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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4.20 18:37 수정 : 2016.04.22 16:25

재일 원로시인 김시종씨. 사진 정대하 기자

[짬] 광주 방문한 재일 시인 김시종 씨

“이 졸시를 쓴 게 절명하시고 두 달 뒤였습니다.” 20일 오전 10시50분 광주광역시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은 재일 원로시인 김시종(87)씨는 박관현(1953~1982) 열사의 묘지 앞에서 ‘입 다문 말-박관현에게’라는 자작시를 낭송했다.

박관현은 1982년 10월 광주교도소에서 5·18 진상 규명과 재소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40일 동안 단식투쟁을 하다가 세상을 떴다. 김 시인은 “광주는 요구이고/ 거절이고/ 회생이다…이 밤의 깊이는/ 부끄럼없이 죽은 젊은이의/ 원통한 마지막 숨을 거둔 검은 휘장”이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광주사범때 제적…‘어머니의 땅’ 제주로
4·3항쟁 겪은 뒤 밀항해 오사카 정착
“일본에 복수하는 심정으로 일본어 시”

80년 ‘학살’ 충격에 ‘광주시편’ 출간
2014년 낸 ‘한국어판’ 5·18묘지에 헌정
“팽목항 참배…생각할수록 기묘한 사건”

그는 이날 박 열사의 묘지 앞에 시집 <광주시편>(한국어판) 다섯 권을 올렸다. 83년 일본에서 먼저 낸 이 시집엔 그가 광주항쟁을 소재로 3년 동안 쓴 작품 21편이 들어 있다. 그는 80년 5월20일 일본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광주의 급박한 소식을 듣고 “일은 언제나 내가 없을 때 터지고/ 나는 나 자신이어야 할 때를 그저 헛되이 보내고만 있다”(‘바래지는 시간 속’)고 울었다. 이 시를 통해 “관여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괴로움과 고통에 가득 찬 마음”을 표출했다. ‘광주시편’ 한국어판은 2014년 5·18기념재단이 나서 출판했다. 하지만 그해 건강이 허락지 않아 올 수 없었던 그는 2년 만에 재단 초청으로 광주를 찾았다.

김 시인은 이날 박 열사의 동생 박관선(53)씨를 소개받고 “어이구” 하며 손을 꼭 잡았다. 묘지에 바친 술을 한 모금 음복한 그는 “말 없는 추모로 무언의 헌주를 올린다”고 했다.

그가 광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청소년 시절이었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만약 개가 크는데 그 줄이 목을 파고들면 어떡하나 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것이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클레멘타인의 노래’)던 소년이었다. 그에게 광주는 “사춘기의 땅”이었다. 42년 명문 광주사범에 입학한 그는 최현 선생이 운영하던 광주 등불학습소에서 책을 읽고 공부했다. “그분은 낮에는 농민들과 일하고 밤에는 농민들과 교류하면서 야학을 했다. 등불학습소에서 배운 선생의 가르침이 내겐 일생 동안 가장 큰 공부였다.”

삶의 방향을 정해준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졌다는 소식에 김 시인은 “저 멀리 내가 스쳐 지났던 거리”, 광주에서 터져 나오는 “진달래로 타올라서 피의 우렁찬 절규”에 몸부림쳤다. 그는 “5·18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를 조국으로 이끌어주고 조국에 눈뜨게 해준 신성한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서시’라는 작품에서 “나는 잊지 않겠다/ 세상이 잊는다 해도/ 나는, 나로부터는 결코 잊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광주사범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4학년 때 제적당한 그는 “어머니의 땅”인 제주로 건너갔다. 48년 4·3항쟁에 참여하고, 49년 5월 일본으로 밀항해 조선인이 모여 살던 오사카의 이쿠노에 정착했다. 그는 오사카문화학교 강사와 현립고교 조선어 담당 교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문화·교육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재일’의 삶을 살고 있다.

“김시종 시인은 자신은 ‘일본어 아닌 일본어’로 시를 쓴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모국어 대신 강제로 자신의 의식을 형성하게 했던 일본어를 향해 복수하는 심정으로 일본어로 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그의 ‘광주시편’ 한국어판을 번역한 김정례 전남대 교수(일문학과)의 말이다.

김 시인은 재일조선인 동인지 <진달래>(1953), <카리온>(1959)을 창간했고, 86년 <재일의 틈에서>로 ‘제40회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92년 <원야의 시>로 ‘오구마 히데오상’ 특별상, 2011년 <잃어버린 계절>로 ‘제41회 다카미 준상’을 받았다. 2015년 12월에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 상황과 평생 대면하고 맞서온 자서전 <조선과 일본에 살다>로 우수 산문작품에 주는 ‘오사라기 지로상’을 수상했다. 최근 같은 제목의 한글판(윤여일 옮김·돌베개 펴냄)이 나왔다.

그는 “시인이자 사상가이고 철학자이며 운동가로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온 이 시대의 경계인”으로도 불린다. <경계의 시>와 <잃어버린 계절> 시집도 냈다. ‘광주시편’ 한국어판 간행에 부치는 글에서 그는 “98년 10월, 한국 입국을 허가하는 임시 여권을 발급받아 무려 49년 만에야 잡초로 무성해진 부모님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책에서 “90년대 초까지도 조선적을 보유한 재일 외국인 정주자였다”고 토로한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에서는 민족허무주의자이자 반조직분자라고 지탄을 받는 한편, 조선총련과 대립하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서는 반한분자, 북한 찬양자로 불리며 기피 대상이 되었다.” 그는 2003년 말 “1년에 한두 번 성묘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다.

그는 19일 전남 진도 팽목항을 먼저 찾아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위로했다. 이어 이날 5·18묘지 방문 때도 양복 깃에 세월호 희생자 추모의 의미를 담은 노란 리본을 달았다. 김 시인은 “안타깝고 슬프다. 배가 기울어져 상당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왜 침몰될 때까지 방치됐는지, 생각할수록 알 수 없는 기묘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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