에 있어서, 공무원들 사이에서 ‘덕수궁 선생’으로 불렸죠.”

이 선생은 94년 6월 한국문화정책개발원(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전신) 개원과 함께 초대 상임이사 겸 연구실장을 맡았다. 불과 2년간이었지만 이때 연구용역사업으로 진행한 ‘한국의 지역축제’ 보고서는 지금도 논문에 많이 인용되는 책이 됐다. 또 시·군·구 단위 문화자원들을 총망라해 정리해낸 <한국의 향토문화자원>(전 6권)은 2001년 ‘지역문화의 해’ 사업에 기본 자료로 활용되면서 ‘지역문화네트워크’ 결성의 발판이 됐다.

96년 일선에서 은퇴한 그는 한국문화행정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최근까지 문화정책과 행정, 문화예술교육, 지역문화정책 등등 광범위한 연구활동과 정책 제언을 해왔다. 일찍이 75년부터 서울대·추계예술대·성공회대 등 수많은 강단에 서서 후학 양성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선생의 자택인 서울 안암동 다세대 빌라의 작은 옥탑방에는 평생토록 모아온 자료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40㎏ 될까 말까 한 마른 몸집에 빨간 딱지 소주와 값싼 ‘라일락’ 담배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그는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연구소를 닫은 뒤에도 책과 자료를 버리지 않고 소장해왔다. “내가 일부러 모은 게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자료가 모여들었어요.”

“처음엔 옛날이야기를 듣는 재미로 가볍게 시작했죠.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는 문화정책의 길목마다 선생님이 계셨고, 그 자신 문화사이자 생생한 현장이셨습니다. 우리끼리 흘려버리기에 너무 아까워, 부족하나마 우선 구술집으로 묶어 기록을 남기고 나누기로 했어요.”

문화구름의 대표이자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동문회장인 이용배 교수(계원조형예술대학 애니메이션과)는 “큰 거인 이종인 선생을 만났다”고 말했다.

정부는 수년 전 선생의 공을 평가해 문화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정작 공무원 연금 대상이 아니어서 기초생활지원금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는 형편으로 알려졌다. 이 교수를 비롯해 김보경·변혜원·심인화·이근욱·장미아·최낙용·최연희씨 등 문화구름 회원들은 회고록 출간을 계기로 ‘이종인의 처음문화정책 연구소’ 만들기도 추진할 계획이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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