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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28 19:28 수정 : 2019.07.28 20:56

[짬] ‘평전’ 전문 김삼웅 작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자택 거실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사회 지도자는 인간적 품격을 갖춰야 한다는 점이죠. 지성과 이성, 도덕의식, 사람을 사랑하는 휴머니즘,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을 두루 갖춘 이들은 당대에 좌절과 희생을 겪어 큰 역할을 하지 못했더라도 역사의 심판대에서 영원히 살아남아요. 민중의 가슴 속에서요.”

평전 작가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에게 사람에 대한 책을 쓰며 사람에 대해 배운 게 뭐냐고 묻자 한 말이다. “독립운동가 신채호 이회영, 생명운동가 장일순, 정치인 노회찬 같은 분들의 품격을 보세요. 이명박 박근혜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지금 일부 야당 지도자의 언행을 보세요. 품격이 전혀 없어요. 저질 정상배이죠.”

그가 쓴 첫 평전은 독립운동가 박열을 다룬 <박열 평전>(1996)이다. 이달 초 40번째 평전인 매천 황현 평전이 나온다. 그가 평전 대상으로 삼은 인물들은 주로 독립운동가와 민주화, 통일운동 지도자들이다. “1970년대 초 야당 기관지 <민주전선> 기자를 할 때 60살까지 평전 20권을 쓰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도 했죠.” 목표보다 두 배 썼다고 하니 이렇게 말했다. “1차로 50권이 목표입니다. 집필을 마친 최제우, 노회찬 평전이 곧 나와요. 김지하 시인과 한승헌 변호사 평전도 쓸 겁니다.”

지난 24일 경기 남양주시 도심역 근처 자택에서 만난 저자는 김지하 편을 위해 김지하 관련 책 100권을 모았다고 했다. “제가 추천해 김지하 시 ‘오적’이 1970년 6월 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실리면서 김 시인이 구속됐거든요. 한 달 앞서 <사상계>에 나갈 때만 해도 박정희 정권이 이 시를 문제 삼지 않기로 했었죠. 한승헌 변호사는 평전 계획을 알렸더니 지금은 절판된 70년대 초기 저술을 여러 권 보내주셨어요.”

김삼웅 전 관장은 올해 박재혁 열사와 장일순 선생 평전을 새로 냈다. 이달 40번째 평전인 매천 황현 평전이 나온다. “의열단원인 박재혁 열사는 26살에 일제 경찰서장에게 폭탄을 던지고 순국했는데 그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그는 2012년에 17번째 평전 출간 기념 인터뷰를 했다. 지난 7년 새 23권을 더한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 아무것도 못 했어요. 대학 강의도 막판에 뒤집히고 지방 강의나 강연도 하루 전날 취소되기도 했죠. 평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죠. 결과적으로 잘 됐어요.”

이야기를 더 들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제가 독립기념관장이 됐을 때 <조선일보>가 사설까지 써 비판하더군요. 보수 정치인 이철승씨가 저의 취임을 반대하는 개인 성명을 내고 <조선일보>가 받아 보도하기도 했죠.” 그는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뒤 임기 6개월을 남기고 관장직에서 내려왔다. “2003년 독립기념관 사외 이사를 할 때 제가 제안해 1 전시관에 있던 <조선일보> 윤전기를 창고로 보냈어요. 일제 말 친일 논조 기사를 찍던 치욕적인 윤전기가 하와이 우리 교민이 쓴 활판 인쇄기를 제치고 전시되는 것에 분노를 느꼈죠. 그 때문인지 이명박 정부 들어 그 신문사 기자들이 며칠에 한 번씩 독립기념관 취재를 하더군요. 직원들이 불안해하고 저도 이명박과 함께 공직에 있다는 게 수치스러워 그만뒀지요.”

