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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05 19:02 수정 : 2016.05.06 14:20

이만주 작가

[짬] 늦깎이 춤비평가에서 시인으로…이만주 작가

시 몇 구절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인도 있었다. 불온한(?) 사상을 지닌 시인의 시집을 지녔다는 것만으로 감옥에 가기도 했다. 그런 엄혹한 시절도 아닌 지난해 연말, 60대 중반에 ‘목숨 걸고’ 첫 시집을 낸 늦깎이 시인이 있다. <다시 맺어야 할 사회계약>(다미르 펴냄)의 지은이인 이만주(67·사진)씨가 그 주인공이다.

“1인 출판사를 차려 시 선정부터 교정과 편집의 전 과정을 혼자 해냈어요. 밤샘 작업 끝에 1차 탈고본을 넘긴 날, 강남 길거리에 쓰러졌지요. 때마침 옆에 서 있던 행인이 심폐소생술로 응급처치를 하고 구급차에 태워줬다고 해요. 닷새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났죠.”

실제로 그가 들고 온, 지난해 6월 한양대병원의 진단서에는 ‘상세불명의 심장정지, 인공소생술로 성공’했다는 병명이 적혀 있었다. 담당 의사는 “소생술이 1~2분만 늦었어도 되살아날 수 없었다”고 했다.

‘언어유희’만 넘치는 시들 보고 실망
“사서 읽을 수 있는 재미난 시 쓰자”
출판사 퇴짜에 직접 차려 출간 작업
퇴고한 날 ‘심정지’ 쓰러져 기사회생

서울대 시절부터 인사동 순례한 ‘문사’
중동 비롯 70여개국 여행가로도 유명
“대양 누비는 고래의 유영” 작품평도

도대체 무엇이 그처럼 그로 하여금 절박하게 시로 이끌었을까? “3~4년 전쯤 지하철역의 미끄럼문 유리창 위에 쓰인 시들을 우연히 읽어봤는데 ‘언어유희’만 있을뿐 여운이 없었어요. 기꺼이 돈을 주고 사서 읽을 만큼 공감을 주는 시, 재미있는 시가 없는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목마른 놈이 샘을 판다’고, 그때부터 틈틈이 다른 시를 써보기 시작했죠.”

그런데 막상 원고를 여러 출판사에 보낸 그는 줄줄이 ‘퇴짜’를 맞았다. 일찍이 젊은 시절부터 여행작가이자 사진작가로 활동해왔고, 환갑 무렵 춤비평가로 등단해 무용평론도 줄곧 써온 그였기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지난해 봄, 우연히 술집에서 처음 만난 경제학자 우천식씨가 원고를 보더니 ‘세상에, 경제민주화를 시로 쓰다니’ 감탄하며 출판비를 후원해줘 직접 시집을 내게 됐어요.” 문인이 전혀 아닌, 일반 독자의 ‘마음에 와닿는다’면 기꺼이 세상에 내놓아도 좋겠다는 자신감을 얻은 덕분이었다.

시집의 맨 앞장 ‘시인의 말’을 통해 그는 “‘시대를 근심하며 함께 아파하지 않는 시는 참된 시가 될 수 없다’는 다산의 시론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안한다”고 썼다. 요즘 찾아보기 힘든 ‘문사의 패기’가 느껴진다.

실제로 그의 작품 목록을 보면, 60편의 제목만으로도 그의 살아온 내력과 세상을 보는 시선이 읽힌다. ‘독거노인’ ‘세 모녀의 죽음’ ‘월급 82만원의 청소부’ ‘치킨공화국’ ‘애들이 줄었어요’ ‘버림받은 청춘들’ ‘동반성장’ ‘나, 지구는 지금 심히 앓고 있소’ 등은 바로 오늘 한국 사회의 양극화 현실을 질타하거나 가장 고통받는 이들의 삶을 살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세 살배기 아일란의 주검’ ‘문화대혁명 전말’ ‘차우세스크 무덤 앞에서’ ‘생 텍쥐페리의 무덤’ ‘마추픽추’ ‘바벨탑들’ 같은 작품에선 70여 나라를 누벼온 여행가로 쌓아온, “한반도를 벗어난” 다방면의 식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대 지학과를 나온 그는 중동 건설현장을 시작으로 무역회사와 건설회사에서 일한 뒤 잡지사와 여행사에서 일했다. 85년엔 대학원에서 국제관계 전공으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90년대 초반 <한겨레>에서 주도했던 배낭여행 열풍 때 ‘1세대 길잡이’로 등장한 기억도 있네요.” 94년엔 <이만주 세계여행 에세이>로 ‘올해의 여행인상’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그는 석·박사 전문대학원인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한류’와 ‘동반성장’을 연구하고 있다.

사실 그의 문사 기질은 젊은 시절부터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인사동 술집 순례’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다. ‘인사동 밤안개’란 별칭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시집은 인사동 술꾼들 사이에서 먼저 입소문을 타고 있다. 그 자신은 한사코 ‘주류가 전혀 아니었다’며 손사래를 치지만, 80~90년대 아직은 문향과 풍류가 남아 있던 인사동에서 그는 당대 대표적인 선배 문인들과 교유를 맺었다.

“…돈은 어디서 나셨는지/ 사주시던 점심이며 저녁/ 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선생에게 얻어먹은 안동국시가 가끔은 되새김질한다…지인들이 선생 위한 조촐한 환갑잔치 연다기에/ 부조금 미리 내고 해외로 떠났는데/ 그것이 첫번째 조의금이 될 줄이야…그땐 환갑이 무척 노인인 줄 알았는데/ 이제 훨씬 더 늙은 우리가 인사동을 드나든다”(‘민병산 선생’ 중에서) “그가 남긴 350여 편의 시에는/ 어려운 시도 있지만/ 대부분 쉬워서 좋다/ 술과 모진 고문으로 얼굴은 일그러졌지만/ 그의 시는 반듯한 긍정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어 좋다/ 어떤 시는 편안히 흐르는 내 같으면서도/ 은하수만큼의 깊이가 있어 좋다”(‘천상병 시인’ 중에서)

이밖에도 시집에는 ‘옛날 옛적의 백석시집’ ‘인사동 소나무’ ‘종로3가 목로주점’ 등등 인사동 이야기가 제법 담겨 있다.

그와 더불어 인사동 터줏대감이자 그의 작품에도 등장하는 서정춘 시인은 “…이만주의 시는 다르다. 마치 대양을 누비는 고래의 유영을 보는 느낌”이라고 평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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