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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26 18:49 수정 : 2015.11.28 10:58

김경남 목사

[짬] ‘보은’의 에세이집 펴낸 김경남 목사

“내 60여 년 평생을 되돌아보니, 나의 삶은 내 주변의 많은 분들의 은혜가 가져다 준 기적의 연속임을 깨닫게 되었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어떤 시인은 노래했지만, 내 일생의 팔 할이 그분들의 은혜였다.”

 2008년에 전북 무주로 ‘제2차 귀농’을 했다가 과로로 인한 허리 통증 치료차 여수에 내려가 있던 김경남(66) 목사는 2013년 2월, 심혈관질환으로 갑자기 쓰러졌다. 긴급호송된 병원에서 막힌 혈관을 뚫어주는 ‘스텐트’ 응급시술을 4곳이나 받은 끝에 기사회생한 그는 병상에서 지난 삶을 되돌아보다 새삼 ‘그 분들의 은혜’를 절감했다.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 서울대 후진국사회문제연구회(후사연) 멤버로 저항운동에 뛰어들었고, 한국교회협의회(KNCC)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 도쿄자료센터 등을 이끌었던 김 목사는, “그럼에도 나는 단 한 번도 그분들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살아 온 것”을 그때 깨달았다고 했다.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래서 남은 삶을 보은을 하며 살자고 결심했다.”

서울대 ‘후사연’ 때부터 반유신투쟁
기독교교회협·기독교사회문제연 거쳐
90년대 중반 도쿄자료센터 소장

귀농생활하다 다쳐 요양중 심근경색
4차례 응급수술 끝에 기사회생
병상에서 ‘민주화 동지들’ 회고록

 얼마전 <당신들이 계셔서 행복했습니다>(동연 펴냄)는 책을 낸 김 목사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한국민주화운동에 헌신했고, 나를 도와준 분들이지만 이름없이 숨어 있거나 묻혀 있던 국내외 인사들이다. 그들의 행적을 기록해 역사로 남겨야 한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보은이 아니겠나 생각했다.” 그의 목소리는 약간 느렸지만 여전히 굵고 힘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민주주의의 퇴보를 얘기하고 겨울 공화국이라고도 한다. 이 보은기가 1970년대의 엄혹했던 시절부터 함께 투쟁했던 이들에게는 그 시절 기억을 새로이 하고, 그 시대를 모르는 젊은이들이나 현 시국을 걱정하는 분들에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얻는데 조그마한 보탬이 됐으면 행복하겠다.”

 원래 김 목사는 ‘보은 기행’부터 시작했다. 비록 아직도 “30분 안에 병원으로 달려갈 수 있는 권역”을 벗어날 수 없지만, 심신을 어느 정도 추스릴 수 있게 된 그는 국내외의 ‘그 분들’을 하나 둘 여수로 초청해 남도 기행과 한국사회 둘러보기의 안내자역을 자임했다.

 올해 1월부터는 매주 한 번 꼴로 페이스북에 은혜를 입은 분들과의 인연을 매개로 그들이 누구인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을 중심으로 ‘보은기’도 쓰기 시작했다. 책은 그 글들을 엮고 보완한 것이다. 책은 그런 인연들에 대한 기억뿐만 아니라 김 목사 자신이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게 된 경위와 구체적 활동, 인도·버마(미얀마) 등에서의 빈민 신교와 주민조직 교육활동 내용까지 담고 있다. 그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지 부끄럽다”고 했으나, 한국민주화운동사와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사의 귀중한 자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목사는 “40여 년간 내 삶을 움직여 온 내 신앙의 아버지” 박형규 목사와 권호경, 김관석, 김재준 목사, 안병무 교수 등과의 인연, 나병식씨 등 학교 동기들과 제일교회 후배들, 후사연과 민청학련 동지들, 도시빈민·산업 선교활동 활동가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1986년부터 1년 반 정도 체류했던 독일, 그리고 1992년 3월까지 4년 반을 머물며 한국 민주화운동을 전 세계와 연결했던 일본 도쿄자료센터 소장 시절 맺었던 인연들을 되돌아봤다.

 “당시엔 출국 여권을 발급받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특히 운동권으로 찍힌 사람들은 더 그랬다.” 비밀 첩보작전을 하듯 독일을 경유하는 우여곡절 끝에 1987년,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 도쿄자료센터에 당도한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과 관련된 자료들이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자세히 읽어보니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사선) 간사 시절에 노동·농민·빈민·청년과 학생·여성 등 5개 분야 단체들의 활동 보고를 토대로 내가 작성하고 영역한 정세 분석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문서들이 도쿄에 전달돼 월간 <민주 동지>로 재탄생한 뒤 전 세계 민주동지회로 보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엄혹했던 독재정권하에서 위험한 자료 국외 반출 작업은 외국인 협력자들(‘자료운반밀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일본 이와나미 서점의 월간지 <세카이(세계)>에 장기 연재돼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한국으로부터의 통신’도 그런 자료를 토대로 작성됐다. 그 연재물 최종 원고 작성자는 일본 체류 중이던 지명관 교수였다. 그 전까지의 반출과 보관·정리 비밀작전을 수행한 이들이 김관석 목사, 오재식 아시아교회협의회 도시농어촌선교부 간사, 이인하 재일대한기독교회 총간사, 나카지마 일본그리스도교협의회 총간사, 마에지마 목사, 도쿄자료센터 실무책임자 재일동포 권정인씨, 캐나다인 메리 콜린스 등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세카이> 연재를 계속하면서 관계자들을 끝까지 보호한 이가 “진정한 진보주의자” 야스에 료스케 이와나미 편집장, 그리고 그 동료들이다.

 유신헌법 공포 다음해인 1973년 봄 ‘남산 부활절 예배 사건‘으로 박형규 목사 등 기독교 목회자들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난 뒤 김관석 당시 한국교회협의회 총무는 일본에 가서 재일 한국인·일본인 목회자들과 만나 대책모임을 갖고 한국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국제적인 연락·지원망을 만들기로 한다. 그것이 1970년대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을 전 세계에 조직적으로 알리고 재정적으로 지원한 일본·미주·유럽 기독교 단체의 한국 또는 아시아 담당 실무자들 모임인 ‘라운드 테이블’의 모태가 됐다. 2007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발행한 <시대를 지킨 양심들>(짐 스텐츨 지음, 최명희 옮김)은 한국민주화운동 자료 국외 반출 외국인 ‘밀사’들의 체험담을 정리해 놓은 책인데, 한국민주화운동이 보편성을 지닌 전 세계적 차원의 운동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김 목사가 도쿄자료센터 소장으로 ‘발탁’돼 은밀하게 그 세계사적 임무를 수행한 것도 그런 국내외적 맥락 위에서 이뤄진 일이다. 마나베 유코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가 쓴 <열사의 탄생-한국 민중운동에서의 한의 역학> 번역서도 거의 동시에 출간한 김 목사는 “지금 다시 제3의 민주화운동이 필요한 때”라고 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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