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2.10 18:58
수정 : 2015.12.11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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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디자이너 홍미화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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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첫 네팔 패션쇼 다녀온 디자이너 홍미화 씨
지난달 그가 ‘네팔로 패션쇼를 선물하러 간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의아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지난 4·5월 80여년 만의 강진이 수도 카트만두를 비롯한 대도시 지역을 강타해 대참사를 겪은 재난지역에서 ‘호사스런’ 패션쇼라니, 언뜻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뒤 ‘지구촌 문화교류 네팔패션쇼를 잘 마치고 돌아왔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카트만두 외곽의 바그돌 유니버설센터(11월7일)와 중심가 타멜(11월10일)에서 두 차례 쇼를 진행했어요. 특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유서깊은 파탄의 박물관에서 할 예정이었는데 기름 부족과 전력난으로 사용할 수가 없었어요. 현지 한인 한선미(게스트하우스 짱 대표)씨의 배려로 앞마당에서 판을 벌였어요. 무대엔 조명도 없고 현지 주민모델까지 뽑아 세워야 해서 기진맥진했지요. 많은 분들의 도움과 수고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특히 지진으로 철근들이 헝클어진 폐허에서 대나무와 풀들이 자라는 소박한 무대여서 더 기억에 남아요.”
지난달 카트만두서 ‘고마워요 네팔 쇼’
현지 야생초 ‘네틀’로 천연원단 개발
즉석 선발한 주민들 모델로 ‘활약’
“재난 시름 잊도록 일상 복원 선물”
대구 속옷공장집 태어나 일본 유학
파리 데뷔 쇼부터 ‘자연주의’ 고집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 ‘홍미화’로 잘 알려진 패션디자이너 홍미화(사진)씨를 지난달 말 서울 장충동 작업실에서 만나 궁금증을 풀어봤다.
“패션쇼는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수년 전부터 네팔과 인연을 맺어왔어요. 패션쇼도 애초 5월에 열기로 현지 기획사와 계약을 맺고 준비했는데 지진으로 취소됐어요. 하지만 어떻게든 네팔 사람들에게 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무리인 줄 알면서도 강행한 거예요.”
맨 처음 그를 네팔로 이끈 것은 히말라야 지역에서 자라는 야생초 ‘네틀’이었다. 마직보다는 가늘고 부드러운 탄력을 지닌 친환경 천연섬유의 원료로 인기있는 식물이다. 그는 네틀을 주 소재로 직접 원단을 개발해왔고, 이번 컬렉션에서 낯선 외지인에게도 눈을 맞추고 손을 모아 “나마스테!” 인사를 나누는 네팔인들의 어진 마음과 따뜻한 감성을 닮은 자연주의 패션 60벌을 선보였다.
“현재 지구촌에 뿌려지는 살충제와 제초제의 25%는 면직물 원료인 목화 재배에 쓰이고 있대요. 그래서 면을 대체할 직물을 찾는 게 과학자는 물론 우리 패션 종사자들의 과제지요. 구석기 시대 인류 최초의 옷감으로 불리는 네틀을 지금껏 잘 보존해온 네팔 사람들에게 세계인들이 감사를 하게 될 거예요. 천재지변 속에서도 오염되지 않고 지켜온 땅과 마음이 고마웠어요.” 이번 쇼의 제목을 ‘고마워요, 네팔!’(THANKS NEPAL!)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그는 국내외 패션계에서 자연주의 패션작가, 로맨틱 디자이너, 에코디자이너 등으로 불려왔다. 1993년 파리 프레타포르테 데뷔 때부터 그는 화려한 조명의 런웨이를 거부했다. 대신 뱅센 숲속의 빈 터에서 한국 고유의 ‘백의호상’(白衣好尙) 디자인으로 컬렉션을 발표했다. 이어 센강에 떠 있는 배, 오래된 교회, 서커스장, 박물관 등등 일상생활 공간에서 이색 패션쇼를 열었다. 한복 치마저고리의 여유로운 실루엣과 백의민족의 흰색을 응용한 초기작들은 ‘마치 산과 들과 강물로 옷을 지은 듯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계적인 컬렉션 무대에 나가 보니 새삼 의문이 들었어요. 파리, 밀라노, 뉴욕, 런던에만 패션이 존재하는가? 서구 자본주의 논리와 문법으로 획일화된 패션 아닌가? 어느 나라나 민족 고유의 패션을 지니고 있으니 새로운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것도, 네팔처럼 가난하지만 오랜 정신문명을 지켜온 나라에 주목한 것도 그런 이유였고요.”
‘섬유 도시’ 대구에서 여성용 속옷 공장 집 딸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맘껏 옷을 만들고 싶어 원단을 들고 가출했을 정도로, 운명처럼 자연스럽게 패션디자이너의 길을 걸었다. 86년 일본문화복장학원을 졸업한 뒤 일본인 남편과 결혼하면서 도쿄를 기반으로 파리나 뉴욕 진출 제안도 받았지만 이듬해 데코의 ‘텔리그라프’ 디자인실장을 맡아 귀국해 지금껏 한국 대표 중견 디자이너로 자리를 잡았다.
“대중교통 문제와 전력난 등으로 대대적인 홍보나 초청이 불가능했어요. 그 대신 행사장 인근 주민들을 다급하게 초대했는데, 재난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고 밝은 표정으로 쇼를 즐기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어요. 마침 쇼 다음날부터 네팔의 최대 명절인 다사인 기간이어서 다 함께 먹고 마시며 흥겨운 뒤풀이도 했어요. 5일간의 축제 동안 거리마다 밤새 춤추고 노래하는 소리에 잠을 설칠 정도였고요.”
‘홍미화 작품의 팬’으로 인연을 맺어 이번 쇼에서 기꺼이 ‘모델 재능기부’를 한 화가 정상명씨와 풀꽃평화연구소 일행은 “느긋한 마음으로 서로 배려하며 재난을 이겨내는 네팔인들의 심성에서 오히려 배울 점이 많았다”고 감동을 전했다.
홍씨는 ‘구호품이나 동정 어린 시선보다는 재난 이전과 같은 일상의 복원이 절실하다’는 네팔 사람들에게 패션쇼가 ‘치유의 선물’이 됐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서구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지구촌 구석구석의 삶과 감정을 옷으로 표현해내려는 그의 시도가 어디로 이어질지 기대된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사진 풀꽃평화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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