그와 보수언론의 대결은 뿌리가 깊다. “송건호 선생이 1964년 <사상계>에 쓴 ‘한국언론 곡필 사례’를 보고 처음으로 한국언론의 문제를 알게 되었죠. 그때만 해도 언론은 다 정론만 쓰는 줄 알았거든요. 그 뒤로 지식인의 곡필과, 프랑스가 2차 대전 뒤 나치에 부역한 정치인 경제인보다 지식인이나 언론인 작가를 엄하게 다스렸다는 것도 배우면서 한국 곡필사를 쓰겠다고 맘먹었죠.” 이 결심은 31년이 지나 현실이 됐다. 1995년 <곡필로 본 해방 50년>을 내어 권력과 자본에 기생하는 한국언론의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옛 평민당 기간지 <평민신문> 편집주간을 하던 1989년에는 <조선일보>와의 전투에서 선봉장 노릇을 하기도 했다. “평조전(평민당과 조선일보의 전쟁)이었죠. 그때 조선이 김대중 평민당 총재 유럽 순방을 악의적으로 과장 보도했어요. <평민신문>을 100만부 찍던 때죠. 의원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하는 데 일부는 지레 겁을 먹고 나오지도 않았죠. 저는 끝까지 싸웠죠. 그때 조선의 친일 행적을 깊이 알게 되었어요. 여러 곳에서 (조선의 친일 관련) 자료도 보내고 정보도 주었죠.” 그는 <조선일보>에 딱 한마디만 하고 싶다고 했다. “민족지라는 말만 하지 않았으면 해요.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가 일왕 마차에 폭탄을 던졌을 때 조선은 1면 머리로 ‘천황폐하 무사 환궁. 범인은 선인’이라는 제목을 올렸죠.”

서점 서가에 꽂힌 김삼웅 전 관장의 평전들.
평전이 좀 팔렸냐고 하자 단재 신채호 평전이 가장 많이 나갔단다. “8쇄 정도 찍었죠. 김원봉 여운형 평전도 좀 나갔어요.” 평전 인물 중 가장 닮고 싶은 이도 단재란다. “얼어 죽어도 곁불은 안 쬐려고 하셨어요. 꼬장꼬장한 성품이었죠. 조선말 출세 관문이었던 성균관 박사를 거부하고 구국 운동을 위해 만민공동회에 나가고 망명한 뒤에는 아나키스트 운동을 하셨죠. 강도 일본으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의열단 선언을 쓰셨죠.”

독립기념관장 시절엔 직접 나서 단재 전집을 내기도 했다. “그때 북한과 공동 전집을 내려고 단재 유고가 많은 북한 인민대학습당도 갔지만 북쪽에서 말을 바꾸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 평전 외에 단재 소설도 썼다고 했다. “올가을 출간하려고 지금 손을 보고 있어요.”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가장 아쉬웠던 순간을 꼽아달라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단재는 우리 역사에는 혁명이나 반란, 반정은 있지만 혁명적인 정화가 없다는 말을 늘 했어요. 단재 이후의 역사도 다르지 않아요. 1949년 반민특위도 민주반역세력을 청산하는 혁명적 정화를 못 했어요. 4·19 뒤 이승만 세력을 청산하려고 했지만, 쿠데타로 이루지 못했죠. 서울의 봄이나 6월항쟁도 같아요. 촛불혁명으로 또 기회가 왔는데 과거 탓만 하느냐는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의 왜곡된 논조로 지난 9년 적폐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어요. 몇 사람 법정에 세우기만 했지 잘못된 법률과 제도는 하나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어요.”

1970년대초 ‘민주전선’ 기자때부터 계획
1996년 독립운동가 ‘박열 평전’ 첫 발간
40번째 ‘매천 황현’ 마무리…50권 목표
“최제우·노회찬 이어 김지하·한승헌”

가장 많이 읽힌 평전은 ‘단재 신채호’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어서 소설로도”

청년 시절 그의 꿈은 고 장준하 선생이 창간한 잡지 <사상계> 기자였다. “제 첫 독서가 <사상계>였어요. 제 가치관이나 지식의 70%는 <사상계>에서 왔죠. 군대 때도 정기 구독을 하다 방첩대에 끌려가기도 했어요. 제대하고 1968년 이 잡지에 ‘한국 학생운동과 스튜던트 파워’란 제목의 논문을 응모해 논문상 가작을 받았어요. <사상계> 기자의 꿈은 1970년 잡지가 폐간되는 바람에 접어야 했어요. 대신 당시 <사상계> 대표 부완혁씨의 추천으로 <민주전선> 기자가 됐어요. 그 분이 신민당 정책위의장으로 가면서 저를 끌어주셨어요.”

