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완순 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 사진 손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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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 무용가 육완순 씨
63년 국내 첫 이대 무용과 ‘제자 양성’
“멘토 강원용 목사 ‘개척자 정신’ 버팀목” 75년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 창단
4·5일 제자들과 40돌 기념 춤판
“춤은 동시대 삶과 시대정신 반영” -먼저 1961~63년 미국 유학시절 때 얘기부터 시작할까요? “컨템퍼러리무용이 뭔지부터 얘기하죠. 현대의 춤, 당대의 가장 앞서가는 춤, 내 삶을 표현하는 춤, 관객의 관심사를 보여주는 춤입니다. 제가 이대에 들어갈 땐 무용과가 없었어요. 그래서 한국전쟁 피란시절 부산에서 체육과로 입학했어요. 이대가 서울로 돌아온 뒤 유학을 꿈꾸었는데요, 영어 시험을 몇 번 떨어진 뒤에야 미국 일리노이대학의 ‘티칭 펠로우십’ 장학금을 받았어요. 뉴욕에 있는 마사 그레이엄의 ‘컨템퍼러리 댄스 스쿨’에 가보니 간판부터 너무 멋있어요. 무엇보다 20세기 최고의 독창적인 무용가에게 세상에서 가장 앞서가는 춤을 배우니까 힘들지만 너무 행복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는 어떻게 가르쳤나요? “그때는 한국이 너무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이라, 유학생들이 귀국을 꺼리는 분위기였어요. 하지만 저는 배운 걸 빨리 학생들한테 전수해주고 싶었어요. 미국에서 멕시코 출신 현대무용가 호세 리몽(1908~72), 아메리칸 댄스시어터 설립자 앨빈 에일리(1931~89)한테도 배웠지만, 80% 이상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을 가르쳤어요. 그땐 무용과도 이대밖에 없었고, 현대무용가도 저밖에 없었어요. 서울대, 숙명여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죠. 첫 제자들인 김화숙(원광대)과 박명숙(경희대) 교수도 이제 정년퇴직했고, 창단 멤버는 한성대 박인숙, 수원대 양정수 교수만 학교에 남아 있네요.” -1975년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을 만드셨는데요. “대학에서 한 10년 인재들이 축적되니까, 무용단을 창단했지요. 그때 이청자(전 인천시립무용단 단장)·김옥규(미국 엘에이 라인댄스협회 회장)·이정희·김복희·김화숙·박명숙·박인숙·양정수씨 등 8명으로 구성했어요. 그동안 키운 제자가 100명쯤, 현역은 50명 정도인데 무대에 서고, 단장도 하고, 대학과 중고교에서 가르치고, 공연기획도 합니다. 어느덧 40년이 지나 한국에 컨템퍼러리 무용이 뿌리를 내리고 거대하고 무성한 나무가 됐습니다. 공연 제목 그대로 ‘아름다운 40년’입니다.” -창단 초기에는 무척 힘드셨다던데요. “제겐 멘토같은 분이 계신데 바로 강원용(1917~2006) 목사님입니다. 전주여중 다닐 때 강 목사님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아 인사를 드렸어요. 부산 피란시절 목사님을 찾아갔어요. ‘어, 육완순!’ 하고 알아보는 거에요. 나중에 목사님이 계시던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에 다녔습니다. 75년 목사님을 찾아가 ‘당대의 가장 앞서가는 컨템퍼러리무용단을 만들고 싶습니다’라며 도움을 청했어요. 수유리 크리스챤아카데미의 팔각정을 내주셔서 무용으로 소극장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죠. 그런데 누가 외진 곳에 구경을 옵니까. 강 목사님이 버스를 전세 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서 관객을 태워다 날랐어요. 강 목사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너희는 춤의 개척자다. 개척자라서 힘이 든다. 그 정신을 잊지 말라.’” -팔순이 넘으셨는데도 현역처럼 분주해보이는데. “안무가로 활동하니까 날마다 무용 연습을 계속하고, 늘 움직입니다. 그리고 근처 공원을 산책합니다. 저로서는 여유가 있게 생각하는 행복한 시간이지요.” 무용단의 40돌 기념 춤판 ‘아름다운 40년’ 첫날인 4일에는 이윤경의 <홀로 아리랑 2015>, 김혜숙의 <어느 어두운 밤에>, 김희진의 <인사이드>, 김정은의 <궤도 I>, 장은정의 <아임 히어, 벗 나씽…>, 이정희의 <산다는 것은…>, 박인숙의 <마리아 콤플렉스Ⅲ>이 무대에 오른다. 이어 5일에는 박명숙의 <초혼>, 박소정의 <숨, 놀, 춤>, 안신희의 <타임즈>, 정정아의 <꽃피는 봄이 오면>, 김원의 <빙 인발브드 2015-우연을 말하다>, 황미숙의 <진공>, 육완순의 <실크로드>를 감상할 수 있다.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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