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18 11:57
수정 : 2017.08.19 11:58
[황진미의 티브이 톡톡]
최근 <아는 형님>(제이티비시)에 소녀시대가 출연했다. <아는 형님>은 고등학교 교실을 콘셉트로 한 예능 프로그램이다. 게스트가 전학생의 모습으로 교실에 들어서면, 100% 남성으로 구성된 패널들이 자기소개를 시킨다. 제목이 말해주듯, 패널들은 남성연대를 과시한다. 완력을 지닌 강호동이 뒤를 받치고, 막내인 김희철이 최전방 공격수로 깐죽댄다. 게스트가 걸그룹을 비롯한 여성일 경우 패널들이 게스트를 골려먹고 게스트는 자기방어에 급급한 구도가 극대화된다.
그런데 소녀시대 편에서는 구도가 뒤집혔다. 김희철의 ‘담배 드립’에 “라이터야, 성냥이야?”라며 받아치고, 서장훈의 추측에 “그건 네 이야기”라며 되돌려준다.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첫 음만 듣고 모두 맞히는 신공을 발휘하는가 하면, 군무를 추며 즐긴다. 서현의 제 흥에 겨운 춤이나 “미니스커트를 입고 팝핀을 춰도 괜찮아, 난 이제 내가 멋있다는 걸 아니까”란 효연의 말은 해방감과 나르시시즘을 느끼게 해주었다. 소녀시대를 키운 것은 거대 기획사와 삼촌 팬들이지만, 그들이 십년간 살아남은 것은 실력과 노력 덕분이었다. 커버댄스를 추는 아시아 소녀들에게 소녀시대는 ‘임파워먼트’를 선사했다. 이화여자대학교 투쟁의 현장에서 ‘다시 만난 세계’가 불린 것은 우연이었지만, 탄핵 시위의 ‘페미존’에서 다시 불린 것은 여성연대의 상징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아는 형님> 소녀시대 편은 소녀시대의 명성이 거저 얻어진 게 아님을 증명하는 자리이자, 남성 패널 일곱명을 가볍게 누른 여덟명의 소녀시대를 통해 예능 프로그램의 성비가 어떻게 힘의 균형을 바꾸는지 보여준 자리였다.
현재 예능 프로그램의 패널은 남성 일색이다. 그런데 성비만 제대로 맞춰도 담론의 질이 바뀐다는 것을 증명하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온스타일>의 <열정 같은 소리>는 청년 담론을 다루는 토크쇼로, 사회자를 제외하고 패널의 성비가 4 대 4다. 흔히 청년의 어려움은 남성들만의 것으로 그려진다. 고통받는 청춘은 남성들뿐이고, 여성은 남성의 힘듦을 나타내는 대상물로 그려진다. 가령 ‘가난한 청년이 연애를 못해 괴롭다’는 서사에서 여성은 힘듦의 주체가 아니라 ‘갖기 힘든 대상’이다. 여성에겐 남성을 위로하거나 각성시키는 역할이 주어지고, 이를 거부할 경우 낙담과 분노의 표적이 된다. ‘된장녀-김치녀’ 담론이나, ‘중식이 밴드’로 불거졌던 정의당의 내홍, 영화 <청년경찰>에서 남성청년의 각성을 위해 범죄의 희생물로 존재하는 젊은 여성 등이 이러한 구도의 산물이다. 그러나 <열정 같은 소리>는 청년 담론의 중심에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등장시킨다. 패널 중 한 명인 이랑은 작년 연말 시상식에서 받은 트로피를 판매하여 화제가 되었다. 이랑은 그 50만원으로 월세를 냈다고 말한다. 3회에선 심상정 의원을 초대하여 열정 페이와 외모 스펙을 논했는데, 여기서 여성은 이중고를 겪는 당사자이지 생활고에서 면제된 존재로 취급되지 않았다. 만약 패널이 모두 남성이었다면 어땠을까. 남성들의 목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여성은 남성의 경제력에 기생하는 존재인 양 그려지지 않았을까.
<온스타일>은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케이블 채널로 주로 뷰티, 패션 등의 콘텐츠를 내보내는 채널이었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에게 여성주의에 대한 요구가 있음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여성 패널들로만 구성된 예능을 잇달아 내놓았다. 토크쇼 <뜨거운 사이다>는 남성 패널들만 나오는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 “부장님들의 강의 같다”는 일성으로 시작하여, 예능 프로그램의 성비 불균형을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2회부터 몰래카메라의 폐해와 영화 촬영현장의 여배우 착취, 인터넷의 여성혐오 콘텐츠 등이 다루어졌다. 첫 회에 사진작가 로타를 게스트로 부른 것은 찬반의 여지가 있지만, 롤리타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사진 작업으로 논란을 일으킨 로타가 청문회와 비슷한 분위기에서 패널들의 질문을 받으며 비루한 자기방어를 늘어놓는 모습은 다른 예능에선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또한 문재인 팬덤을 거론하거나, 홍준표와 탁현민의 여성비하 발언을 언급한 것도 정치라는 거대 담론을 배제하지 않음으로써 여성 예능의 폭을 넓게 유지하려는 모습으로 읽힌다.
<온스타일>에서 같은 시기에 내놓은 리얼리티 쇼 <바디 액츄얼리>는 더 급진적인 여성주의를 추구한다.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과감하게 다루면서, 생리컵이나 질염에 관한 유용한 정보도 나누었다. 클리토리스를 그려보라는 말에 여성들보다 남성들이 훨씬 구체적으로 그린 것은 그동안 여성의 성과 쾌락이 누구에게 속해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또한 플러스사이즈 모델인 김지양이 고정패널로 출연하여, 획일적인 미의 기준을 깨고 있는 것도 의미 있는 시도이다.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더 잘 알고 긍정하는 데 프로그램이 일조하리라 믿는다.
지금껏 여성들은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여성들의 말은 무의미한 ‘수다’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 ‘침묵’과 ‘수다’ 속에 세상의 절반이 있었다. 여성들의 말문이 열렸다. 이제 남성들의 귀가 열릴 차례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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