그의 학력은 고졸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대학을 가지 못했다. “고향인 전남 완도군 소안도에서 고교를 나온 뒤 부산에서 고학하며 신문팔이를 했어요. 서울의 괜찮은 사립대에 붙었는데 그만 모아둔 등록금을 하숙집에서 절도를 당했어요. 그 뒤로 대학을 포기하고 군대에 갔죠.” 자신의 고졸 학력을 두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학벌과 문벌, 족벌, 군벌 등 온갖 벌족이 한국 사회에서 세를 떨치는 데 저와 같이 학벌이 없으면 그야말로 황야에 내몰린 거나 마찬가지이죠. 제가 독서나 글쓰기 같이 혼자 하는 작업에 몰두한 것도 그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간 쓴 평전에 대한 인상적인 반응 하나를 묻자 그는 <독부 이승만 평전>이 나왔을 때를 떠올렸다. “한 분이 전화해 욕을 하며 사과하지 않으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더군요. ‘독부’란 말을 썼다고요. 초대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은 국민에 대한 도발이라는 말까지 했죠. 제가 그랬어요. 독부란 말은 내가 지은 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 재임 때 심산 김창숙 선생이 비판하면서 쓴 말이라고요. 실제 소송을 하지는 않았어요. 일부 유족들은 책의 내용 몇 구절을 문제 삼아 돈을 요구하기도 했어요. 아버지나 조상 책을 팔아먹었으니 돈을 내놓으라는 거죠.” 물론 유족들이 자청해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다. “올해 나온 <장일순 평전>은 집필에 들어가자 기념사업회 쪽에서 자료를 많이 건네줬어요.” 집필에 앞서 유족과 평전의 내용과 방향을 두고 상의하지는 않는단다. “평전이 유족과 연계되면 수용하기 어려운 제안들을 받아야 해요. (유족들이) 칭찬 일변도로 쓰라고 하고 거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비판하죠.”

그는 ‘3만권 장서가’다. 집을 둘러 보니 거실과 침실까지 통로를 제외하고는 책이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은 헌책방을 찾습니다. 주로 신촌에 가요. ‘공씨책방’, ‘숨어있는 책’ 등 거기 있는 3곳의 헌책방이 제 단골이죠. 서울에 일이 있을 때 가서는 모임이 끝나고 무슨 큰 약속이나 있는 것처럼 저는 헌책방에 갑니다. 요즘은 헌책방에서 월척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하지만 빈손으로는 오지 않아요.” 왜 책을 읽어야 하느냐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 살기 위해 공기를 마시고 밥을 먹어야 하듯, 영혼이나 심성을 새롭게 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아직 책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3만권 장서가인 김삼웅 작가의 거실 모습. 70년대부터 정당 생활을 한 그는 당시 야당 지도자들과 인연이 적지 않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제 결혼식 주례를 섰어요. 유신 시절 야당 대표를 한 이철승씨는 한글 가로로 된 <민주전선> 제호가 너무 자극적이라면서 한자를 써 세로로 바꾸라고 지시했죠. 사사건건 기사를 축소하려고 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그는 지금도 원고지에 글을 쓴다. 요즘 들어 손발이 떨려 글을 쓰고 걷기가 힘들다고 했다. 독재 정권 시절 정보기관에 당한 고문 후유증이란다. “5공 초인 1982년 장영자 사건 때 <민주전선> 1면 톱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썼어요. 제가 겁이 없었죠. 그때 2박 3일 안기부에 끌려가 뒤로 손발이 묶인 채 구둣발로 가슴을 많이 맞았어요. 그 뒤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근육통이 옵니다. 그게 악화해 손 떨림 현상이 왔어요. 일주일에 3번 물리치료도 받고 있어요. 심장약은 20년째 먹고 있죠.” 떨리는 손을 보면서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한단다. 집필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구독하는 <한겨레> <경향>을 탐독하는 걸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 8시부터 4시간 집필합니다. 2시간 동안 자료를 찾고 오후 5시부터 2시간 정도 운동과 산책을 하죠. 제가 원고를 쓰면 막내딸이 주말에 컴퓨터에 입력합니다. 막내가 하기 전에는 아내가 했죠.”

그가 야당 기간지를 낼 때 함께 일한 후배 기자 여럿이 금배지도 달았고 장관이 되기도 했다. 그 역시 원내 입성에 대한 열망이 없지 않았단다. “제가 기관지 기자를 오래 해 국회의원을 너무 잘 압니다. 글 같지도 않은 글을 써 실어달라고 하고 보좌관을 시켜 쓰기도 하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국회에 들어가면 1등 국회의원을 할 자신이 있었어요. 디제이(김대중 전 대통령)가 두 번이나 국회의원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지키지 않았어요. 그래서 두 번 당을 뛰쳐나가기도 했죠. 한 번은 이희호 여사가 저를 찾아와 정권교체를 앞두고 그러면 되겠냐고 설득하기도 했죠. 자신은 실패하고 후배들이 앞서 원내에 진출하는 모습을 볼 때의 허탈감은 겪지 않은 사람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저는 언론이나 친일파 관련 책을 여러 권 냈으니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을 합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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