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9.29 17:30
수정 : 2017.09.30 00:51
[토요판] 황진미의 TV 톡톡
<드라마 스페셜: 혼자 추는 왈츠>(한국방송2, 9월24일 방영)는 취업준비생들의 피폐한 사랑을 그린 단막극이다. 제목이 절묘하다. 왈츠는 짝을 이루어 추는 춤으로, 혼자 출 수 없다. 극중 두 사람도 처음 왈츠시험을 보기 위해 짝이 되고, 연인이 되었다. 한데 ‘혼자 추는 왈츠’라니, 이런 결합이 무효화되고 둘은 각기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뜻인가. 오은의 시 <이력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오늘 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제목이 암시하듯, <혼자 추는 왈츠>는 사랑의 불가능성을 그린 안티-멜로이자, 이력서를 써야 하는 분열된 청춘의 초상화이다.
지방 출신으로 서울 명문대에 다니는 민선은 수년째 졸업을 미룬 채 대기업 인턴으로 근무 중이다. 서울 출신으로 지방캠퍼스를 졸업한 건희는 하청업체 영업직원이다. 사귄 지 3000일 된 연인이지만, 데이트 비용 문제로 티격태격한다. 민선이 정규직 전환에 실패하고, 건희가 직장을 그만둔 상태에서 둘의 불안감이 폭발한다. 다투고 헤어진 두 사람은 같은 회사 면접장에서 마주친다. 둘 다 합격의 희망에 부풀었을 때 둘은 극적으로 화해하지만, 최종면접에서 경쟁할 처지에 놓이자, 둘은 첨예한 갈등에 빠진다.
<혼자 추는 왈츠>는 연인마저 경쟁자가 되어버린 젊은이들의 황폐한 내면을 비춘다. 드라마의 만듦새가 치밀하고 깔끔한 편이지만, 극의 내용까지 지지하기는 쉽지 않다. 그보다는 이들의 인격과 관계를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첫 만남을 복기해보자. 학점이 필요한 민선은 건희에게 “함께 왈츠시험을 봐주면 사귀어주겠다”고 부탁하다가 거절당하자, “지방캠퍼스 주제에”라며 이죽거린다. 건희는 불쾌했지만 전철에서 민선이 남자친구에게 비굴하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는 ‘구원하듯’ 민선의 왈츠 파트너가 된다. 짧은 묘사이지만, 둘의 성격이 드러난다. 민선은 인간관계를 도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고, 건희는 여자보다 우월적 위치에 놓이고픈 남성적 욕망을 지녔다. 무리한 억측이라고? 좀더 살펴보자.
민선은 회사 사람들에게 애인이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공기업에 다닌다’고 거짓말을 한다. 팀장과 사귈 기회가 생기자 잠깐 사귀기도 했었다. 민선이 건희를 계속 사귀는 이유는 뭘까. 수년째 졸업을 미루며 학교라는 소속감을 유지하려는 것과 비슷한 심리가 아닐까. 민선은 건희가 “불쌍해서 사귄다”고 말한다. 남의 불행에 기뻐하는 자신이 유일하게 동정하는 사람이 건희인데, 건희마저 없으면 자신이 ‘괴물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면접장에서 성희롱적 질문에 민선은 “결혼하지 않겠다. 아이가 생겨도 지우겠다”고 말한다. 결연한 충성맹세에도 불구하고, 민선은 정규직이 되지 못한다. 술자리에서 부장이 말한다. 민선의 대답이 인품을 의심케 하는 불쾌한 답변이었다고. 민선이 화를 낸다. 성희롱적인 질문이나 해대고는 인품타령 하는 부장의 위선에 한방 먹이려나 했더니, 부장이 아닌 비정규직의 머리채를 잡는다. 지방대 출신이면서 내 정규직 일자리를 빼앗았다고.
건희는 ‘반수’나 편입을 할 요량이었지만 지방캠퍼스를 결국 졸업한다. 하청업체에 다니면서도 곧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고 다닌다. 그는 학교와 직장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현재의 자신을 부인한 채 살아간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이력서엔 아예 고졸이라 적을 만큼 학벌 콤플렉스가 심하다. 그는 자신의 학벌 콤플렉스를 자꾸 자극하는 민선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민선이 자신보다 잘되는 게 싫고, 그런 자신이 못나게 느껴졌다고 토로한다. 이것은 단지 친구 사이의 질투가 아니라, 남자가 여자보다 학력이나 직장이 높아야 한다는 성별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열등감이다. 대기업 정규직 한 자리를 놓고 민선과 경쟁하게 되자, 그는 “결혼하자. 내가 너 책임질게”라고 말한다. 남자인 자신이 취업할 테니, 너는 나를 믿고 양보하라는 뜻이다.
민선은 성공해야 된다는 일념으로, 악으로 깡으로 달리는 인물이다. 아무도 믿지 못하고, 아무도 사랑하지 못한다. 건희는 가부장적인 성별 고정관념으로, 민선이 취업하고 자신이 양보하는 그림은 그리지 못한다. 이런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존중을 바탕으로, 한 팀이 되어 미래 전략을 짜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즉 둘이 추는 왈츠는 불가능하다.
드라마가 비추는 극악한 상황을 단지 리얼하다고 추인할 수 있을까. 이는 다른 인격과 다른 관계의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윤리적 방기가 아닐까. 드라마는 정규직 일자리를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기계장치처럼 그리지만, 정규직이 된다고 피폐한 인성이 해결되진 않는다. 3년 후 취업에 성공한 둘의 만남이 이를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 밑바닥을 내보였던 3년 전 일이나 현재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 드라마는 마지막 회상 장면을 통해 이들의 과거가 로맨스로 장식되었다는 착시를 주지만, 이들은 처음부터 혼자 추는 왈츠였고, 화장실에서 혼자 우는 현재도 혼자 추는 왈츠의 다른 판본이다. 생존에 내몰린 경쟁심과 마초적 열등감에서 벗어난 다른 인격의 가능성을 상상하지 않는다면, 로맨스는 없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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