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6.02 05:00
수정 : 2018.06.02 09:26
MBC ‘이별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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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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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이 떠났다>(문화방송)는 소재원 작가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다. 혼전 임신, 불륜, 이혼 등 막장 드라마적 요소가 빼곡하지만, 생생한 대사와 디테일한 상황 묘사로 상투성을 벗어난다. 임신한 대학생 정효(조보아)는 연인의 엄마 영희(채시라)를 찾아간다. 영희는 은둔형 외톨이다. 남편이 불륜으로 아이까지 둔 걸 알게 됐지만, 이혼하는 것이 손해라는 생각으로 버티는 중이다. 정효가 영희를 찾아간 이유는 ‘딸바보’ 아버지를 피해, 낙태 후 몸 추스를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효는 출산으로 생각이 기운다. 정효와 영희의 동거가 상처받은 여성들끼리의 연대가 될 것인지, 괴상한 가족주의로 함몰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에 대한 많은 생각거리를 던지는 것은 분명하다.
정효의 임신 소식에 민수(이준영)의 첫마디는 “너 피임 안 하냐? 사후 피임이라도 했어야지”였다. 둘은 피임에 대한 논의 없이 성관계를 지속해온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한 피임은 뭐가 잘못된 거지?”라 말했어야 옳다. 특히 사후 피임에 대한 언급은 경악스럽다. 피임에 대한 남성의 책임이 정립되지 않았고 콘돔 사용률이 10년 만에 3분의 1로 줄어든 상황에서, 응급 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할 경우 피임에 대한 책임이 오로지 여성에게 귀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참’임을 보여준다.
피임에 대한 논의 없이 성관계를 지속해왔다는 것은 남성 주도의 일방적인 성행위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임신 후 벌어질 일들에 대한 그의 태도를 예고해준다. 민수는 용돈이 바닥났다며, 낙태 시술 비용을 반반씩 부담하자고 한다. 이런 반응은 최근 법무부가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가 슬그머니 철회한 변론서에 언급되었던 ‘성교는 하되 책임은 지려 하지 않는’ 태도의 진수다. 어차피 임신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낙태를 하든 출산을 하든 여성의 몸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즉 여성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책임성에 대한 논의는 남성을 향해야 한다.
정효가 “심장이 뛰는 생명을 지우는 일이 그리 쉽냐?”고 묻자, 민수는 “태아는 세포일 뿐”이라며, 아이를 낳을 경우 자신이 지게 될 부담을 나열한다. 혹자는 민수의 말이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여성들의 주장과 같다고 오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표된 내용이 같다고 해서 같은 뜻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민수가 진정으로 가볍게 여기는 것은 태아가 아닌, 임신한 여성의 몸이다(태아는 어차피 안중에 없다). 그는 비용 문제를 가장 중시할 정도로 임신, 낙태, 출산을 겪는 여성의 몸과 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효는 이미 임신으로 인한 몸의 변화를 심각하게 겪고 있다. 정효가 임신을 알게 되고, 태아의 존재를 엄중하게 느껴 출산으로 기우는 계기는 입덧이라는 신체변화 때문이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여성들이 태아는 독립된 생명이 아니라고 할 때,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말이 아니다. 태아를 모체와 떨어뜨려서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태아가 자궁에서 인간의 모습을 갖추고, 무사히 태어나고, 이후 자라는 모든 과정에 여성의 몸과 삶이 절대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또한 이 모든 과정의 사정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도 임신한 여성이다. 따라서 임신을 지속할지 중단할지,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존중되어야 한다.
아이를 낳으면 자기 인생이 망한다며 민수가 펄쩍 뛰는 이유는 아버지 상진(이성재)의 선례를 보았기 때문이다. 세영(정혜영)과의 불륜으로 아이가 태어난 뒤 상진은 두 집 살림을 하게 되지만, 월급의 대부분을 아내에게 ‘차압’당한 채 어느 집에서도 환대받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더욱 인생이 망가진 것은 아내와 세영이다. 특히 스튜어디스 사무장이던 세영은 출산 후 ‘첩의 딸이 첩이 되었다’는 비난을 받으며 경제적 궁핍에 시달린다. ‘임신은 성교의 결과’이므로, 징벌의 차원에서 낙태죄를 유지해야 된다던 법무부 논리대로라면 세영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이라고도 볼 수 있는) 하룻밤 ‘문란’의 죄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세영의 사례는 임신과 출산을 성교의 자연스러운 귀결로 받아들이는 사고가 야기한 끔찍한 질곡을 보여준다. 임신은 성교의 결과가 아닌 ‘실패한 피임의 결과’로 보아야 하며, 낙태가 아닌 출산을 택하는 것이 모두를 지옥으로 몰고 갈 수도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효는 출산을 결심한다. 그 이유로 드라마는 정효가 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을 제시한다. 지금까지 드라마가 원작과 다른 곳은 두 군데이다. 첫째는 원작에서 정효는 처음부터 출산을 결심하고 영희를 찾아갔다. 둘째는 원작에서 정효 아버지 수철(정웅인)은 끔찍한 집착과 폭력을 보여주는 인물로, 정효 엄마가 떠난 것도 그의 성격 탓이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수철을 딸에게 신제품 생리대를 사다 주는 ‘다정한’ 아빠로 묘사한다. 하기야 순정과 집착과 변태는 종이 한 장 차이니, 납득 못할 각색은 아니다. 하지만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딸을 향한 변태적인 집착과 경계가 불분명한 감정을 부성애로 포장하면서, 이에 감화되어 힘든 상황에서도 출산을 택하는 정효의 모성애를 찬양하는 출산장려 드라마로 흐르지 않을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그런 부성애와 모성애, 부디 사양하고 싶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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